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RPG가 있었다
RPG, 풀어쓰면 Role Playing Game이라는 이 장르는 최근에 와서 의미가 많이 변화했지만 본래 플레이어가 주인공이 되어 스토리상 중요한 선택을 하거나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하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장르다. (※ RPG의 정확한 사전적 의미를 서술하기 위해서는 테이블 탑 롤 플레잉 게임부터 언급해야 하지만 본 글에서는 PC/콘솔용 RPG를 위주로 다룬다.)
많은 게이머들이 한번쯤 들어봤을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혹은 <울티마> 시리즈 ,<스카이림>시리즈 처럼, RPG는 비현실적인 배경을 주로 제시하고 다양한 스토리와 난관을 해결하는 서사를 제공하며 플레이어에게 성취감과 만족감을 준다. 과거 RPG에서 이러한 성취감은 주로 남성 주인공의 몫이었다. 대부분 주인공은 남성이었으며, 그 평범한 남성 주인공이 어떤 계기를 통해 힘을 얻고 절대악을 제거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클리셰였다. 세상을 구한 용사는 보상으로 공주를 얻거나 동료인 수많은 여성 캐릭터 중 한 명과 맺어졌다. 이런 성장하는 주인공의 일화에 남성 플레이어들은 공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크게 이입하기도 했다. 오직 남성 플레이어들만.
많은 RPG 게임들은 캐릭터를 만들 때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과 동일하게 취급받고 능력치에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다고들 말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서술에 불과할 뿐이다. RPG 장르에서 여성이 묘사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른 성별의 주인공을 플레이할 때, 남성과 여성의 차별을 두지 않기 위해 게임사는 성별의 특이점을 ‘지우는’ 방식을 선택했다. 성별에 따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남성 주인공과 여성 주인공의 대사는 똑같은 것으로 출력되었고 주인공의 성별에 상관 없이 NPC들의 반응 또한 한결같았다.
예를 들어,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에는 늘 사창가나 매춘부가 등장해왔다. 이 요소들은 메인 스토리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 장소에는 추가적인 보조 퀘스트들이 한두 개 존재했고, (남편이 창부와 바람피우는 것을 아내에게 고발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아내를 죽여버릴 수도 있다!) 골드를 소비하여 주인공이 매춘을 통해 회포를 풀 수도 있다.(물론 페이드아웃 처리된다.) 남성 영웅이 어둠의 업계에서 일하는 미인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는 서사는 언뜻 보기에 이상한 점이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주인공의 성별이 여성으로 바뀔 경우 생기는 어색함(남성 매춘부라도!)은 지울 수 없었다.
그 와중에 파티원이 전원 여성이면 있던 이벤트가 삭제되는 케이스도 존재했다. <발더스 게이트 1>에 등장하는 사파나는 개방적인 미인 해적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을 그대로 따 온 캐릭터다. 이 캐릭터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파티에 최소한 남성 캐릭터가 한 명 있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여성 캐릭터만으로 이루어진 파티를 짜게 되면 이 캐릭터를 만날 기회조차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두 가지 성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게임이어도 홍보 포스터에는 늘 남성 주인공이 메인을 차지했다. 여성 주인공은 남성 주인공의 대안에 불과했으며 게임을 홍보할 때 여성 주인공보다 더 많이 노출되는 것은 주인공의 동료이자 주인공의 옆을 보조해주는 여성 캐릭터였다.
등장 인물들의 여성적인 면이 강조되는 순간은 주로 그 캐릭터의 성적인 매력을 보여줄 때였다. 인간 외의 종족을 묘사할때마저도 여성의 모습은 좀 더 인간이 추구하는 미의 기준에 걸맞은 모습으로 그려졌고, 같은 장비를 입더라도 남성 캐릭터들과는 달리 복부나 가슴의 노출이 생기기도 했다.
변화
시간이 흐르면서 RPG 장르 또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여성 캐릭터를 메인 주인공으로 한 게임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이전과는 달리 주체적으로 싸우는 여성 캐릭터들도 또한 많이 등장했다. 여성 캐릭터들의 디자인에 문제를 느끼고 의식적으로 수정하려는 움직임 또한 보이기 시작했다.
인기 프랜차이즈 게임인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중 데스몬드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1~3편에는 기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엔지니어 등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어쌔신 크리드2>에 등장하는 카타리나 스포르자는 역사 속 인물을 재구성한 캐릭터로, 과거 파트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주요 여성 NPC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이 인질이 되었을때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치마를 들추며 아이들은 이걸로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대사를 하여 상대방을 질겁하게 만들고, 암살단의 일원으로써 물러서지 않고 싸운다.
또한 유비소프트는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의 주변인으로만 등장하던 것에서 나아가 시리즈 최초로 여성이 메인 주인공인 <어쌔신 크리드 3 : 리버레이션> 을 발매했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씬> 의 경우 킥스타터 모금 과정에서 공개했던 포스터에서 비키니 아머를 입은 여성 캐릭터에 대한 비판이 일자 이를 수용하고 갑옷의 디자인을 전면적으로 교체했다. 여전히 가슴이 부각되는 아머를 입고 라인이 강조되어있는 점은 아쉽지만, 몸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더 이상 게이머들에게 흥행 보증 수표로 통용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실바나스의 갑옷 디자인의 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흐름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실바나스의 모델링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실바나스의 이미지는 세 번째 이미지인데, 마지막으로 발매된 확장팩에는 복부를 가린 디자인으로 수정되었다. 유저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지만 블리자드 측은 실바나스는 큰 전투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갑옷을 입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실바나스의 복부를 가린 디자인은 <히어로즈 오브 스톤> 의 실바나스에게 앞서 적용될 뻔 했었지만 유저들의 반발로 이미 한번 무산된 전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뛰어난 게임성으로 2014년 최다 GOTY(Game of the Year)를 받은 <드래곤 에이지: 인퀴지션> (이하 인퀴지션)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몇몇 남성 유저들의 불만을 샀다.
- 못생긴 여성 캐릭터
- 게임 내에서 사귈 수 있는 여성 캐릭터가 적음
그들은 연애 가능한 여성 캐릭터들이 다른 여성 NPC에 비해 못생기게 그려졌다고 주장하며, 제작사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기 위해 여성 캐릭터의 매력 포인트를 일부러 제거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여성 캐릭터들의 '문제적인' 외모는 남성들이 보편적으로 원하는 ‘인상이 순한’ 혹은 ‘부드러운’ 미인상이 아닐 뿐이다.
연애할 수 있는 캐릭터가 적다는 불만 또한 마찬가지다.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에서 연애 가능한 이성 캐릭터는 늘 2~3명 정도였다. 인퀴지션에서 남성 주인공이 연애 가능한 이성 캐릭터는 2명이며, 전작과의 차이가 있다면 여성 주인공일 경우 연애 가능한 대상이 좀 더 늘었고, 추가로 다양한 소수자를 위한 로맨스를 게임 내에 배치했다는 점이다. 즉, 게임 내에서 가능한 로맨스에서 경우의 수 자체는 증가했다.
흔히 게이머의 표준처럼 묘사되는 건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들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RPG 게임에서 여성 게이머들을 위한 로맨스 서사는 거의 제공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제공되는 몇 안 되는 것도 남성 개발자의 시선으로 쓰여 여성이 공감하기 힘든 것들이 많았고,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가상의 남성의 자아를 만들어 여성 캐릭터들과 로맨스를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인퀴지션에서는 시리즈 최초로 동성애자인 동료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그 전까지는 전부 바이섹슈얼 캐릭터였다.) 이들에 대해 부여된 서사에도 그들은 여성 캐릭터에게 투자하지 않고 왜 이런 불필요한 이야기를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 단 한 개의 작품에서 보이기 시작하자 그들은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만’들은 그대로 이어져 <매스 이팩트 : 안드로메다 >가 발매되었을 때 다시 한 번 크게 불거졌다. 초반 버전에서 보이던 어색한 그래픽과 애니메이션 버그(지금은 픽스되었다)에 덧붙여 캐릭터들의 얼굴 모델링이 소위 말하는 ‘미형’이 아니라는 이유로 남성 게이머들은 이 게임을 심하게 비판했다.
‘인퀴지션때부터 모델링을 미형으로 만들지 않더니 결국 일을 쳤다’, ‘ <매스 이펙트 : 안드로메다>의 제작자들이 페미니스트라 게임을 이런 식으로 만든다’는 주장과 함께 개발자들의 사진(주로 여성 개발자들)이 캡쳐되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한 디렉터는 SNS에 올라온 프로필에 페이셜 디자이너라고 표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익명의 남성 유저들에게 실시간으로 살해 및 강간 협박을 받기 시작했고, (도대체 왜 그들은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한 여성들에게 강간하겠다는 협박을 끊이지 않고 하는 것인가?) 이에 바이오웨어사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행위를 더이상 묵인하지 않겠다고 응대했다.
흡사 게이머즈 게이트 사태와도 유사한 이 사건은, 앞선 사건이 벌어진 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은데다 그 행위가 잘못됐다는 게임계 곳곳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반복되었고, 이는 자신들을 소위 ‘주류’라 칭하는 게이머들의 인식이 아직 바닥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들은 말한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게임 속 가상세계에서만큼은 편하게 내가 원하는 욕망을 대리 충족하며 게임을 하고 싶다고. 그러나 누군가가 속 편히 게임을 즐기고 있는 동안 그 밑에는 수많은 불편함을 견디고 가상의 자아를 만들어 게임을 하는 여성과 소수자들이 존재해왔다. 그것을 드러내는 순간 편히 누리고 살던 다수의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끼겠지만, 이 불편함은 당연한 불편함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