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라는 캐치프레이즈로 21년 간 여성 감독, 여성 배우, 여성 영화들을 소개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돌아왔다. 2019년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예년보다 다소 늦은 8월29일부터 9월5일까지 열린다. 8월3일부터 9월30일까지는 텀블벅 펀딩을 통해 새로운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는 '영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들이 있다. <핀치>가 여성영화제를 만드는 사람들, 여성영화제가 배출한 감독들, 여성영화제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을 만나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20년에 대해 들었다. 여섯 번째 인터뷰는 1999년 제2회 국내단편경선 수상작 <도형일기>를 연출했고, 2019년 제21회 여성영화제 집행위원을 맡은 정재은 감독이다.
처음 여성영화제를 만난 순간을 기억하는지?
1회 여성영화제 때는 그냥 관객으로 참가했다. 당시 워쇼스키 형제의 데뷔작 <바운드>가 상영됐다. 지금은 워쇼스키 자매지만 그 때는 형제였다. 자매가 된 다음에 그분들의 영화를 상영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그들의 데뷔작 <바운드>가 워낙 재밌다고 소문이 많이 났었다. 개봉을 기대할 수 없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고, 제 기억에는 여성영화제에서 국내 처음으로 상영했던 거 같다. 두 레즈비언 커플이 범죄행위를 도모하는 내용의 영화다. 워쇼스키 형제가 그 영화로 떴다. 굉장히 도전적인 영화다. 그래서 오직 그걸 보려고 갔다. 그 때 저는 영화감독도 아니었고, 데뷔를 준비하는 일반 영화 관객이었다.
당시 여성영화제는 동숭아트센터에서 했는데 상영관이 한 개인가, 두 개인가밖에 안 됐다. 정말 사람들이 다 눈에 보였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하나의 홀에 모여있었다. 그런 것들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굉장히 여러 관에서 여러 영화들이 엄청 많이 돌아가잖아요. 그때만 해도 그런 게 아니니까. 초창기에는 그런 경험이 인상적이었다. 저는 쑥스러워서 영화만 보고 조용히 집에 갔던 거 같은데, 그런 광경을 보고 "이런 영화제구나" 했던 기억이 있다.
2회 때는 <도형일기>라는 작품으로 단편 경선에서 수상했는데?
사실 그 때 여성영화제가 제 손으로 단편영화를 출품했던 첫 영화제였다. 그 때 저한테 작품이 두 개 있었다. <둘의 밤>이라는 작품과 <도형일기>라는 작품이다. 하나는 3학년 때 만든 거고 하나는 졸업작품으로 만든 건데, 두 개를 어디에 낼까 고민하다가 <도형일기>를 여성영화제에 내고 <둘의 밤>을 부산영화제에 냈다. 왜 그렇게 냈는지는 모르겠다(웃음). 왜 하나씩 냈을까? 두 개 다 내도 되는데, 그걸 몰랐던 거다(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둘의 밤>도 여성영화제에 되게 어울렸을 텐데.
당시에는 단편영화를 잘 안 틀 뿐더러, 16mm 필름으로 찍은 영화라서 영사기로 상영을 해야 되니까, 영화제가 아니면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저는 그 때 여고괴담 연출부 스크립터로 일하고 있었다. 촬영 준비하는 와중에 수상 소식을 듣고 시상을 하러 갔다.
사실은 저한테는 영화제 수상 같은 건 기대도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놀랐다. 앞에서 소감을 말하라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말… 선생님들은 제가 멋있게 멘트를 하기를 바랐던 거 같은데, "아, 제가 잘 만든 영화도 아니고, 부끄럽고… 사실은요…" 이렇게 헤멨다.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끝나고 나서 "잘 좀 하지 그게 뭐니!" 이러고 야단을 쳐가지고(웃음). 너무 마음이 무거웠던 기억이 있다(웃음).
자신의 작품이 상영되는 걸 처음으로 봤을 때 기분이 기억나는지?
일반 관객들이랑 수상작의 개념으로 그걸 봤잖아요. 다같이 수상작이라는 걸 알고 폐막식 때 <도형일기>를 보는데 진짜 너무 쑥스러워서 도망가고 싶었다. 제 눈에는 못 만든 것만 보였다. 아마 세상 모든 영화감독들은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아마 필름영화였기 때문에 지금처럼 디지털 촬영에 비해 아무래도 비용 면에서 부담이 있어 시나리오대로 영화를 다 못 찍었던 작품이다.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는 듬성듬성 빈틈이 많았던 영화였다. 그래서 더 부끄러웠던 영화였다. 처음에는 일반 관객으로 가서 재미있었는데, 두번째에는 수상을 하러 가는 바람에 괴로운 마음만 안고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그 다음에도 여성영화제와 인연을 이어갔는데?
3회 때 단편 경쟁 심사위원을 했다. 제가 <고양이를 부탁해>를 만들고 나서 데뷔한 이후에는 본선 경쟁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일을 했고, 피치앤캐치 심사를 해 본 적도 있다. 아마 심사위원으로 처음 참여한 영화제가 여성영화제였던 거 같다. 여성영화제가 저한테는 처음으로 했던 경험들을 많이 주었다.
지금까지는 제가 여성영화제에서 계속 손님으로 느껴졌다. 이미 준비된 영화제에 게스트로 참가를 하거나, 심사를 하거나, 영화 상영을 하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행위원이 되니까 사실 하는 일은 별로 없는데, 그래도 뭔가 여성영화제에 대해서 책임감이 좀 더 느껴지는 것 같다. 이제 새로운 게스트, 새로운 감독들, 새로운 관객들한테 어떻게 보면 내가 호스트로서 역할을 해야 될 때가 됐다는 걸 느낀다. 그 때도 아마 분명 누군가 저를 맞아줬으니까 제가 게스트였겠죠.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고, 제가 누군가 했었던 호스트 역할들을 해야 되는 때가 됐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잘 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웃음).
단편 경쟁 심사위원일 때는 어땠나?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든 영화들이 많은지. 정말 너무 잘 만들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서 이런 영화들을 만들었을까. 타인들의 영화를 볼 때는 확실히 너그럽게 보게 되는 거 같다. 아무래도 여성영화제에서 단편 경쟁 부문이 중요한 섹션이다 보니까 그 해에 만들어진 여성 주인공이 나오는,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 중에 가장 뛰어난 영화들이 상영된다고 할 수 있다.
단편 경선 이외에도 여성영화제 아니면 볼 수 없는 작품들이 많다. 동시대에 만들어지는 여성감독의 좋은 작품들은 거의 다 엄선해서 영화제에서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저도 일반 관객으로 영화를 보러 여성영화제에 가기는 쉽지 않아서 많이 못 갔지만, 재작년에 제가 존경하는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영화가 개막작이라고 해서 오랜만에 참가했다. <스푸어>라는 영화인데 이 영화도 개봉이 안 됐고 여성영화제에서만 상영했다.
여성영화제가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성이 만든 영화하고 남성이 만든 영화하고 형질 자체가 궁극적으로 너무 다르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성이 창작의 주체인 경우에는 분명히 여자 주인공들의 이야기, 여자들이 관심을 갖는 인물, 여자들이 생각하는 세계관,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여성영화제를 통해서 비로소 자기의 자화상을 영화를 통해서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게 아마 여성영화제가 궁극적으로 가장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성들의 서사나 여성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기존 극장 문화에서는 아무래도 많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저건 타인의 모습이고 그게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공감하는 거잖아요. 영화가 다루는 세계나 보여주는 경험에 대해서 자기를 대입해서 상상해보는 거니까. 그런 경험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 자각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의식을 넓혀준다고 볼 수 있다.
여성영화제에서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혹은 내가 영화의 주인공인 것 같은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펼쳐지다보니까 여성영화제를 경험하고 나면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나는 여성이구나", 그런 것을 자각하는 데에 조금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영화제를 경험한 여성 관객들은 분명히 여성으로서 삶에 대한 문제의식이라든지, 동세대의 다른 이슈들에 대한 공감에서 발전해나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근에는 여성영화제에 젊은 관객들이 늘어났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은 초창기하고 달라진 것 중 하나다. 초창기 여성영화제에는 영화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거 같다. 그런데 지금 같은 경우 다양한 여성관객들이 많아졌다는 느낌이 든다. 애인과 오는 사람도 있고, 엄마와 오는 사람도 있고, 가족, 친구랑 오는 사람도 있고.
1회 때 여성영화제는 아무래도 여성영화제를 한다는 정보도 없고, 처음 만들어졌으니까 관객층도 다양하지 않았다. 지금은 20년 동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여성영화제를 확장시켜 왔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여성영화제를 한다는 걸 알고 있고 찾아주는 것 같다.
이전에는 페미니즘이 소수의 여성들에 의한 문화였던 거 같다. 지금 젊은 여성들은 여성에 관한 이슈,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다 중요한 세대다. 그래서 젊은 여성 관객들로 많이 확장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앞으로 20년 간 여성영화제는 어떻게 변화할까?
한국 사회가 지금 어떤 면으로 경제 발전 속도나 인구 구조를 생각했을 때 중장년층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젊은 여성 관객들이 많다면, 이후에는 여성의 이슈 중에서 노년 여성의 이슈라든지, 중장년의 여성의 이슈라든지, 여성의 죽음에 대한 이슈라든지,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해지고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래도 사회가 노령기에 접어들다 보니, 영화 안에도 그런 이슈들이 들어오지 않을까.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공존하는 영화제가 되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영화제가 더 잘 된다는 건 어떤 모습일까?
"영화제가 잘 된다", 그건 결국 관객들이 영화제를 많이 즐기러 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관객이 많아져서 극장을 10관 정도 빌려서 열흘 정도 영화제를 하고 이러면 좋죠(웃음). 영화제의 규모를 늘리는 게 영화제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관객이 많아지면 그럴 수 있다는 거죠.
나에게 여성영화제란?
저한테 여성영화제란 제가 80살에 영화를 만들어서 꼭 개막작으로 틀고 싶은 영화제(웃음).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제가 80살이 되려면 아직 한 몇십년 남았으니까 그 때까지 여성영화제가 계속 이어져서 제가 만드는 영화를 꼭 선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년에 아네스 바르다 감독님 영화가 개막작이었잖아요. 그 감독님이 80살이 넘은 나이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개막작을 상영하셨잖아요. 그게 참 되게 부러웠어요. 1회 개막작이 박남옥 감독님의 영화였잖아요. 요즘에는 개막작으로 한국 여성감독의 영화가 되는 케이스가 최근에는 좀 없어요.
하여튼 저 개인적으로는 80세가 됐을 때 꼭 영화를 만들어서 여성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했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저만 해도 이제는 데뷔한 지 거의 20년이 됐으니까 어느 정도 중견 감독이 되었다고 볼 수 있잖아요. 사실 노년의 여성 감독들도 많이 존재했으면 좋겠다. 아마 저희 세대가 그렇게 늙을 수 있는 첫 세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여성영화제를 통해서 성장했고, 극장에서 영화도 개봉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산업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더 나이가 들고, 또 다른 경험도 많이 하고, 그걸 영화로 만들어서 여성영화제에서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보여줄 수 있고, 이렇게 순환할 수 있다면 너무 행복할 거 같다.
다른 어떤 영화제보다 여성영화제에서 나중에 내 영화가 많이 상영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때까지 얼마나 여성 감독들이 남아있을지 알 수 없고, 끝까지 생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방식을 터득하고, 자기만의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나가서, 더 많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래서 나이가 많이 먹어서도 "나는 평생 여성감독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세대의 여성 감독이 되었으면 좋겠다.
선정되기가 까다로워서 그게 걱정이다. 개막작의 문이 뚫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으니까요(웃음). 세계의 유수의 영화들하고 경쟁해야 하니까 쉽지 않을 거 같지만 꼭 한 번 노려보겠습니다. 아네스 바르다 감독님을 보면서 진짜 되게 부러웠다. 직접 오지는 못하셨지만 워낙 그 분이 여성영화제의 친구였다.개막작도 틀고, 축하 영상과 메시지도 보내오고, 그런 게 너무 좋았다. 한국 영화 감독으로서 꼭 그 영광을 누려보고 싶다(웃음).
관객들에게 한 마디
올해 여성영화제는 뜨거운 여름에 시작하게 됐네요. 뜨거운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우리 다같이 재밌는 영화를 함께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이들 보러 와주세요. 감사합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텀블벅을 통해 '여성영화제의 친구, 여친'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정재은 감독의 <둘의 밤>를 포함한 여성 감독 단편 DVD와 2020년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리패스를 포함해 다양한 리워드가 있다고 하네요.
다음 인터뷰의 주인공은 이숙경 감독입니다.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