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 5. 개를 위한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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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 5. 개를 위한 민주주의

느티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서울에서 무려 20년 간 여성 영화만 줄창 보는 축제가 꾸준히 열렸다. 멋진 일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는 캐치프레이즈로 열린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들을 소개한다. 페미니즘 고전 영화부터 세상을 바꾼 여성들의 이야기, 여성 영화인들의 작품 세계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을 위한 선물 같은 영화들이다.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개를 위한 민주주의(Dogs of Democracy, 2018)>

메리 저나지 감독

다큐멘터리

그리스어로 ‘헌법’이라는 뜻의 신타그마 광장은 1843년 그리스 최초의 헌법이 공포된 장소다. 그리스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국회의사당을 비롯해 관공서와 상점가가 밀집한 아테네 중심지로 유명하지만, 그리스 국민들에게는 집회와 시위의 장소로도 익숙하다. 그리스에서 망명한 부모로 인해 호주에서 성장한 여성 메리 저나지는 2014년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테네를 방문한다. 자신의 ‘문화적 뿌리’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신타그마 광장의 개들’이었다.

메리 저나지가 아테네를 찾은 2014년은 그리스 경제위기의 한복판이었다. 그녀는 아테네 거리에서 긴장감을 느꼈다. 그리스는 2010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유로존과 IMF에서 구제금융을 받았다. 2012년 말부터는 긴축 정책이 실시된다. 공적연금이 5~15% 삭감되고, 공무원 추가 임금이 최대 20%, 공공급여 임금 30%가 삭감되었다.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났고, 2011년 전후의 신타그마 광장은 실업과 복지예산 삭감을 반대하는 시위로 들끓었다.

2014년의 신타그마 광장에는 사람들만큼이나 개가 많았다. 흔히들 말하는 유기견. 거리를 집 삼은 개들이었다. 메리 저나지의 눈에는 버려진 개들이 “시민들처럼 도시를 점령한 듯” 보였다. 그들은 신호등에 맞춰 횡단보도를 건너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도시 생활의 일부로 존재했다. 그녀는 개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가장 절망했을 때 지켜지는 것

아테네에는 거리의 개들을 돌보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개에게 이름을 붙이고 음식을 주었으며 건강상태도 살핀다. 그들의 보살핌 덕에 개들은 대체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교통사고나 질병의 위험으로 거리의 개들은 평균수명이 3, 4년 남짓이지만, 보살핌을 받는 개들은 10년 이상 살기도 한다.

그리스 최악의 경제 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거리의 개들을 기꺼이 돌보는 것인가. 철학자이자 작가로 활동해온 메리 저나지는 이 질문에서 출발해 민주주의와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뿐만 아니라 인간사회가 보편적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해 탐구한다. 이 작품은 그의 첫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리스에서도 유기견의 삶은 원래 팍팍했다. 거리의 개들은 거칠게 다뤄졌다. 그러나 개들을 학대하지 못하게 하고 중성화를 통한 개체수 조절방식을 시도하면서 시민들이 개를 대하는 태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변화가 시작된 것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가 시작되고 그리스의 국가부채가 늘기 시작하던 때부터였다. 

<개를 위한 민주주의>에서는 이 변화과정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었는지를 짚지는 않는다. 법제도적인 변화를 이끄는 동물권 보호 운동의 성장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추측할 수 있다. 이 다큐의 주된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이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사실을 가져온 이유는 이 다큐의 주제의식과 관련된다. 우리는 절망이 커지는 순간에서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간적 가치를 붙들 수 있다. 우리가 서로에게 가혹해져야만 할 것 같은 때야말로 우리가 서로를 환대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경찰과 싸운 개, 루카니코스

메리 저나지는 그리스 긴축정책반대시위의 상징이 된 개 루카니코스를 통해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깊이 묻게 만든다. 소시지를 좋아해서 루카니코스(그리스어로 ‘소시지’)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개는 시위대의 가장 앞에 서서 경찰에 맞서 싸운 모습으로 유명해졌다. 루카니코스는 강아지일 때부터 시위 현장에 함께 했는데, 2011년 전후로 긴축반대시위가 격렬할 때 그리스 시민들에게 큰 위로를 주며 ‘동지’의 칭호를 얻었다.

루카니코스가 시위대의 상징으로 떠올랐지만, 그가 시위의 의미를 이해하고 함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다만 경찰의 폭력과 시위대의 저항이 균형이 맞지 않는 것임을 이해했고, 시위대에게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리에서 자신을 돌보는 이들이 ‘제복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과 운명의 거리가 가까운 쪽이 누구인지는 루카니코스에게도 자명했으리라.

다큐멘터리 <개를 위한 민주주의>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노년 여성은 루카니코스가 보여줬던 특별한 연대의 순간을 회고한다.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회에 참석한 이 여성은 최루가스가 터지는 광장에서 고립감을 경험한다. 대열에서 뒤쳐진 채 어지러워하는 하는 그 곁에서 루카니코스는 그의 속도에 맞추어 함께 걸었다. 그는 두렵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곁엔 동지가 함께 있었다. 루카니코스는 그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임을 이해했고, 도왔다. 그가 루카니코스의 ‘주인’도 ‘가족’도 아니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개들이 보여준 환대의 민주주의

필록세니아(Φιλοξενία). 이 말은 그리스 인들이 낯선 이를 환대하는 전통을 지칭한다. 루카니코스의 모습에서 그리스인들은 이 말을 다시 떠올렸다. ‘곤경에 빠진 타인을 도우라.’ 경제위기 속에서 사라져 가는 환대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위축된다. 경제위기가 가시화될 무렵 그리스인들은 존엄(dignity)을 잃을까 두려워했지만, 국가재정긴축의 고삐가 점점 더 죄어져가면서 존엄은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시민들은 전쟁이나 테러를 당한 상황과 같은 고통을 받고 있다고 여긴다.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리스의 문화가 낯선 메리 저나지는 ‘외부인’의 눈으로 본 그리스인들에게 희망, 존엄, 환대의 가치를 다시 일깨운다. 그것은 사라진 듯 보이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을 아테네의 개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그리스의 상황은 여전히 두터운 안개 속에 있다. 그리스 총리는 최근 유럽연합에 8월 20일 구제금융체제를 공식 종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를 위해서는 연금 추가 삭감과 세금 인상 등의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그리스 노동계는 추가 긴축 조치에 항의하여 대대적인 시위와 총파업을 벌이고 있다. 다큐에서도 잠시 조명되는 레스보스 섬의 난민캠프는 이미 적정수용인원을 한참 넘겨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수용난민과 섬 주민들 양쪽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날 정도로 난민 캠프 상황은 좋지 않지만 정부는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현실의 엄혹함 앞에서 소품처럼 보이는 이 다큐가 말하는 것들은 어쩌면 나이브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망의 시기에 희망의 본령을 끊임없이 찾고 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록을 하는 이유이리라. 가장 약한 존재들이 말하는 가장 깊고 큰 울림의 목소리. 그것이 이 다큐에는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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