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캅스(Miss & Mrs. cops)>, 2019
<걸캅스>는 개봉 전부터 이미 ‘사건’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이 영화를 놓고 남성 네티즌들의 비아냥 대잔치가 벌어졌다. ‘걸캅스 시나리오 유출’이라며 영화의 예상 전개를 앞다퉈 내놓고, 보기도 전에 ‘너무 뻔하다’고 조롱했다. 여성 중심의 서사영화가 처음도 아니건만, 유독 <걸캅스>가 이런 반응을 몰고 온 이유는 아마도 여성 경찰의 활약을 ‘전면’에 내세우는 첫 영화라서가 아닐까.
<베테랑>이나 <극한직업> 등 경찰이 중심이 되는 기존 영화에도 여경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남성조직사회의 충실한 일원이자, ‘양념’으로서의 존재감에 머물렀다. <걸캅스>는 그 성별 구도를 그대로 뒤집어서 캐릭터를 구성한다. 경찰, 군인, 소방관 등 ‘남성적’이라 여겨지는 영역에 대한 여성의 도전은 항상 지독한 혐오의 대상이었다. 남성들 사이에는 여경, 여군, 여성 소방관을 두고 현장에서 쓸모없이 짐만 될 뿐이라는 식의 인식이 만연하다. 실제로 현장에서 여성들이 어떠한 일을 수행하고 있는가와는 별개다. 그들은 알지 못하면서 비난한다.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걸캅스>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 영화 아님?
평론가들이 보인 반응도 흥미롭다. 영화저널리스트 정유미씨는 <걸캅스>를 두고 “여성 영화 아님”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시도와 기획은 좋으나 문제는 만듦새”라며 “남성 캐릭터를 여성 캐릭터로 대체했을 뿐, 성 역할 전복의 의도가 불순하다. 여성 경찰관의 현실과 처우를 담은 내용은 의미 있다 해도 성별 이분법적 구도로 캐릭터를 배치하고 범법과 막무가내식 수사로 일관하는 진행은 허술하기 그지없다.” 씨네 21의 박평식 평론가는 “남장 여자 스타일”이라며 별 한 개 반을 줬다.
흥미롭다고 쓰긴 했지만, 솔직히 실소를 자아낸다. 박평식 평론가의 말은 심지어 분노스럽다. 우선 그가 ‘남장 여자’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부터 문제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뚜렷한 이분법적 인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경을 보면 혐오버튼이 눌리는 남성들의 말과 뭐가 다른가 싶다.
정유미씨의 “여성영화 아님”이라는 단정은 뒤에 이어지는 말을 보면 아마도 ‘페미니즘 영화’가 아니라는 식의 의미로 쓴 것 같다. 한 작품이 여성영화가 아니라고 말하려면 여성영화는 이러하다라는 경계가 뚜렷해야 한다. 그런데 그 경계는 그려질 수 있는가? ‘누가’ 그릴 수 있는가? 한 작품이 여성영화인지 아닌지를 굳이 말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페미니즘의 전범(典範)이라는 게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걸캅스>는 그러한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다. “<폴리스 스토리> 여경찰 버전”(씨네21, 김성훈)이라는 평처럼 딱 적당한 대중오락영화로 만들어졌다. 다만 ‘대중’이 (아마도 ‘젊은’) ‘여성관객’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관객들은 이런 영화에서 ‘개연성’을 기대할 순 있어도 ‘현실성’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류의 영화가 가지는 가치는 웃음이든, 액션의 쾌감이든, 반전의 놀라움이든 간에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에서 나온다. 따라서 <걸캅스>를 둘러싸고 우리는 무엇이 지금 여성관객들의 주된 관심사며, 여성 관객들의 쾌감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쾌감의 의미는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걸캅스>의 '성별이분법'과
사회적 맥락
<걸캅스>에서 주된 남성 캐릭터는 악역이거나, 무능한 남편이거나, 디지털 성범죄처럼 ‘실적 안되는’ 사건에는 무심한 형사다. 그러나 그것이 성별이분법을 해체하려는 페미니즘의 지향과 어긋나는가? 문제는 단순하지만은 않다. 항상 어떤 판단은 맥락적이다. 영화의 의미는 영화 안의 서사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만나 완성되고 재구성된다.
우선 가해자에 대해 말해보자. 디지털 성범죄의 가해자는 남성이 압도적이다. 언론은 성범죄 가해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 ‘이별 보복’으로 사건의 성격을 프레이밍한다. (보복이라니. 이별이 누군가에 피해를 주는 사건인가.) ‘헤어진 후 홧김에’라는 식의 말도 여과 없이 기사로 전해진다. 그러니 <걸캅스>에서 가해자 캐릭터가 쓸데없이 두꺼워지지 않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현명한 선택이다.
그렇다면 극 중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가벼이 대하는 남성 형사들의 태도는 작위적인가? 여성 폭력이 사소한 문제로 취급당하는 것은 많은 피해자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불법 촬영 문제로 그 수많은 여성이 거리에 나와 시위했을 때 우리 사회는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성범죄 신고율이 낮은 것은 낙인을 두려워해서만은 아니다. ‘버닝썬 사건’에서 경찰은 사건의 발생과 은폐에 있어서 중요한 가담자로 의심되는 상황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경찰이 가해자인 성범죄 사건 소식을 접했다. 영화 속에서 ‘디지털 성범죄’ 문제에 관심 없기는 과중한 업무에 치이는 여성청소년과 소속 여성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사건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없는 경찰조직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걸캅스>가 ‘페미니즘 영화’인가 아닌가와는 별개로, 최소한 ‘페미니스트 관객’을 염두에 두었거나 페미니즘에 대한 지향을 드러내는 영화라고는 말할 수 있다. 라미란이 ‘생수통’을 들고 낑낑대는 공익근무요원을 한 손으로 도와준다거나 티비 뉴스 화면에 ‘퀴어문화축제’를 보도하는 뉴스를 흘려보내는 식의 장면 등 사소한 장면도 세심히 선택되어 있다. 영화는 ‘디지털 성범죄’라는 무거운 현실의 문제와 코미디라는 장르를 결합하면서 오는 균열을 드러내곤 하지만, (중간에 제노포빅한 장면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불편하지 않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선정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배우들의 연기는 캐릭터와 꼭 맞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간에 조화가 잘 맞는다. 영화를 본 관객들 사이에서 속편이나 TV시리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그만큼 배우들의 캐릭터 구축이 훌륭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삭제되지 않은
여성들의 현실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캐릭터인 박미영(라미란)은 흔히 말하는 ‘경력단절여성’이다. 전설적인 강력계 형사였던 미영은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형사를 그만두고 경찰서 민원실 주무관으로 이직했다. <걸캅스>에서 ‘경력단절’이라는 여성의 현실은 단지 미영의 전사를 만들기 위해서만 동원된 것은 아니다. 걸캅스는 경력단절이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이 지워지는’ 문제라는 점을 드러낸다.
여성의 경력은 ‘단절’된 것이 아니다. 아이를 키웠다면 돌봄노동이자 사회재생산노동을 수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경력’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육아로 인해 일을 그만두지 않더라도 여성의 노동은 사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지워진다. 같은 경력을 가지고 있어도 남성보다 저평가되거나 성과를 남기기 어려운 직무에 배정된다. 그것은 임금 격차로도 이어진다. 이러한 현실은 여성 대상 (성)범죄가 사소화되는 맥락과도 연결되어 있다. 조지혜(이성경)와 양장미(최수영)은 능력과 열정이 있지만 조직에서 주변화되는 여성들의 현실을 대변한다.
<걸캅스>가 여성 관객에게 주는 즐거움은 단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힘으로 남성 가해자를 때려잡는 쾌감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 속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은 사회속에서 여성을 삭제하는 힘에 저항하듯, 자신들의 개성과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며 활약한다. 여성 관객들의 쾌감은 차별이 아니라 차별에 대한 저항에서 오는 것이다. 그 벅참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말할 권리’를 가진 자들이 무얼 알겠는가. 다 됐고, <걸캅스> 속편이나 기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