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에이지: 젠더를 넘어선 다양한 캐릭터

알다게임여성 주인공

드래곤 에이지: 젠더를 넘어선 다양한 캐릭터

딜루트

일러스트레이터: 솜솜

앞선 리뷰에서는 <드래곤 에이지> 에 등장하는 서사에 대해서 다뤘다. 이번 글에서는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를 여성의 입장에서 플레이하며 젠더감수성면에서 인상 깊었던 캐릭터를 몇몇 꼽아보았다.

아노라 맥 티르

이미지 제공 Bioware
우리는 우리 선조들로부터 자유를 선물받았지. 그것들이 낭비되게 놔두면 안 돼.

거대한 악으로 인해 순식간에 남편을 잃은 왕비는 망연자실하지 않는다. <드래곤 에이지:오리진>에 등장하는 아노라는 왕국을 독립시킨 전쟁 영웅의 딸로 태어나 왕비가 되었고, 자신의 왕국인 퍼렐던에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 어릴 적부터 교육받았다. 아노라는 일찍부터 자신의 결혼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기반에 둔 정략 결혼임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귀족들의 동향이나 퍼렐던 내 외부의 상황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퍼렐던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아노라는 선왕의 사후 자신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자 주인공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 일로 자신이 위기에 몰리자 주인공을 바로 배신하기도 한다. (이후 주인공이 그 행동에 대해 따지면 상황상 그게 합당한 일이었다는 듯 대응한다.)게임의 주인공일지라도 자신이 가진 장기말로 취급하고 버리는 모습탓에 아노라는 많은 유저들 사이에서 악역으로 통하곤 했다.

아노라가 악역으로 불리기까지 했던 행동들은 기존의 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그랬듯 개인의 욕심이나 이기심이 아니었다. 아노라는 퍼렐던을 위해 행동했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많은 남성 캐릭터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으며 자신은 응당 그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행동한다.

모리건

이미지 제공 Bioware
유혹이란 금지된 것으로부터 비록되지. 어떤 문은 절대로 다시 열려선 안 돼.

모리건은 <드래곤 에이지:오리진>의 메인 히로인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가 충족되지 않으면 플레이어와의 호감도가 아무리 높더라도 떠나는 결단력을 지녔다. 모리건은 날카로운 혀를 가졌고, 늘 주변을 경계하며 플레이어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모리건에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면 후속작인 <드래곤 에이지:인퀴지션>에서 (선택지에 따라) 자신의 아들과 함께 등장하는 어머니로서의 모리건의 모습일 것이다.<드래곤 에이지:오리진>에서 모리건이 임신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고대 신의 영혼을 담을 그릇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모리건이 할 법한 일로 생각되지만, 이후 <드래곤 에이지:인퀴지션>에서 (선택지에 따라) 아들과 함께 등장할 때 모리건은 “자신은 이제 모성을 알게 되었고 아이가 너무 소중하다”고 말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행동을 할 때마다 멍청하다고 투덜거리며 목적을 위해 시간낭비하는 것을 싫어하는 모리건이었기에 이런 반응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작에서 모리건과 연애를 했다면) 나와 연애한 캐릭터가 나로 인해 변하는 모습에 보람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주인공이 모리건과 연애를 하지 않고 친한 친구관계인 상태에서 모리건이 다른 캐릭터와 필요에 의한 임신을 했을 때에도 똑같은 대사를 하며 모성애를 알게 된 어머니가 된다는 점은 역시 아쉬움이 남는다.

메릴

이미지 제공 Bioware
우리 부족은 마땅히 물려 받았어야 할 유산을 되찾아야만 해요.

<드래곤 에이지:2>에 등장하는 메릴은 과거에 영광되게 살았던 엘프들이 현재는 몰락해 떠돌이 신세가 된 것을 아쉬워하며 역사를 연구해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길 원하는 캐릭터다. 가녀린 몸매와 소극적인 성격 탓에 다른 동료들이 그녀를 세상 물정 모르는 캐릭터로 대하곤 하지만 그녀는 금지된 마법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며 과거의 진실을 찾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대담한 모습을 보인다.

일반적인 RPG 게임에서 동료의 호감도에 따른 미션이 존재하는 경우, 유저는 그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긍정적인 보상을 받길 기대한다.

  1. 동료가 나와 친해졌기 때문에 나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한다(ex:어머니의 유품을 찾아 줘!)
  2. 그것을 도와줌으로써 동료의 서사가 완성된다.
  3. 주인공은 (게임 내적으로)아이템을 얻고 (게임 외적으로) 업적을 달성한다.

위와 같은 전개는 메릴의 경우 게이머들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반대로 적용된다.

평소에 순수하다는 평을 듣는 소녀같은 동료가 조금은 망설이는 듯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부탁을 할 때, 많은 게이머들은 당연히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보통의 여성 캐릭터가 지닌 속성들은 그런 것이니까.

메릴은 과거의 영광을 찾기 위해 엘프의 유물을 복원하려 하고 이 과정에서 금지된 지식과 마법을 사용한다. 플레이어는 메릴의 부탁을 들어줄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게임 내내 메릴의 결정을 지지하며 메릴의 부탁을 전부 들어주면 결과적으로 메릴의 일족은 전멸하게 되고, 메릴은 자신이 모든 것을 망쳤다고 자책하게 된다. 자신들의 과거를 되찾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현재의 삶에 독이 되는 것이다.

또한, 드래곤 에이지의 엘프들은 타 문화권의 이민자에 대한 비유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이 관점에서 메릴이 인간과 부대끼며 살면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 같아 보이는 모습은 타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을 자국민들이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반대의 경우로는 <드래곤에이지:인퀴지션>의 엘프 동료인 세라가 있다. 세라는 도시 엘프로 자라나 과거의 영광에 연연하는 엘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엘프에 대한 화제가 나오면 낡은 것에 집착한다며 경멸하기까지 한다. 이는 이민 2세들의 모습과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카산드라 펜타가스트

이미지 제공 Bioware
행동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사람들은 그저 불구덩이 위에 서서 뜨겁다고 불평만 늘어놓고 있을 뿐이야.

<드래곤 에이지:인퀴지션>에 등장하는 카산드라는 교황의 오른팔로 강인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면에 열정을 품고 있다. 이런 캐릭터는 자칫 단순한 츤데레형 캐릭터로 소비되기 쉬운데, 바이오웨어는 그의 모습을 균형감있게 묘사함으로써 이 함정을 피해간다.

카산드라는 이상주의자 군인으로 조금은 다혈질이다. 순간 욱하는 성격으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자신이 실수하더라도 변명하지 않고 그것을 인정한 후 잘못을 바로 고치려 한다. 카산드라는 혼란한 시기에 다른 종교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퀴지션을 건립할 것을 주장했으며, 그녀라면 뒤를 믿고 맡길 수 있다는 동료들의 평가를 받아 인퀴지션이 안정되기 전까지 조직을 주도해서 이끌어 나가는 역할을 한다.

카산드라는 <드래곤 에이지:인퀴지션>에서 남성 캐릭터와 연애 가능한 유일한 여성 동료이며, 여가 시간에는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카산드라의 취미는 때로는 다른 동료들의 농담거리가 되며 캐릭터의 약점으로 소비되기도 하지만, 카산드라는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카산드라는 스스로를 로맨티스트라고 인정하지만, 그 특징이 자신의 다른 요소를 전부 덮어버리진 않는다. 카산드라는 자신의 일을 중시하고, 자신이 나아갈 길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의 인생은 사랑이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엔딩 중 연애중인 주인공과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엔딩이 있는데, 이 때에도 카산드라와 주인공은 서로의 길을 인정하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컬렌 러더포드

이미지 제공 Bioware
저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시리즈 세 편 내내 등장하는 컬렌은 최신작인 <드래곤 에이지:인퀴지션>에서 연애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전투 사령관이며 다소 고지식한 성격을 가진 컬렌은 연애를 하지 않을 경우엔 냉철한 군인이지만, 연애를 하면 남성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말하는 히로인이 가진 캐릭터성을 가지게 된다.

기존의 RPG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을 물심양면으로 지지하는 히로인처럼, 전투 사령관인 컬렌은 성 내부에서 지휘관으로서 병사들을 관리한다. 바깥을 돌아다니며 각종 임무를 하는 주인공의 뒤에는 서류를 산처럼 쌓아놓고 훈련을 시키고 일을 하는 사령관인 컬렌이 있다. 컬렌은 자신의 마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주인공의 곁에서 지속적인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연애 상대에 따라 주인공이 묘사되는 방식 또한 조금씩 다른데, 컬렌과 연애를 할 경우 서툰 연인들이 서로를 배려하며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젠더에 치우치지 않고 그려낸다. 둘은 서툴다는 것을 핑계로 상대방을 몰아붙이지 않으며, 상대가 원하지 않을 경우 깔끔하게 물러나는 모습도 보이기도 한다. 다른 연애물에서 흔히 볼수 있는 강제적인 스킨쉽도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컬렌은 가면 무도회장에서 외모 탓에 많은 사람들의 추파를 받고, 동료들과의 대화에서도 얼굴 때문에 인퀴지션에 데려다 놨다는 농담을 듣기도 한다. 그럼에도 컬렌은 단순한 눈요기형 캐릭터로 그치지 않는다. <드래곤 에이지:오리진>과 <드래곤 에이지 2>를 거치면서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에 대해 두 번이나 배신당한 컬렌의 순탄치 않은 인생역정은 <드래곤 에이지 : 인퀴지션>에 들어와 상대방을 기다리고 배려하는 모습과 더해져 깊이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크렘

이미지 제공 Bioware
원래부터 그랬습니다.

크렘은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 내에서 최초로 가시화된 FTM 트랜스젠더 캐릭터다. 크렘은 자신의 조국에서 여자인 사실을 숨기고 입대했다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들통나 처벌당하기 직전에 동료 캐릭터인 아이언 불에 의해 구출되고 용병대의 일원이 된다. 크렘은 이후 아이언 불의 부관으로 용병단에서 크게 활약하게 된다.

크렘이 FTM 트렌스젠더라는 사실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친해지지 않으면 알 수 없으며,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주인공은 크렘에게 트렌스젠더와 관련된 다양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남자로 살기로 했나요?”
“마법으로 바꾸고 싶나요?”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이 질문들은 실존하는 FTM 트렌스젠더에게 하기 적합하지 않은 질문들에 속할 것이다. (마법을 수술에 대한 비유라고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그러나 게임이라는 가상의 매체 속에서 성소수자를 노출시키고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들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어떤 과정에서 스스로를 정체화했는지, 바운더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 FTM 트렌스젠더란 무엇인지에 대해 인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도리안 파부스

이미지 제공 Bioware
와인 정도는 내올 수 있잖아. 난 말하기 전에 혀를 좀 풀어줘야 한다고.

도리안은 바이오웨어사 게임들 중 최초로 동성애에 대한 네러티브가 존재하는 캐릭터이다. 기존 바이오웨어 게임에서는 바이섹슈얼 캐릭터만이 동성애가 가능했다. 여성으로 공략하건 남성으로 공략하건 대사나 이벤트는 동일했고 캐릭터의 성적 성향이 캐릭터의 서사에 영향을 미치는 일 또한 없었다. 그러나 도리안의 동료 퀘스트는 자신의 성적 성향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도리안은 항상 유쾌하고 자신감에 차 있으며, 사캐스틱한 유머를 날린다. 남부 테다스와 달리 마법사로 태어나는 것이 권력인 테빈터에서 촉망받는 마법사였지만, 뛰어난 혈통 보존과 가문 유지를 위해 이성과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친에게 마법으로 강제로 성향을 개조당할 뻔 하고 그것에 질려 가문을 떠나게 된다.

도리안의 개인 퀘스트는 주인공에 의해 부친을 만나게 되고 그에 따라 가족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내용이며, 동료들과의 대화를 통해 성소수자가 겪는 가족간의 갈등에 대해 보여준다. 이것은 여타 미디어에서 볼 수 있었던 동성애자와 그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며 이를 게임이라는 매체에 접목시킨 케이스이다.

플레이어는 크렘과 마찬가지로 도리안에게도 실제의 동성애자들에게는 무례할 법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바이오웨어는 다수의 플레이어가 남성 유저인 공간에서 두 캐릭터를 통해 소수자들을 가시화시키는 시도를 했고 이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어디 감히 여자가'는 이제 그만해

언제나 바이오웨어 사의 게임이 젠더감수성 면에서 우수하지는 않았다. 바이오웨어의 초기작 <발더스 게이트 2>에서 남성과 연애할 수 있는 여성 캐릭터는 셋이었는데 반해, 여성이 공략 가능했던 남성 캐릭터는 단 한 명뿐이었다.

명작 소리를 듣는 <발더스 게이트 2>에서 단 한 명 주어진 남성 캐릭터의 로맨스 서사는 매우 엉망이었다. 여성인 주인공은 끊임없이 남성 캐릭터의 징징거림을 받아줘야 했고, 남성 캐릭터가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소위 뒷바라지를 해줘야 했다. (심지어 이 남성 캐릭터는 다른 동료 여성 캐릭터를 구타하기까지 하는데도!) 많은 여성 유저들은 이 로맨스 모드에 반발하며 차라리 남성 캐릭터로 여성 캐릭터와 연애를 하거나, 나아가 여성의 취향이 담긴 추가 모드들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이 모드들을 제작사에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후 바이오웨어사에서 발매되는 게임은 여성 유저들을 더 신경 쓰기 시작했고, 여성 캐릭터들의 묘사도 다른 게임에 비해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발매된 <드래곤 에이지>시리즈에는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맨스플레인 하지 않는 캐릭터들과, 어디 감히 여자가, 여자 주제에 같은 말을 하지 않는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현실 세계의 어떤 요소(이민자, 이민자의 2세, 성소수자, 학대, 입양 등등)들을 대변한 캐릭터들은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고, 각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유저의 선택에 따라 혹은 개인의 서사에 따라 문제를 극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문제에 집어 삼켜진다.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에는단순히 악역이기에 나쁜 짓을 하는 캐릭터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추구하면서 대립하고 그 과정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캐릭터들이 더 많이 존재한다. 이러한 과정들은 캐릭터와 그 사이의 갈등을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주고, 현실의 이슈와 맞물려 보다 깊게 이입하거나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만약 당신이 다른 게임보다 젠더적으로 덜 불편한 RPG 게임을 찾고 있다면,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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