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타 힐(ANITA, 2013)>
프리다 리 모크 감독
다큐멘터리
1991년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는 클라렌스 토마스라는 남성을 대법관으로 지명한다. 토마스가 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한다면 미국 역사상 흑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대법관이 되는 셈이었다.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균열을 가져올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주목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오클라호마 대학 법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흑인 여성’ 아니타 힐에게는 결코 환영할 수 없는 소식이었다.
토마스가 일터에서 벌어지는 각종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용기회평등위원회(EEOC) 수장이었을 때, 아니타 힐은 그와 함께 일했다. 그녀는 토마스에게 지속적인 성희롱을 당했다. 대법관 후보 자격을 검증하는 내사가 진행되면서 아니타 힐은 시민이자 법조인으로서의 의무감과 양심에 따라 ‘진실’을 말하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청문회의 증인이 되리라는 생각까지 한 것은 아니었다. 비공개로 이루어진 증언 내용이 언론에 노출되면서 그녀는 결코 원하지 않았던 상황으로 떠밀려갔다.
2013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아니타 힐>의 전반부는 1991년의 청문회 영상과 그로부터 약 20년이 흐른 뒤의 아니타 힐, 그리고 그녀의 곁에서 함께 했던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교차해 당시 사건의 핵심을 짚어나간다.
인종을 뛰어넘은 '남성연대'의 공격
아니타 힐에게 성희롱(Sexual Harassment)은 클라렌스 토마스가 대법관이 되기에 치명적인 결함으로 보였다. 그러니 청문회에서 집중 추궁의 대상이 될 사람은 클라렌스 토마스였어야 했다. 그러나 펼쳐진 상황은 정반대였다. 모두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14명의 상원의원들 앞에서 그녀는 자신이 당한 성희롱 행위를 낱낱이 서술해야 했다. 그 장면은 미국 전역으로 생방송되었다. 고통에 대한 증언은 포르노그래피처럼 소비되었다. 상원의원들은 피해자로서의 자격을 검증하려 들었고, 그녀의 의도를 캐물었다. 텔레비전 카메라는 그녀를 죄인처럼 비췄다. 성희롱은 토마스가 아니라 피해자인 아니타 힐에게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들은 부시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 후보자를 지키기 위해 아니타 힐을 그야말로 탈탈 털어댔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바로 낭떠러지로 자신을 차버릴 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아니타 힐은 믿기 힘들 정도로 침착함을 잃지 않고 답변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품위 있는 대응은 선명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했다. 성희롱/성폭력 사건에서 남성들은 ‘믿을만한 여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이 있는 듯 굴지만, 사실은 어떤 여성도 ‘믿을 만한 여성’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문제는 증언의 신뢰성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성희롱이라는 사건 자체가 불거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믿을 수 없어’서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고 싶지 않아’서 믿지 않았다.
9시간에 걸친 아니타 힐의 고된 증언 뒤에 청문회장에 나온 클라렌스 토마스는 성희롱 문제를 자신에 대한 인종차별적 공격으로 몰아갔다. 그는 자신에게 덧씌워진 혐의를 완전히 부인했다. 성희롱은 없었다는 것이다. 성희롱의 구체적 사례로 언급된 성기 크기에 대한 자랑은 흑인 남성들의 성적인 능력에 대한 편견어린 언설들을 반영한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부인(否認)과 피해자 공격, 그것은 전 지구적인 남성연대의 익숙한 문법이었다. 성공한 흑인 남성에 대한 “고도의 린치”라는 신박한 토마스의 프레임에 민주당 의원들은 손쉽게 갇혔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백인 남성으로서의 지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차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무지했고, 그저 안전한 곳에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데 머무르길 원했다. 그리하여 클라렌스 토마스는 52:48 표로 청문회를 통과하고 대법관이 되었다. (대법관은 종신직으로 그는 지금도 미국의 대법관으로 일하고 있다.)
나는 아니타 힐을 믿어요
그와 달리, 아니타 힐은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그녀는 살해협박과 강간협박을 받았다. 종신재직 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클라호마 대학으로 그녀를 자르라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녀는 학교 뿐만 아니라 살던 집도 떠나야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아니타 힐>의 후반부는 청문회 증언 이후 변화된 아니타 힐의 삶을 말한다. 그녀는 얼마간은 내리막길로 치닫는 듯 보였다. 영화 속에서 아니타는 ‘엄마 앞에서 무너져 내렸던 순간’을 고백한다. 그 때 아니타 힐의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너는 네가 누군지 알지 않니.
너 자신을 믿으렴.
나에 대해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채워 넣고, 내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세상 앞에서 그녀는 주저앉기보다 온몸으로 맞서기를 결심한다. 부당한 린치에 몰린 것은 클라렌스 토마스가 아니라 아니타 힐이었고, 그녀는 굴복한 채 살기를 거부했다. 내가 누군가인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어야 했다. 아니타는 자신이 옳은 일을 했음을 안다. 그녀는 자신이 온 곳을 알고 있고, 갈 곳 또한 알고 있다.
아니타 힐은 흔치 않은 용기와 의지를 지닌 여성이었지만, 그것은 그녀 혼자 만들어낸 것만은 아니었다. 한 여성이 진실을 말할 때 그 말은 필연적으로 합창이 된다. 그녀가 홀로 말하지 않도록 또 다른 그녀가 입을 연다. 우리는 그 말이 얼마나 두터운 것을 뚫고 터져 나온 말인지를 안다. 그것은 우리의 가슴 속에도 있는 것이므로. 늘, 어떤 분기점으로 기록된 국면마다, 우리가 물방울이 아니라 물결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클라렌스 토마스를 대법관으로 만들어준 52:48이라는 표 차이는 역대 대법관 인준을 위한 표결 중 가장 근소한 표차이기도 했다. 청문회는 여성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표결까지 3개월이나 소요됐다. 아니타가 겪는 부당한 상황에 함께 분노한 여성들은 “나는 아니타 힐을 믿어요!”(I Believe Anita Hill)라는 지지운동으로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20년이 다 되도록 같은 이름의 모임을 매해 연다.
물러서지 않는 여성들이 세상을 바꾼다
여성들은 서로 대화하고 세상과 투쟁하며 새로운 인식에 도달했다. 이러한 여성들의 활동은 세상을 변화시켰다. 아니타가 청문회장에 섰던 이듬해 고용기회평등위원회(EEOC)에 제출된 직장 내 성희롱 고발장은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법원의 보상금 지급 판결도 늘었다. 기업은 성폭력 예방 프로그램을 활성화 했다. 여성들은 거의 절대다수가 남성들로만 구성된(당시 100명 중 단 2명) 상원의원에 여성을 보내자는 운동을 벌였다. 다음 선거에서는 6명의 여성 상원의원이 탄생했다. 청문회에 참여했던 상원의원 중 다수는 재선에 실패했다.
아니타 힐은 지난해 말,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이 폭로된 후 세워진 ‘할리우드 성폭력 척결과 직장 성평등 진작을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여성들의 저항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으며, 아니타는 여전히 그 한복판에서 함께 하고 있다.
소수자 우대정책의 혜택을 받았고 ‘인종차별’을 자신의 과오를 감출 카드처럼 이용했던 클래런스 토마스는 대법관의 자리에 올라간 후, 사다리를 걷어찼다. 그는 2014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소수집단 우대정책인 '어퍼머티브액션(Affirmative Action, AA)'을 폐지한 미시간주의 주헌법 개정을 합헌 판결하는데 찬성표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