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 (Feminist) Scientists 시즌 2 5. 페미니스트로 학계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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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 (Feminist) Scientists 시즌 2 5. 페미니스트로 학계에서 살아남기

하미나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어떤 분야이건 안 그러겠느냐마는, 학계에서 여성으로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더 어려운 일이 있으니 바로 학계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살아남는 일이다. 거기에 더해 만약 당신이 속한 분야가 페미니즘에 무척 적대적이라면? 페미니스트임을 커밍아웃하는 순간 지옥문이 열릴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 내 머릿속에서 페미니스트를 환영하는 학문 분야는 여성학 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막막한 상황. 이번 글과 다음 글에서는 내 경험에 빗대어 학계에서 페미니스트 연구자가 겪는 어려움과 이러한 어려움을 조금씩 넘어가기 위해 시도해볼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여성학 외에 학문 분야에서 페미니즘에 영향을 받은 연구, 혹은 여성을 주제로 하는 연구를 하고 있거나 하고 싶은 분들에게 닿기를 바라며.

삶과 앎을 분리하기 어려운 여자들

나는 여성과 우울증을 주제로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고 또 석사 학위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대학원에서는 과학사를 전공한다. 만약 박사과정에 진학한다면 (그런 일이 없는 게 나을 것 같지만) 정신의학의 역사와 여성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

한편 처음부터 이 전공과 연구 주제를 정하고 대학원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과학철학 꿈나무였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이 분야를 알게 된 이후 지금 다니는 대학원인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 들어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학부 전공으로 지구환경과학부를 택한 것은 지구환경과학부에서는 자연대의 모든 전공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과학철학 공부를 준비하기에 적절할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철학 복수전공을 시작했고, 지질학(특히 고생물학) 수업과 함께 생명과학부 수업을 함께 들었다.

당시 나는 진화론에 대단히 매료되어 있었고, 석사 과정부터는 생물학의 철학을 공부하리라 계획하고 있었다. 학부를 다니는 동안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열리는 모든 학부생용 수업을 들었고 전부 A였고, 전체 졸업 학점도 좋았던 데다가, 졸업논문으로 쓴 과학철학 논문은 철학과 최우수 논문상도 받았다. 무슨 말이냐면, 이 분야를 위해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대학원에 들어와서 인생이 잘 안 풀렸다. 첫째는 돈 때문이었고 둘째는 페미니즘 연구 때문이다. 일단 돈이 없어서 여러 번 휴학을 반복했고, 학비와 생활비를 동시에 버느라 공부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석사 논문은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자꾸만 심사 통과에 실패했다. 매번 질문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답을 하는 느낌이었다.

처음 내가 연구하려던 것은 성차였다. 여성과 남성의 성차는 진정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싶었고, 최소한 생물학의 철학에서 섹스/젠더와 관련한 연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겪은 과학철학은 꽤 보수적인 학문이어서, 과학의 본성을 탐구하는 방식을 상당히 내재적이고, 언어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듯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유전자’, ‘에너지’, ‘적합도’와 같은 이론 용어와 기호는 과학 이론에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용어들은 경험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과학 이론 속 용어들이 실제 세계를 적절히 대응한다고 우리는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푸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스도쿠 같았다. 스도쿠 퀴즈를 풀면 머리를 굴리면서 해답을 찾아 나가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할수록 똑똑해지는 기분도 든다. 그러나 스도쿠는 스도쿠일 뿐, 스도쿠 바깥에 세상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2016년 강남역 사건 이후 나는 스도쿠 같은 공부는 앞으로 다시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과학은 지식 생산에서 독점적이고 우월적인 지위를 누린다. 그 안에 여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소외한 역사가 있다. 이런 역사를 언급하는 것 없이 과학의 객관성 혹은 합리성을 탐구하는 일이 내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로 보이지 않았다.

하여 여러 위험 부담을 안고 과정 중간에 과학철학에서 과학사로 전공을 옮겼다. 과학사 수업 때는 그래도 여성 과학자나 젠더에 관한 글을 읽는 주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학사 안에서도 여전히 페미니즘 연구는 드물었고, 무엇보다 나를 이끌어주고 지도해 줄 이 분야를 잘 아는 교수가 없었다.

분명 페미니니스트 과학학 연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있었을텐데 이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내 관심 분야와 유사한 논문을 발견해서 반가워 해당 연구자가 어디에 자리를 잡았는지 찾아볼 때마다 절망스러웠다. 온라인으로 검색조차 잘되지 않았다. 건너건너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박사 학위를 땄는데 자리를 계속 못 잡으시다가 학계를 떠나셨대… 이 분야에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박사 학위를 십 년 만에 겨우 받았대… 공무원 시험 준비하신대… 완전 잠적하셨대… 모두 실제로 들은 말이다.

일러스트 이민

갈 곳을 잃은 페미니스트 연구자

여성학이 학계에서든 대중에서든 학문의 전문성을 자주 의심받는 것처럼, 타 학문 분야에서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연구를 하는 사람들도 정말로, 자주, 상당히, 꾸준하게,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편파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더 높은 학위를 받으려고 할수록,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수록 심하다.

서양사학과에서 여성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한 선배는 내게 지금이라도 연구 분야를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너무 어려운 길을 가지 말라고 했다. 자기도 여전히 ‘이제 다시 진지한 학문의 길로 돌아오라’라는 말을 듣는다며 말이다.

이처럼 학계 내에 여성 차별 외에도 지식의 세계 내 여성/젠더/페미니즘 연구 차별도 존재한다. 이는 단순히 여성의 수가 부족하다는 문제보다 좀 더 교묘하다. 문제를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게이트키퍼(지도교수)의 승인이 필요한데 그들이 보통 남자다.

둘째, 게이트키퍼는 여성의 삶도 모르고 페미니즘 연구도 잘 모른다. 이런 연구에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다.

셋째, 페미니즘 연구를 하면 편향된 연구를 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연구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까다롭고 높은 잣대로 평가받기 쉽다.

넷째, 페미니즘 연구를 하는 사람의 수 자체가 적어서 동료를 찾기 힘들고 따라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성장할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기 어렵다.

넷째, 해당 분야에 이미 존재하는 페미니즘 연구가 적거나 단단하게 무르익은 단계가 아니어서 연구에 인용하기 어렵다. 인용하더라도 신뢰할 수 없는 출처로 여겨지기도 한다.

다섯째, 이 모든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같은 분야에 시시때때로 시비를 거는 안티페미니스트와 싸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이게 가장 중요하다. 바로 이 모든 차별과 어려움과 억울함과 배제당함이 보이지 않거나 은폐된다는 점이다. 만약 당신이 학위를 받지 못하거나 자리 잡는 데 계속해서 실패한다면? 그것은 “너가 부족해서”다.

 

당신이 부족해서. 앞에서 열거한 모든 어려움을 가리는 말이면서, 연구자가 자신의 능력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하는 말이다(그러지 않아도 대학원생은 자기확신이 없는 편이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로 바꾸면서 문제의 원인을 개인화하고 연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말이다.

짐작은 가능하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유로 여러 번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그게 누구든 얼마나 잘났던 연구자는 점차 자신감과 자기 확신을 잃기 마련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반복된 실패와 억울함이 삶에 층층이 쌓여 악에 받친 여자를 사람들은 얼마나 쉽게 미친년 취급해왔나.

'좀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이는 똑똑한 여자가 오히려 하기 쉬운 실수다. 왜냐면 여태까지는 좀 불리해도 자기 능력으로 커버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여성이 진짜로 똑똑해질수록, 강해질수록, 그래서 위협적일수록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들 한 명 한 명이 ‘수퍼우먼’이 되는 일이 아니라 작당모의다.

(여섯 번째 연재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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