다사다난했던 수난기는 온라인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오락실에서 대전 격투 게임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다.
보통 남들이 안 하는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아서 느긋하게 엔딩이나 볼까 하고 게임을 시작하면 건너편에서 어떤 남자가(나이 불문하고) 2p로 이어서 게임을 하곤 했다. 같은 게임이 3대나 설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2p로 이어서 도전을 하고, 자신이 지면 몸을 일으켜 건너편에서 자신을 이긴 상대가 누군지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는 여자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다시 확인하자(때로는 여자인 걸 미리 눈으로 확인하고 도전하는 경우도 있다.) 졌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는지 몇 번이고 다시 재도전한다. 가끔 옆에 여자친구가 있는 경우라면 체면이 안 서는지 이길때까지 도전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항상 이기기만 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진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지게 되면 한 번 정도 더 도전을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이 자리에선 게임을 못 하겠다는 생각에 미련 없이 다른 자리로 가서 게임을 했다. 게임을 조금 하고 있으면 잠시 후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났다는 문구가 뜬다. 슬쩍 일어나 누군지 확인을 해보니, 아까 나를 장렬하게 패배시켰던 그 인간이다. 아까 자기가 이겼던 자리는 망설임 없이 동전을 넣어둔 채로 비워두고 내가 게임을 하던 자리에 굳이 와서 게임을 잇는다. 실력 차가 나면 이길 수가 없다. 다른 자리로 옮겨도 똑같을 것이기에 그런 날은 게임을 못 하고 그냥 집에 와야 했다. 꼭 여성 유저가 게임을 할 때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오락실에 한두명은 존재했다.
여자 게이머에게 졌다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그렇게 아득바득 이기려고 기를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게구리 선수 논란 등을 보면 10년 20년이 지나도 그 정신은 뿌리 깊게 이어져 아직 현대 온라인 게임에 남아 있는 듯하다.
콘솔 게임에 손을 대면서 중고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중고 거래의 흐름을 생각해보자.
- 약속 장소를 정하고,
- 만나서 돈을 주고,
- 게임/게임기를 받고, 물품의 상태를 확인하고 헤어진다.
실제로 만나게 되면 5~10분 사이에 모든 게 끝이 난다. 그런데도 유독 중고 거래를 잡으면 ‘이런 게임 여자분이 잘 안 하시는데’(게임 장르가 루리웹 등에서 매우 인기 장르일 경우) 혹은 ‘이런 게임은 여자들이 좋아하시더라구요~근데 그거 아시나요…?’(TV CM이 나오는 대중적이고 라이트한 게임일 경우)같은 스몰토크를 가장한 맨스플레인을 듣는 건 기본이다.
중고 거래 중 가장 끔찍했던 기억은 거래 후 한밤중에 그 핸드폰 번호로 ‘같은 게임하는 사람끼리 친하게 지내자.’ 는 식의 문자를 받고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연락이 왔던 일이었다. 게임을 조금 싸게 사 보려고 10분 미만의 단 한번의 만남을 가진 것 뿐인데 이런 경험을 해야 한다는게 속상했고 그런 경험담을 털어놓자 누군가(보통 이런 얘기를 들은 남자)는 위로랍시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다고.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다는 걸 누가 모르나? 내가 직거래를 하러 만날 사람이 이후에 나에게 어떻게 대할지 이마에 쓰여 있기라도 해서 알아서 피할 수 있나? 이런 일련의 경험들을 몇 번 반복적으로 겪고 나서는 중고 거래는 점점 줄여나갔고 부득이하게 거래할 일이 생기면 전화 연락 대신 문자로만 통화하고, 내 번호를 쓰지 않았으며, 거래 장소에는 항상 남자인 친구나 애인을 데리고 동행했고, 나는 그냥 친구인 척 거래가 끝날 때까지 구경만 하거나 다른 장소에서 거래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게임사가 여성 게이머를 대하는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0년정도 지났으니까 얘기해도 되겠지. 모 유명 온라인 게임에서 여성 유저들을 상대로 오프라인 모임을 개최한 적이 있었다.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모인 이 여성 유저들의 기준은 RPG 게임을 어느 정도 하지만 모 온라인 게임은 하지 않는 소위 하드 게이머들이었다. 당시 그 게임사에서는 ‘왜 우리 게임은 여성 유저들이 잘 하지 않을까?’ 가 궁금한 모양이었고 좌담회에서 게임사가 메인으로 건 문제 해결법은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게임 이벤트 선물로 명품 가방을 주면 여성 유저들이 게임을 할까요?’
그 자리에 있던 여러 명의 여성 중 단 한 명도 그 의견에 동의한 사람이 없었다. 그 게임을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게임은 한번 게임을 시작하면 4~5시간은 전화기도 꺼놓고, 각종 연락을 차단하고 오직 그 게임에만 몰입해야 하는 게임으로 유명했는데, 여성 게이머들은 그런 이미지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접하다 보니 굳이 그렇게까지 해 가며 그 게임을 하고싶지 않아 했다. 그런 의견들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럼 이벤트 상품으로 유명 화장품을 주면…?’
같은 소리를 하는 회사라니. 그 외에도 여성유저들이 데이트 때 게임을 하는지에 관한 여부와 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물었고 (굳이 데이트 중 게임을 얼마나 하는지를 물어본 것은 아마 그런 유저들을 끌어들이려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그 모임에 참석한 여성 유저들은 회사가 원했던 대답과는 다른 종류의 발언을 (우리가 뭐 애인이 이 게임 하자고 해서 무조건 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등등) 했고 이 여성 유저들은 게임을 하드하게 하기 때문에 남자 유저들과 차이가 없다 = 일반적인 여자 유저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없고 마케팅에 적용할 수 없을 것 같다. 는 의견을 내비쳤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모임의 목적은 여성 게이머들을 상대로 이 게임을 여자들이 왜 안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물어보는 자리였다.
여성 유저들에게 게임이 가진 분위기는 매우 중요하다.
처음에 오버워치가 각종 여성 커뮤니티에서 쉽게 이슈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롤은 채팅 시간 동안 온갖 패드립이 나와서 게임하기 불편했는데 오버워치는 게임 템포가 빨라서 안 그렇다더라’ ‘블리자드가 다른 게임에서 욕설이나 비매너 건은 제제를 칼같이 한다던데 오버워치도 그렇지 않겠느냐’ 는 이유였다. 여성 유저들은 자신이 여성임이 공개됐을 때 생길 수 있는 불편한 분위기에 대해 이미 수도 없이 경험으로 알아 왔기 때문에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편한 분위기로 게임하기를 원한다. 모두 오버워치에 그 점을 기대했으나 운영 팀의 미지근한 대응 들을 보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약 10년이 지난 지금, 게임사가 여성을 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파이널 판타지14> 레터라이브 8화의 여성 유저 인구비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오프라인으로 촬영되어 생중계되던 이 방송은 여성 유저의 전체 비율과 여성 인구가 많은 특정 서버를 언급하며 ‘여자친구가 없는 사람도 파판을 통해 솔로를 탈출했다’ 는 발언 및 ‘중매게임’ 과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며 여성 유저를 같은 게임을 하는 사람이 아닌 단순 연애 대상으로 취급했다. 여자들은 레이드 같은 하드 컨텐츠를 하지 않아서 레이드에 사람이 없다는 식의 발언은 덤이었다.
E-sports 중계 현장을 가보자. 그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현장까지 발걸음을 옮겨가며 좋아하는 선수들을 응원하려고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우연히라도 카메라가 그 장소에 앉아있는 많은 수의 여성 유저들을 비추면 그때부터 얼굴의 일부를 가리거나 피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유는 뻔하다. 그들도 게임을 하고 인터넷 커뮤니티를 한다. 자신들이 가끔 들어가 보는 사이트에서 여성 유저가 TV로 보일 때 익명의 사람들이 말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단 몇 초 카메라에 담겼을 뿐인데 예쁘면 예쁘다는 이유로 성희롱을 듣고 못생겼으면 못생겼다는 이유로 야유와 성희롱을 같이 받는다. 최근에는 뭐 잘났다고 얼굴을 가리고 다니냐. 그럴 거면 나오지 말아라. 같은 소리까지 하면서도 자신들이 한 발언이 문제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예전과는 다르게 정말 많은 사람이 연령과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게임을 즐기고 있다. 예전에는 게임을 하기 위해서 PC를 켜거나 케이블을 TV에 연결하거나 해야 했었지만, 지금은 그냥 손 위에 든 핸드폰을 켜서 게임을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 당신이 확률형 아이템에 빠지지 않는 이상, 게임이라는 취미는 다른 취미에 비해 비용도 저렴한 편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6 게임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인구 중 게임을 하는 사람의 비율은 이미 절반을 초과한지 오래이며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그 수치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런 인구수에도 불구하고 여성 유저들은 지금까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위 ‘주류 게이머’들은 말로는 우리는 다 같은 게이머일 뿐이고, 친목질 예방과 커뮤니티 내 분란을 막기 위해서는 성별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고 이 세계에서는 그것이 마치 진리인 것 처럼 통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성별은 그냥 ‘여성’일 뿐이다. 이 세계에서의 디폴트 형 인간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비약하자면. ‘다 같은 게이머다.’라는 말 밑엔 ‘네가 여자인 티를 내면 논란 거리밖에 안 되니까 입 다물고 조용히 게임이나 해라’ 는 얘기가 숨어 있다.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는 건 이때 쓰는 말이 아니다. 다른 한쪽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눈치 보고 자신을 숨기고 사는 취미가 어떻게 평등한 취미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게임을 하는 여성의 인구 수가 꾸준히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한결같이 정체된 분위기 속에서 게임을 해 왔다. 십 년 이십 년 후에도 게임을 하고, 게임이 좀 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화 된 취미가 되기 위해서는 남성이 기본값인 게임 커뮤니티의 내부의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