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 7. 밤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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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 7. 밤쉘

신한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서울에서 무려 20년 간 여성 영화만 줄창 보는 축제가 꾸준히 열렸다. 멋진 일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는 캐치프레이즈로 열린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들을 소개한다. 페미니즘 고전 영화부터 세상을 바꾼 여성들의 이야기, 여성 영화인들의 작품 세계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을 위한 선물 같은 영화들이다.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밤쉘(Bombshell, 2018)>

알렉산드라 딘 감독

다큐멘터리


해맑게 살아온 남자들은 간단한 성차별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 수많은 사례 중 하나가 외모에 대한 칭찬이다. 그것이 칭찬일지라도, 끊임없이 성적 대상화 당하는 것이 얼마나 불쾌하고 위협적인 일인지, 남자들은 영 이해하지 못한다.

언젠가 직장 선배들과 같이 점심을 먹었을 때였다. 직장 내 성희롱이 화두였다. 나는 사회가 젊은 여자를 얼마나 함부로 대하는지 얘기했다. 오로지 외모로 평가되는 것, 성적인 대상으로 밖에 보지 않는 것, 결국 그런 시각이 성희롱으로 이어진다는 의견이었다. 그 자리의 유일한 남자 선배가 아주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남자들이 젊고 예쁜 여자들한테 하는 거라고 해봤자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하는 거 아니야? 난 젊은 여자의 고충은 잘 모르겠는데. 젊고 예쁜 건 권력 아닌가?”

영화를 좋아하는 그 선배가 <밤쉘>을 꼭 봤으면 좋겠다. 시대를 뛰어넘어 가장 총명하고 천재적인 발상을 해낸 인간을, 단지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이유로 세상이 어떻게 취급했는지. 이 영화는 영화배우이자 발명가였던 헤디 라마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애국자, 발명가, 천재

헤디 라마는 블루투스, 와이파이, GPS, 로켓, 핵무기, 군함 무선 보안통신 기술의 기초가 되는 ‘개념’을 발명했다. 발상은 간단하다. 하나의 주파수로만 통신하는 대신, 여러 개의 주파수를 오가는 ‘주파수 호핑’으로 도청할 수 없는 무선 보안 통신 체계를 만든 것이다.

헤디 라마는 히틀러와 싸우기 위해 이 기술을 고안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고향 오스트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혼자 망명했던 이민자로서, 헤디 라마는 전쟁을 끝내고 히틀러를 이기고자 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헤디 라마가 제출한 특허를 무시했다. 여배우가 발상하고 피아노 연주자가 구현한 기술은 ‘농담’ 취급을 받았다.

미국이 헤디 라마에게 요구한 애국은 한 가지였다. 군 부대에 위문 방문을 하고, 줄 선 군인들에게 키스를 해 주고, 사인을 나눠주고, 채권을 팔라는 것이다. 헤디 라마는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국가를 위해 쓰고자 했다. 그건 그의 빛나는 창의력과 천재적인 발명 능력이었다. 몇십 년을 앞서 간, 끝없이 응용 가능한,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이를 무시하고 철저하게 그의 외모와 육체와 섹슈얼리티를 착취했다. 그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미 해군이 그 기술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나왔지만, 군은 헤디 라마에게 특허 사용료를 지불하길 거부했다.)

여배우, 창녀, 중독자

국가 뿐 만이 아니다. 영화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헐리우드는 망명 중인 유태인 헤디 라마에게 직업을 주고, 명성을 주고, 영화감독으로서 활동하는 예술의 터전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헐리우드는 동시에 헤디 라마를 철저하게 ‘창녀’ 이미지로만 소비하고, 더 빨리 더 많은 영화를 찍도록 메틸암페타민(필로폰)을 비타민이라고 속여 주사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스스로 자신 있게 좋은 양육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헤디 라마는 필로폰 중독으로 아이들에게 ‘괴물’이 되었다.

그의 천재성은 많은 사람들, 주로 남자들에게 천문학적인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영화사 MGM은 헤디 라마가 출연한 영화 <삼손과 데릴라>로 당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이어 2번째 흥행 기록을 세웠다. <아이언맨>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의 실제 모델인 미국의 재벌 비행기 제작자 하워드 휴즈는 헤디 라마에게서 유선형 비행기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헤디 라마는 사각형 비행기 날개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는다는 걸 지적하며, 가장 빠른 새의 사진들과 가장 빠른 물고기의 사진들을 가져다 하워드 휴즈에게 보여줬다. 이 두 가지 동물의 모습을 합치면, 유선형이다. 지금은 어떤 항공 공학이나 스포츠에서도 상식인 개념이다.

영화 속 남자들은 헤디 라마를 ‘아이처럼 천진난만하지만 번뜩이는 창의성을 발휘하는 천재’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천진난만한 이미지’가 진실이었는지는 의문이다. 헤디 라마는 MGM의 인형이 되지 않고 자기 의견을 내세워 마찰을 빚었고, ‘까다로운 여배우’라는 악명을 얻었다.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자 전 재산을 쏟아 직접 메가폰을 잡고 감독이 됐다. 21세기에도 배우가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은 대담한 도전으로 평가받는다. 하물며 40년대에, 여배우가. 그는 기계의 작동과 원리에 관심이 많았고, 오스트리아에서 학교를 다녔을 때 화학을 가장 좋아했다.

이민자, 유태인, 아웃사이더

여러 면에서 헤디 라마에게서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이미지보다는 지적이고 반항적이며 주도적인 성격이 보인다. 나는 그가 미국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던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서투른 영어와 아름다운 외모를 바탕으로 백인 남자들이 그녀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로 취급했을 거라는 혐의를 강하게 품는다.

다큐멘터리에는 헤디 라마가 중년에 출연한 TV쇼가 나온다. 진행자가 묻는다. “최고의 헐리우드 여배우인 당신의 이미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헤디 라마가 반문한다. “제 이미지요? 어떤 이미지죠?” 헤디 라마가 함께 패널로 나와 있는 우디 앨런에게 묻는다. “우디, 당신의 이미지는 무엇이죠?” 우디 앨런이 (재수없게) 짐짓 점잖은 척 농담조로 말한다. “당신과 완전히 똑같은 이미지죠, 헤디.” 노골적인 반어법에 사람들이 웃는다. 하지만 헤디 라마는 웃지 않았다. 진행자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네. 당신이 보여주는 판타지요. 화려하고 리무진을 타고 샴페인을 마시고… 그런 것 아닌가요?” 헤디 라마가 말한다. “아니요, 그건 전혀 나 같지 않은데요.”

적어도 이 장면에서 헤디 라마는 전혀 어린아이 같지 않다. 그의 서툰 영어 발음이나 어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순진한 듯한 반문은 사실 핵심을 찌르고 있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알고 있지? 당신이 생각하는 내 이미지라는 게 대체 뭔데? 우디 앨런의 반어법 농담은 그가 ‘지적인 영화감독 겸 배우’인 자신의 이미지와 ‘여배우’ 헤디 라마의 이미지는 전혀 다르다는 전제를 하고 있기에 성립한다. 그러나 진실은 헤디 라마도 영화 감독이며, 자신의 영화에 직접 출연했다. 경력으로 보면 우디 앨런과 그다지 다르지도 않다! 게다가 최소한 헤디 라마의 영화는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다! 사실은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자신의 편견을 아무 수치심 없이 드러내고 있는 건 진행자와 우디 앨런, 그리고 그의 농담에 웃는 방청객이다.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드디어 미군이 '주파수 호핑' 기술의 발명가로서 헤디 라마를 인정하고, 그에게 감사패를 수여하는 장면이었다. 헤디 라마는 그 자리에 가지 않았다. 대신 아들을 보냈다. 나이가 들어가며 변하는 여배우의 얼굴에 언론과 대중은 잔혹했다. 헤디 라마는 그걸 잘 알고 있었고, 친손녀에게도 자신의 젊었을 때 영화사 포스터 사진에 사인을 해 줄 만큼, 자신이 사랑받는 모습은 오직 여배우 헤디 라마의 겉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대리 수상을 하기 위해 아들이 연단에 선 순간, 마치 지켜보고 있던 것처럼 헤디 라마에게서 전화가 온다.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에게도 중요한 이벤트였던 것이다. 헤디 라마는 어떤 외모이든 간에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녹음된 육성으로 헤디 라마는 수상소감을 말했고, 자리를 가득 채운 남성들(그 자리에는 단 한 명의 여성도 없었다)이 기립박수를 쳤다. 나는 울고 싶어졌다.

헤디 라마가 말하는 헤디 라마 

<밤쉘>이 전세계가 오해한 여성에 대한 다큐멘터리라고 했을 때 걱정스러웠던 점이 있었다. 이미 사망한 여성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회상하는 걸로 그 오해를 벗길 수 있을까? 헤디 라마가 생각한 헤디 라마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초장부터 그런 걱정을 지워버린다. 이 다큐멘터리는 애초에 <포브스>지의 한 기자가 헤디 라마의 육성이 담긴 인터뷰 테이프를 쓰레기통 뒤에서 찾아내면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다큐멘터리의 가장 주요한 취재원은 헤디 라마 본인이다. 특히 그의 인생사 중 가장 논란이 되는 장면에서는 헤디 라마가 직접 말한다.

세상이 아무리 자신을 폄하하고, 차별하고, 오해하고, 속이고, 착취하고, 아름다운 육체에만 가두려고 해도, 헤디 라마는 말한다. 그래도 자기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세상에 주라고. 헤디 라마에 대한 다큐멘터리로는 부족하다. 그는 위인전이 나와야 할 롤모델이다. 와이파이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만 이 의견에 반대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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