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가시나들>, 2019, 김재환
간판을 읽는 노인들
영화는 작은 읍내 시장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시골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자글자글한 파마머리의 할머니들이 뒤뚱뒤뚱한 걸음으로 시장길을 걷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해온 그대로, 물건을 사고 지폐를 내밀고 믹스 커피 한잔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그러다 할머니들 몇이 멈추어 선 채 눈앞에 보이는 간판들을 더듬더듬 읽어내린다. 특별히 찾는 가게가 있어서가 아니다. 지금 이 할머니들의 관심사는 ‘읽는 것’ 그 자체이다.
평균 나이 86세의 이 여성들은 ‘인생의 황혼’이라 여겨지는 노인이 되고 나서야 한글을 배울 수 있었다.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자 평생을 살아온 익숙한 공간은 갑자기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공간이 되었다. 이제 조금씩 입을 떼기 시작하는 세 살짜리 내 딸처럼 이 할머니들은 길에서 만나는 글자를 반복해 말하면서 신이 난다. 그것은 경탄이자 자부심이다.
박금분, 곽두조, 강금연, 안윤선, 박월선, 김두선, 이원순, 박복형.
영화가 ‘칠곡 가시나들’이라고 소개하는 이 여덟 명의 할머니들은 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 2리 경로당 ‘늘배움학교’의 학생들이다. 칠곡군은 인문학 도시조성 사업을 추진하면서 2006년부터 성인문해교육을 시작했다. 늘배움학교에서 한글을 배운 ‘칠곡의 할매’들은 시를 썼고 그 시가 할매들을 세상에 알렸다. 2015년 10월에 <시가 뭐고?>(삶창)라는 시집이 나왔고 이듬해 SBS 예능 프로그램 <스타킹>에 할매들이 출연해 화제가 되었다. 영화를 찍은 김재환 감독이 칠곡 할매들을 알게 된 것도 한 팟캐스트에서 소개된 할매들의 시를 통해서였다.
이 영화에서도 할매들의 시는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시 쓰는 할매’를 보여주는데 몰두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할매들의 일상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고 그 사이사이 할매들의 시를 할매의 낭독과 함께 삽입하면서, 할매의 삶이 어떻게 시가 되었는가를 관객이 사유하고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
반짝반짝 빛나는
<칠곡 가시나들>이 눈길을 사로잡는 가장 큰 이유는 노년의 삶에도 빛나는 것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노년의 삶을 응시해본 일이 별로 없다. 노년의 몸을 응시해본 일도 별로 없다. 우리 사회에서 늙는다는 것은 병들고 쓸모없고 추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변화, 배움, 도전, 성취 같은 말은 인생의 특정한 시기에만 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칠곡 가시나들>을 홍보하는 문구에서조차 할매들을 ‘열일곱 소녀로 되돌아간’이라고 빗대어 표현하듯이 말이다. 노인이 욕망을 표현하는 것은 ‘주책맞은 일’이었다.
우리가 열일곱 소녀의 삶에만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들이 여든일곱의 삶에도 있을 수 있다. 노년은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상상이 아닌 실재하는 할매들의 시간 곳곳을 들어다 우리 눈앞에 솜씨 좋게 펼쳐놓는다. 할매들의 일상은 생기로 가득하다. 할매들은 ‘배우는 재미’를 말한다. 춤을 추고 노래하고 사랑에 대해 말하고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고 드라마를 본다. 가수가 되고 싶었던 평생의 꿈을 품고 노래자랑대회에 나가고, 꼭 다시 보고 싶었던 폭포를 보러 산을 오른다.
한글을 배우기 이전에도 할매들의 삶은 빛났을 것이다. 할매들은 배우지 못했을 때도 공동 빨래터에서 모여 활기찬 수다를 떨고, 수다 끝을 술 한잔의 흥겨움으로 푸지게 채웠다. 점심밥을 같이 해 먹으며 서로를 챙기고, 십 원 내기 화투를 치며 꺄르르 웃었으며, 산과 들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느끼며 살았다. 그러나 한글을 배움으로써 칠곡 할매들의 삶은 더 흥미롭고 재미난 것이 되었다.
시 낭송 이외에는 할매 인터뷰도 담지 않고, 관찰자의 시점에 머무는 이 영화는 첫머리에서만 유일하게 정보를 전하고 맥락을 설명하는 자막을 넣는다. 1930년대에 들어서 일제가 한글 교육을 금지했다는 점을 알리는 내용이다.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한글 사용이 금지되면서 이 시기에 소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한글을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관객은 그것이 칠곡 할매들이 문맹일 수밖에 없던 이유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그 자막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 그 자막은 정말 ‘이유’를 설명하고 있을까.
여자라는 이유로
현재 칠곡군에는 28개 마을에서 400여 명의 노인이 한글과 글쓰기를 배우고 있다. 성인문해교육이라고 했지만 한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70대~80대 여성들이다. 이것은 칠곡만의 현상이 아니다. 성인문해교육에 여성들의 참여가 압도적인 이유를 일제강점기의 한글 사용 금지에서만 찾는 것은 타당한 것일까.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아직 조선어 사용이 가능했던 1930년 조선인 남성 문맹률은 63.9% 여성은 92.1%였다. 전체적으로 문맹률이 높았지만 여성과 남성 사이의 문맹률 격차도 상당하다.
성인문해학교에 여성들이 몰린 이유에 대한 힌트가 될만한 사실이 하나 있다.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의 주도로 국가 차원에서 문해교육이 실시되었다. 읽고 쓸 줄 알아야 산업 현장에 투입될 노동력으로서의 가치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1954년부터 1958년까지 문맹 퇴치 5개년계획에 따라 17세~43세의 남성에게 우선적으로 문해 교육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국가가 누구를 ‘노동자’로 상상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성은 공적 영역의 존재로 상상되지 않았다. 국가문해교육센터에서 실시한 '2017년 성인 문해 능력 조사'에 따르면 성인 비문해율은 여성 9.9% 남성 4.5%로 크게 차이가 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젠더라는 사회구조를 말하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가.
매일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할매들의 힘과 할매들 간의 연대는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떼어놓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칠곡 할매들의 변화는 노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노년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육체는 쇠락했지만 딸, 어머니, 아내, 며느리라는 여성의 역할에서 거리를 둔 ‘나’만의 삶이 가능해진 시간이다. 삶의 생기는 물리적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처한 조건의 문제에 가깝다.
‘글을 쓰기 시작한 할매들’의 이야기를 최근 들어 많이 만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성인문해교육을 지원하는 국가와 지자체 정책 변화가 끼친 영향도 클 것이다. <칠곡 할매들> 보다 조금 빨리 개봉한 <시인 할매>(이종은 감독)도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도서관에서 한글 수업을 하면서 시를 쓰는 할매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책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남해의봄날)은 전남 순천에서 한글과 그림을 배운 할머니들이 펴낸 그림일기집이다.
시가 천지삐까리다
그런데 할매들이 쓴 것은 왜 하필 시였을까? 흑인 페미니스트이자 시인인 오드리 로드는 시라는 장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창작 활동에서 어떤 형식을 선택하느냐는 종종 계급 문제인 경우가 많다. 모든 예술형식 가운데 시가 가장 경제적이다. 시는 가장 비밀스런 형식을 지니며 최소한의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고 최소한의 물질성을 띤다. 시는 근무를 교대하는 시간에, 병원 식기실에서, 지하철에서, 여분의 종잇조각에도 쓸 수 있는 예술형식이다. (...) 우리가 우리에게도 문학이 있음을 드러내며 글을 쓰기 시작하자 시는 가난한 사람들, 노동계급, 유색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주요 형식이 되었다.”
- <시스터 아웃사이더>(후마니타스) 197쪽. “나이, 인종, 계급, 성: 차이를 재정의하는 여성들” 중
최소한의 육체노동과 최소한의 물질성은 노년의 육체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로드의 말은 물론 시가 가장 쓰기 쉬운 장르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짧은 글 안에 절대 짧지 않은 것을 녹여낼 수 있는 것이 시의 마법이다. 그리고 할매들은 그 마법을 자기 삶에서 배웠다.
가마이 보니까 시가 참 많다
여기도 시 저기도 시
시가 천지삐까리다
-박금분-
이 영화는 늘 사회적 ‘문제’로서만 등장하던 노년의 삶, 특히 노인 여성의 삶을 편견 없이 보려는 노력을 느끼게 한다. 여성의 삶을 다양하게 재현하는 서사를 만나는 일은 늘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 또한 이 영화는 ‘보편적인’ 울림을 주는 삶의 지점들을 잘 포착해 세련된 방법으로 전달하면서 관객이 삶이란 무엇인지 성찰해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이 아름답고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영화에서 한 가지 아쉬움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주인공들을 떠올려 보려 할 때 나타난다. 내가 스크린에서 본 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할 말이 별로 없다. 영화 속에서 할매들은 개성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에 흐르는 할매들의 이야기는 보편적으로 이야기될 삶의 가치나 상황에 관한 이야기일 때가 많다. 이것을 단점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영화의 관심은 그들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글을 쓰는 할매들의 이야기가 다양한 통로를 통해 더 많이 흘러나오기를 바라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