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스팀에서 ‘프린세스 메이커 1,2 리파인’ 이 발매되었다. 1995년(‘프린세스 메이커 1’은 1991년)발매된 이 게임은 육성 시뮬레이션 장르의 시초이자 바이블이다.
물론 지금에야 모두가 즐기는 육성 시뮬레이션이라지만,
처음부터 프린세스 메이커가 온 가족의 육성 시뮬레이션의 탈을 쓴 것은 아니었다. 1편의 경우 딸의 옷을 ‘벗긴다’는 선택지가 존재했고 딸을 때릴 경우 매력(원판은 색기)이 올랐다. 2편의 경우 원조교제를 제안하는 남성 캐릭터들이 나왔으며 매력이 높은 상태에서 무사수행을 갔을 때 강간을 당하는 이벤트도 존재했다. 딸의 나이가 어느 정도 차게 되면, 아르바이트 항목에 매춘이 추가로 발생하며 바캉스를 가게 되면 나체의 딸을 볼 수 있었다.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의 여름 바캉스. 이후 '리파인'이 발매며 이 이미지들은 수영복이나 천을 덧댄 모양으로 수정되었다.
“(딸 이름)은, 남자를 유혹하여 상대방의 돈을 털고 도망치는 일을 시작했다.
어느 날, 드디어 상대방 남자에게 들켜, 심하게 매를 맞았다.
(딸 이름)은 사실 아직 처녀였지만, 미친 듯이 성난 남자는 그녀를 난폭하게 다뤘다.”
'프린세스 메이커1'의 사기꾼 엔딩은 딸이 강간을 당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프린세스 메이커 2'에서는 가슴 사이즈나 매력이 높을 경우 많은 일이 일어나며 가슴 사이즈는 굿 엔딩을 보기 위한 지표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프린세스 메이커' 1, 2는 어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다는 면에서 문제가 많은 게임이었다. 플레이어는 아버지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딸’을 키운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능력과 신체 사이즈는 수치화된다. 딸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면서도 딸이 가진 직업들은 점수에 따른 엔딩으로 치환된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에는 많은 여성 팬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발매되었던 타 게임의 여성 캐릭터들과는 달리 달리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의 딸들은 주인공이 되어 다른 NPC들과 커뮤니케이션하고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노력에 따라 자신(플레이어)이 원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여성’이라서 할 수 없는 아르바이트나 교육은 없었고 ‘여성’이어도 왕국 최고의 무언가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점은 여성 게이머들에게 일종의 대리만족을 주었고, 때문에 플레이어가 ‘아버지’로 명명되었음에도 많은 여성 게이머들이 '프린세스 메이커'를 즐길 수 있었다. 제작사인 가이낙스 측에서도 이런 인기를 인식했는지 이후 플레이어의 성별에 어머니를 추가시켰다.
결국에 결혼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이름처럼 게임 전반에서 직업 엔딩 외에도 시리즈 내내 강조되었던 성공의 지표는 ‘왕자와의 결혼’이다. 그렇다면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에서 여성의 ‘결혼’은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까?
시리즈의 기초가 된 ‘프린세스 메이커 1’의 경우 딸의 능력에 따라 결혼 상대가 정해진다. 매력 외에도 기품이나 체력 등의 능력치는 신랑감을 고르는 기준이 되어 때로는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기도 하고, 무기상인의 아내가 되기도 하며, 이혼하거나 누군가의 첩이 되기도 했다. 결혼 자체가 엔딩으로 이어지며 그 외에 딸이 어떠한 직업을 가졌다는 묘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누군가와 결혼해서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나온다.
‘프린세스 메이커 2’는 직업 엔딩과 결혼 엔딩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왕국 최고의 학자나 용사가 되었다 하더라도 왕자나 마왕, 새끼용 등 특수 NPC와 결혼을 하게 된 순간 직업적 평가는 전부 사라지고 엔딩은 딸이 청혼을 받고 결혼을 하게 되는 모습만 묘사한다. 딸의 직업적인 성공을 보려면 NPC와의 결혼을 포기하고 평범하고 얼굴 없는 남성과 결혼을 해야 한다.
추가로, 특수 NPC인 유스 드래곤의 경우 딸에게 청혼하러 올 때 함께 온 늙은 드래곤이 지참금을 주면서 결혼을 시키자는 제안을 하고 부모가 그것을 받아들일 경우 딸은 거부할 수 없다. 도덕 수치가 낮을 경우 딸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이 점은 엔딩에서 마이너스 요소가 된다. 엔딩에서 평가당하는 수치에는 모성애도 존재하는데,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보육원 아르바이트를 반드시 해야만 한다.
‘프린세스 메이커 3’은 1처럼 결혼 엔딩이 따로 떨어져 나왔다. 왕자의 수가 전과 달리 늘어나 수많은 ‘프린세스’ 및 결혼 엔딩이 존재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결혼’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매력 수치가 최소 500 이상이 되어야 한다. 매력 수치가 낮을 경우 결혼엔딩은 볼 수 없다. 왕자들은 매력이 낮은 딸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프린세스 메이커 5’의 결혼 엔딩은 시리즈중 가장 최신작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실망스럽다.
기존 시리즈에서 스탯이 쌓이게 되면 자동으로 진행되던 이벤트들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선택지가 추가되었고 이것들을 거치고 나면 NPC는 딸에게 프로포즈를 한다. 문제는 승낙할 경우 이 결혼들이 지나치게 씁쓸하다는 점이다.
모범생인 켄이치의 경우 결혼 엔딩에서 은근슬쩍 미루는 켄이치의 성격 탓에 가사는 전부 딸의 몫이 된다. 집안일 때문에 자주 싸우지만 ‘싸워도 나한테 폭력은 안 쓰니까’ 하며 자기합리화하는 딸의 대사를 볼 수 있으며 딸의 독립심이 높으면 이혼을 하게 된다. 굿 엔딩에서는 그가 집안일을 떠넘기는 걸 참지 못해 따지고, 켄이치는 잔소리를 견디지 못해 이혼하게 된다.
독립심이 높아 이혼하는 것은 신야도 마찬가지다. 스타 부부로서의 화려한 삶을 이어가며 연예계의 주목을 받으며 살지만 사람들이 보는 눈이 있으니 조용히 살라는 신야의 말을 참지 못해 다툼 끝에 이혼하고, 두 경우 다 게임은 독립적인 딸을 ‘제멋대로인 딸’로 평가 한다.
(이번 시리즈에 추가된 ‘독립적’인 성격은 기존 작품처럼 부모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딸이 자신의 의지대로 스케줄을 수정하므로 시스템적으로는 한 걸음 진보한 셈이지만. 딸이 플레이어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싫어하는 유저들이 존재했다.)
히토시와 결혼을 하게 될 경우 다섯의 아이를 낳아 독박육아를 하는 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엔딩 지문은 전부 육아에 치여 정신없어하는 대사뿐이며, 힘든 삶이지만 자신의 행복은 아빠와아이들이라 하며 마무리되는 일반 엔딩과 달리 이혼 엔딩의 경우 이러한 독박 육아를 견디지 못한 딸이 육아를 도우라고 화를 내고 히토시의 ‘육아는 여자의 일’ 라던가 ‘애 수발은 가정부한테 시키면 되니까 나가라’는 대사를 한다.
연예계 기획사 스카우터인 산쥬로의 경우 딸과의 나이 차가 19살로, 딸은 결혼 후 스타가 되는 것 보다는 산쥬로를 돕는 게 꿈이라며 내조를 한다. 도덕심이 높은 경우 이혼을 하게 된다. 모리 산쥬로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도덕심이 높은 딸은 용납하지 못하고 이혼을 하게 되는 것. 그 말인즉, 도덕심이 낮을 때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거나 발생하더라도 딸이 묵인하고 살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너무 섬세해도, 너무 독립적이어도, 너무 도덕적이어도, 너무 자존심 세도 곤란하다니까
이처럼 ‘프린세스 메이커 5’에 등장하는 결혼엔딩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지나치게 섬세하거나 독립적인 성격이라면 결혼생활에 방해가 된다. 도덕심이나 프라이드가 높아도 마찬가지다. 성격이 특출나지 않고 무던할 경우에 결혼 생활은 행복하게 묘사된다. (결혼 상대의 아쉬운 점들에 대해 딸이 언급하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참고 넘기며 반대의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프린세스 메이커'에서는 딸 자신에게 꿈이나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결혼하게 된 순간 남편 혹은 누군가의 엄마 역할을 보여줄 뿐이다. 딸의 입을 통해 남편이 행복하기 위한 길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남편의 곁에서 남편을 돕는 것이라는 대사는 결혼한 현대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딸은 소꿉친구와 결혼하더라도 엔딩에서는 남편에게 극존칭을 쓰며 남편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엔딩들은 현대적인 배경과 맞물려 기묘한 현실감을 부여하고 플레이어에게 찝찝한 뒷맛을 남기게 된다.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는 발매된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플랫폼이 나올 때마다 재발매되고 인기리에 팔린다. 그 과정에서 선정성인 그래픽은 고쳐졌지만, 내용물은 바뀌지 않았다. 그 당시 보편적이었던 결혼관이나 여성에 대한 시선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으며 최신작인 '프린세스 메이커 5'에서도 이러한 불편함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이혼한 딸은 여전히 배드엔딩으로 취급되며 결혼 엔딩은 얼마나 좋은 신붓감이 되었냐에 대한 서술일 뿐이다.
차기작이 발매될지는 불명확하지만, 발매된다면 결혼한 딸의 삶이 단순히 ‘현모양처’ 혹은 ‘좋은 신랑감을 잡아 잘 결혼했다.’ 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결혼 이후의 여성의 삶은 좀 더 다양하며 누군가의 아내로 삶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여성의 신체로 인한 불편한 농담들 또한 줄어있기를 바란다. 딸의 가슴 사이즈나 체중으로 운명이 결정되며 NPC들의 질투 이벤트가 발생하거나 남성 캐릭터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묘사는 너무 낡았고 시대착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