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웨어 사의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는 RPG에 관심있는 게이머라면 아마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Polygon에 따르면, 다른 웨스턴-RPG 장르(디아블로, 스카이림 등 서구권 RPG를 말한다)를 즐기고 있는 여성 게이머의 비율은 평균 26%인데 <드래곤 에이지:인퀴지션>을 즐긴 여성 게이머의 비율은 48%에 달한다.
그렇다면, <드래곤 에이지:인퀴지션>을 비롯한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는 어떤 점에서 여성 게이머 친화적인가?
불편하지 않게 약자성 드러내기
<드래곤 에이지:오리진>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성장 배경을 고를 수 있다. 다양한 종족과 직업은 그 세계에서 각 종족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위치나 주요 이슈들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도시 엘프 여성으로 게임을 시작하면 이 세계의 엘프들은 이등시민이며 노예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엘프 보호구역에 거주하고 있는 주인공은 자신의 합동결혼식 날 난입한 인간 귀족에 의해 다른 엘프 여성들과 함께 강제로 끌려가게 되며, 저택을 탈출하려 한다.
주인공이 탈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 강간에 대한 위협을 하는 대사들이 등장하나 주인공이나 다른 NPC들이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 주인공이 감옥에서 경비병에게 위협당할 때, 사촌인 소리스(남성)가 칼을 들고 등장한다. 위기에 빠진 여성을 구원하는 남성의 등장으로 보일 법한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소리스가 주인공에게 칼을 던져주면서 역전된다. (심지어 주인공에게 칼을 알려준 것은 어머니이다!)
- 주인공이 자신의 친구를 구하러 저택을 떠돌다 귀족을 만나는 대목에서 ‘여자 주제에 감히!’ 라는 대사가 나오는 대신 피투성이가 된 주인공을 보고 상황을 재빨리 파악한 후 돈으로 협상을 시도한다.
도시 엘프 스토리에서 바이오웨어는 자칫 자극적으로 소모될 수 있는 소재를 이용했지만 여성 유저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은 채로 이야기를 매끄럽게 이끌어나갔고, 이후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는 동기를 부여한다.
성별 반전된 종교 서사
‘챈트리’는 드래곤 에이지의 배경이 되는 남부 테다스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종교다. 현실의 어떤 종교와 유사해 보이는 이 종교 집단에서 전해 내려오는 ‘안드라스테 이야기’는 일종의 성별 반전 설화다.
안드라스테 : 창조주의 신부
창조주의 계시를 받은 안드라스테는 신의 뜻을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남편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테빈터 제국과 싸운다. 기적과 같은 승리를 여러 번 경험했지만, 그의 남편은 사람들이 안드라스테와 그의 창조주만을 따르는 것을 점점 질투하게 되고, 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안드라스테를 제국에게 팔아넘긴다. 배신당한 안드라스테는 화형당하지만, 화형당하는 것을 본 집행인과 사람들은 신의 뜻을 깨닫고 감화된다.
많은 종교에서 질투나 유혹의 대상으로 그려지던 여성은 남성이 되었고, 챈트리의 고위 성직자(교황이나 대주교, 주교 등)는 오직 여성만이 될 수 있다. 신화에서 안드라스테는 창조주의 신부로 묘사되지만 도시 곳곳에서 어머니처럼 자애로운 모습보다는 검을 들고 서 있는 조형물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안드라스테의 최후는 비록 화형으로 끝났지만 마녀나 성녀에 그치지 않고 종교의 선지자이자 아이콘이 되었으며, 이 종교는 세 개의 시리즈에서 핵심 요소가 되어왔다.
신성을 등에 업은 주인공, 여성
<드래곤 에이지 : 인퀴지션>은 긴 전쟁중이던 두 단체가 평화회담을 위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장소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폭발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폭발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그 폭발로 인해 기이한 능력이 생긴 주인공은 능력 탓에 안드라스테의 전령으로 취급받으며, 교황의 최측근들은 혼란 상태에 빠진 대륙을 진정시키기 위해 챈트리와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인퀴지션’이라는 단체를 발족시킨다.
인퀴지션은 주된 적인 코리피우스를 막기 위해 군대를 모으고, 대륙 전역에 발생하는 갈라진 하늘을 복구하며 점점 세력을 불려 나간다. 이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은 주인공을 숭배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혹세무민을 위한 단체로 취급하며 적대적으로 대하기도 한다. 챈트리에서는 그런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으며 모든 국가는 인퀴지션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다.
임무를 내리고 작전을 할당하는 곳인 ‘워 테이블’ 에서는 대륙의 지도를 테이블에 펼쳐 놓은 채 주요 조언자들이 모여 향후 작전에 대해 토론을 한다. 주인공이 여성이라면 전술과 병참을 담당하는 컬렌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외교 담당도, 첩보 담당도 여성이며, 조언자인 마법사도, 조직이 자리 잡기 전까지 조언을 담당하던 사람도 여성이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이런 구도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진행되기 때문에 언뜻 보면 이상한 점을 전혀 느끼지 않을 수도 있지만, <드래곤 에이지 : 인퀴지션>에서는 게임이 중반에 접어들 때쯤 동료 캐릭터와 대화를 통해 주인공의 상황을 인식시켜준다.
세 편의 시리즈에서 코덱스나 주변 사람들의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줬던 안드라스테의 전설은 커다란 전투가 있기 전 동료 캐릭터를 통해 직접적으로 언급되면서,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대륙의 역사가 다시한번 ‘여성’에 의해 쓰여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성별에 따른 차이를 지워 평등함을 부여했던 주인공에게 성별에 따른 ‘다름’을 드러냄으로써 (심지어 남성 주인공일 때는 같은 상황에서 위와 같은 대사를 하지 않는다!) 여성인 플레이어가 여성인 주인공을 플레이 할 때 좀 더 이입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발언에 대해 플레이어는 여러 가지 반응을 할 수 있다. 그 선택지 중 ‘단지 내가 성별이 안드라스테와 같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얘길 하는 거면 좀…’ 같은 식으로 한번 더 짚고 넘어갈 수 있는 것 또한 재미있는 점이라 볼 수 있다.
어머니와 딸, 전혀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에서는 많은 중년~노년의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연인으로 끝나는 게 아닌 이 캐릭터들은 때로는 메인 빌런이 되기도 하고, 조직을 위한 가치를 추구하다 중대한 실수를 하기도 하며, 주인공의 주요 조언자가 되기도 한다.
영웅을 소재로 하는 많은 영화나 미디어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익숙한 소재일 것이다. 둘은 유례없는 좋은 친구가 되거나 아버지의 의지를 자식이 계승하기도 하며, 때로는 넘어야 하는 거대한 산이 되기도 하는 등 남성 주인공의 배경에 깔린 (유사)부자관계에 관한 서사는 창작물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되어 왔다.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에 등장하는 플레메스는 자신의 딸인 모리건을 어릴 때 부터 혹독하게 가르치며 세상을 의심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알려준다, 플레메스의 교육을 매우 훌륭하게 학습한 모리건은 숨어 살던 자신을 세상에 내보낸 플레메스의 목적을 의심는데 이르고, 플레메스가 자신의 몸을 빼앗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선택에 따라, <드래곤 에이지 :오리진>에서는 모리건의 요청을 받아 플레메스를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인 줄로만 알았던 플레메스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드래곤 에이지 : 인퀴지션>에서 주인공에게 도움을 주려 왔던 모리건은 어떤 사건에 의해 플레메스를 원치않게 만나게 되며 둘의 대립은 절정에 달한다.
어머니와 딸의 좋지만은 않은 관계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신화와 연결되어 테다스 대륙에 더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내게 된다. 시리즈 내내 플레이어와 모리건에게 의심의 여지를 남겨주던 플레메스의 의도는, <드래곤 에이지 : 인퀴지션> 후반부에 플레메스에게 저주를 퍼붓는 모리건을 떠나며 하는 말로 인해 분명해진다.
혼은 원치 않는 자에게 강제로 임하지 않는단다. 모리건, 난 네게 위협이었던 적이 없었어.
여성 게이머에겐 더 많은 여성 서사가 필요하다
혹자는 말한다. 역사적으로 전쟁 속에서 싸우는 것은 남성이었고 여성은 그것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다고. 중세 '판타지' 세계는 더 어둡고 살기 힘든 환경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여성이 부가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마법을 쓰고 용이 날아다니는 게임 속 세상에서 성별 역할론을 '현실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정말 현실적인 조치인지, 성별을 넘어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려는 노력조차 하기 싫었기 때문은 아닌지, 익숙하고 편한 시선에 안주하기 위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보조장치를 벗어나, 여성에게는 더 많은 여성 캐릭터들의 서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