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 여성영화제의 사람들 2. 변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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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 여성영화제의 사람들 2. 변영주

신한슬

디자인: 이민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라는 캐치프레이즈로 21년 간 여성 감독, 여성 배우, 여성 영화들을 소개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돌아왔다. 2019년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예년보다 다소 늦은 8월29일부터 9월5일까지 열린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는 '영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들이 있다. <핀치>가 여성영화제를 만드는 사람들, 여성영화제가 배출한 감독들, 여성영화제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을 만나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20년에 대해 들었다. 두번째 인터뷰는 여성영화제 집행위원 변영주 영화감독이다.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하 여성영화제)부터 포럼 세션이든, 개막식 사회자든, GV든 꾸준히 참가하셨다. 처음 여성영화제에 참여하셨을 때 기억이 있다면?

워낙 예전이라 자세한 건 잘 기억이 안 난다. 영화 상영을 기다리면서 극장 앞에서 대놓고 담배를 피워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일종의 ‘해방감’이 기억난다. 기자들도 많이 왔었다. 페미니스트란 무엇이냐, 당신들은 남성을 배제하느냐, 이런 종류의 질문이 많았던 것 같다. 요즘 그런 질문을 하면 타임머신을 태워서 20년 전으로 보내야겠지만, 당시에는 진심으로 ‘여성영화제에 모인 사람들’을 궁금해 하고 두려워하는 어떤 조심스러움이 있었던 것 같다. 저에게는 그런 조심스러움도 좋은 기억이다.

여성영화제의 시작

당시에는 시네마테크도 없던 시절이라,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같은 경우는 어디서도 보기 어려웠다. 부산영화제가 이제 막 뭔가 해보려고 물꼬를 틔웠지만, 여전히 영화제가 아니면 해외영화, 독립영화, 예술영화를 보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문화예술기획을 하시던 이혜경 선생님, 김소영 선생님을 비롯해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의 많은 선생님들과 다른 여성 예술가들이 ‘뭔가 해 보자’고 의기투합을 했다. 해외영화 중에서도 젠더 이슈와 관련된 걸 묶어서 여성영화제를 해 보자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처음에는 페미니스트들의 영화제, 페미니즘 영화제를 만들어 보자고 시작했다가, 그것보다는 ‘여성의 시각(Women’s View)’으로 확장시키자는 방향으로 가게 됐다. 좀 더 포괄적인 여성의 영화제, 또는 여성 감독의 작품을 상영하는 영화제가 되었다.

여성 감독의 발견

내가 볼 때는 1회에서 10회까지 여성영화제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단 하나였던 거 같다. “여성감독의 숫자를 어떻게 늘릴 것인가.” 되게 중요한 이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때 실제로 충무로에서 극영화를 만들고 있던 건 임순례 감독, 이정향 감독 정도였던 거 같다. 다큐멘터리는 나하고 홍형숙 감독. 굉장히 적었다.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늘었다. 단편영화제나 독립영화제 심사를 하러 가보면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훨씬 많다고 느끼기도 한다. 여기에는 분명히 여성영화제의 노력도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여성 감독들의 단편을 발굴해내고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아시아 단편 경선이 큰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국내 단편 경선에서 ‘아시아’로 확장되었는데, 굉장히 좋은 시도였고 앞으로도 ‘아시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시아 여성’이라는 아이덴티티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세계적인 영화 산업 안에서 조금은 소외되어 있고 마이너하며, 식민지의 경험을 갖고 있는, 또는 급작스러운 근대화와 민주주의 이식 경험을 갖고 있는 대륙에서 여성이라는 것. 아시아 여성은 굉장히 고유한 아이덴티티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제도 많지 않고, 시네마테크가 없던 상황에선 더 그렇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감독, 특히 흔히 상업영화라고 하는 주류 영화계에 여성 감독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개인적으로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그만큼 영화산업이 건강해진다는 뜻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감독은 스태프들 100여 명과 소통하며 일을 도모해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소통이라는 것 자체가 ‘지배적인 언어’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한국 사회가 과연 구성원들에게 ‘귀를 잘 여는 훈련’을 해주고 있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저는 여성 감독의 숫자가 이만큼 늘어난 건 갑자기 여성들이 영화신의 계시를 받아서 그런 게 아니라, 한국 사회가 다른 방식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는 과정은 아닐까 생각한다.

단순히 여성 감독 한 명, 한 명이 늘어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 어쨌든 그 감독들이 자신의 언어로 스태프들과 현장에서 소통하고 있다는 걸 주목하고 싶다. 그것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언어체계라고 본다. 바꿔 말하면 1980년대의 영화감독이셨던 분이 지금 2019년의 대한민국 영화 현장에서 적응 못 하실 거라고 생각한다. 남성적인 언어, 방식, 노동착취의 구조, 이런 것이 전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생충> 영화를 두고도 화제가 됐지만, 지금 충무로에서는 영화 제작자와 근로자 사이에 대부분 표준계약서를 작성하고 있으며, 촬영 전 모든 스태프들이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는 현장도 다수인 것으로 알고 있다. 굉장히 건강해진 거다. 이런 산업현장이나 예술현장이 그렇게 많을까? 그걸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 온 거다. 앞으로도 한국 영화계에 여성 감독은 늘어날 거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여성영화제란?

제가 1년에 살면서 정말 영화제가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영화제가 두 개 있다. 하나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고 다른 하나가 서울독립영화제다. 두 영화제가 언제나 가장 잘 되길 바란다.

잘 되길 바란다는 건 뭐냐면 커지길 바란다는 게 아니다. 살아남고, 그 영화제를 운영하고 조직하고 활동하는 친구들이 행복하게 오랫동안 작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두 영화제에는 공통점이 있다. 메이저가 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서울독립영화제가 메이저가 될 수는 없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메이저가 되어야 하나? 저는 훨씬 더 작아져도 괜찮고, 훨씬 더 변방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여성영화제는 전국 각지에서 힘들게 버티고 있는 다양한 여성들, 여성운동가들, 현장에서 너무나 어렵게 활동하고, 길거리에서 피켓팅을 하는 분들이 개막식에 초대받는 영화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영화’로부터 시작하는 영화제가 아니라, ‘여성’으로부터 시작하는 영화제이길 바란다.

전 그것이 한동안 잊혀졌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영화를 매개로 하는 축제이다 보니 영화인들이 주목을 많이 받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오늘 여기서 여성들이 모여 영화를 틀 수 있게 된 것에는 영화인들의 노력도 있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상태를 조금이나마 더 낫게 만들었던 수많은 여성 활동가들의 역할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유일한 힘은 연대라고 생각한다. 세상 모든 약한 것들과의 연대, 저는 그게 여성주의라고 생각한다. 뭔가 조직적으로 함께 했으면 한다. 예를 들어 장애인영화제, 인권영화제에서 여성 이슈를 담당하는 분들을 집행위원으로 모신다든지. 지역에서 여성영화제를 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과 연대한다든지. 대구에서 여성영화제를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나? 대중적으로 인기가 없더라도 ‘지역에서 여성영화제를 어떻게 열어야 할까’ 같은 주제로 심포지엄을 한다든지.

아니면 올해 여성영화제의 ‘포커스’는 대구여성영화제라고 정하고, 부스도 만들고, 거기서 선정한 가장 좋았던 영화를 틀어주고, GV도 하고, 그곳의 활동가들을 모셔서 개막식에 초대도 하고 소개도 하고, 집중적으로 서포트 하는 것이다. 그 다음 해는 제주, 그 다음 해는 광주, 이런 식으로. 난 그런 영화제였으면 좋겠다.

아니면 ‘올해의 여성단체’를 지정해서 함께 한다든가. 그들의 활동을 소개하고, 그들이 치열하게 싸운 이슈를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함께 보고. 무슨 영화를 보는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누구랑 보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영화제를 하는 거 아닐까? 자매애가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너무 멋있을 것 같다.

여성영화제는 오늘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 버티고 있는 모든 여성들이 주인공인 것이지, 영화인들이 주인공인 것은 아니다. ‘여성’영화제이지, 여성‘영화’제는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내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가는 이유는 영화감독이기 때문이 아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가는 게 더 크다.

여성영화제는 ‘왜’ 계속되어야 할까?

저는 이를테면 충무로의 감독 비율에 성별 차이가 없고, 별의별 영화들이 다 나오고, 되게 급진적인 영화부터 보수적인 영화까지 다 만들어지고 있다고 해서, 여성영화제가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동성혼이 법제화 된 나라에서도 여전히 퀴어 퍼레이드가 열리는 것과 똑같다. 여성의 현실이 예전보다 좋아졌다 할지라도 여성이라는 젠더 이슈, 또는 여성이라는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아주 독립적이고 오소독스한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여성영화제는 앞으로도 필요하고, 더 작아져도 되고, 더 막 나가도 되지만, 그러나 계속 가야 한다.

제21회 여성영화제 관객들에게 한 마디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 시작을 진심으로 축하합시다. 올해는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5월에 하던 영화제가 8월에 한다니 ‘쪄죽이려고 하느냐’ 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실망도 하셨을 것이고, 걱정도 하실 것이고, 빨리 열리길 바라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여성영화제가 열리도록 많은 분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시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애쓰고 계세요. 부디 8월에 여성영화제에 오셔서 내년까지 잘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여성영화제에서 만나요.

다음 인터뷰의 주인공은 변재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조직위원장입니다.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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