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편 대 10편. 지난해 개봉한 상업 영화 감독의 남녀 성비다. 영화진흥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2018년 개봉한 77편의 영화 중에서 여성 감독의 작품은 10편에 불과했다. 놀랍게도 최근 5년 중에 가장 높은 수치라고 한다. 한국의 영화 산업이 남성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다.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평균 관객 수는 약 59만 3000명이었다. 전년 대비 28.8퍼센트 증가했다.
여성 감독의 작품이 늘어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의 활동이 영화계 성별 격차 해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실질 개봉 영화 중에서 여성이 감독한 영화는 27편인데, 여성 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운 작품이 19편이었다. 여성 감독의 70퍼센트가 여성 배우를 주연으로 발탁했다는 의미다. 영진위는 이에 대해 “감독 성별과 주연 성별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으며 “여성 서사 영화 편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여성 감독 수가 증가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여성 감독의 활동은 관객에게도 더 많은 선택지를 보장한다. 페미니즘 논쟁이 뜨거웠던 2016년 이후 <우리들>과 <비밀은 없다>, <미씽: 사라진 여자> 등의 걸출한 작품이 등장했고, 관객들은 ‘알탕 영화’가 보여 주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에 화답했다. 이들 작품이 흥행면에서든, 작품성에서든 유의미한 평가를 확보한 것이 지금 여성 감독의 활동이 늘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할
영화 감독,
임순례와 김현정
앞으로 더 다양한 영화를 볼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동시대 여성 감독의 활동을 지켜보는 일은 중요하다. 씨네 페미니즘 매거진 ‘세컨드'와 여성 영화 상영 플랫폼 ‘퍼플레이’는 베테랑 여성 감독과 신진 여성 감독의 초기작을 함께 묶어 보는 따따블 상영회를 기획했다. 지난 5월 열린 첫 상영회에서는 임순례 감독의 <우중산책>과 김현정 감독의 <은하비디오>를 상영했다.
두 작품은 소재나 연출 면에서 공통점이 많다. 첫째로, 지금은 사라진 공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우중산책>의 주인공 정자는 변두리 동시 상영관의 매표원이다. 푹푹 찌는 여름날, 정자는 지하 극장에 앉아 맞선 상대를 기다린다. 그러나 맞선 상대는 오지 않고, 녹즙기 외판원이나 하릴 없이 극장에 누워 있는 비루한 남자들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다.
<은하비디오>의 은하는 비디오 가게를 운영한다. 폐업을 하루 앞둔 그는 옛 연인인 현욱에게 연락해 비디오를 반납해 달라는 핑계로 만남을 청한다. 현욱은 밤 늦게까지 찾아올 기미가 없고, 은하는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더운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두 영화는 사람이 많이 들지 않는 공간에서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설렘보다는 소외나 좌절이라는 정서를 공유한다.
소외된 사람들,
일상의 해상도
<우중산책>은 임순례 감독의 데뷔작으로,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작품상과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임순례 감독은 장편 데뷔 전부터 분명한 자기 색깔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작품이 당대 한국 영화에서 얼마나 신선한 것이었는지는 정성일 평론가가 1994년 기고한 칼럼에 잘 드러나 있다. “<우중산책>은 도식적인 이데올로기 논쟁이나, 베끼고 시침 뚝 떼는 코미디나, 역사에 대한 지루한 교훈극이나, 또는 포르노라고 우기는 자기모순의 자해소동에 지쳐 있는 한국 영화에 대한 날카로운 일격이다. (중략) 우리는 기꺼이 바로 여기서부터 단호하게 결별하고 행복하게 전진할 것이다.”1
정성일 평론가는 당대 한국 영화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한국 영화는 벗는다”거나 난해하고 관념적인 대사들을 늘어 놓는 경향에 대해 “심각한 예술 지상주의”라며 혹평한 바 있다.2 <우중산책>은 달랐다. 한국 사회의 마이너리티에 주목하면서도, 거대한 논쟁 대신 일상의 공기에 질감을 불어 넣는 데 집중했다. 여성의 로맨스를 소재로 했지만 섹슈얼리티와 무관한 방식으로 그려냈고, 영화 속의 남성들도 초라하지만 도식적이지 않았다. 극장에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 녹즙기 외판원, 재수생, 아내와 아이를 두고 영화를 보러 온 남편 등 인간적인 우애를 느낄 수 있는 인물들이다.
김현정 감독 역시 소외된 것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 왔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은하비디오>는 이별한 여자 주인공이긴 하지만 소외감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며 “앞으로 찍고 싶은 단편 영화도 있고 장편 영화도 개발 중인데, 그 작품들도 다 비슷한 감정을 담고 있다.”고 했다.3 소수자 정서에 깊이 감응한다는 점에서 임순례 감독과 김현정 감독을 같은 계보 위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 계보가 더 두터워질 것이 기대되는 이유는 김현정 감독의 차기작 <나만 없는 집>이 2017년 미장셴단편영화제에서 5년 만에 대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전공한 적이 없다는 이력에 비추어 봤을 때도 괄목할 성과다. “29살에 영화를 시작했다. 대구 토박이로 지역의 영화 동호회를 찾아가 단편 영화 스탭을 했다.”4 <은하비디오>의 극중 배경이 대구인 점이나, 주인공 은하가 영화 <킬리만자로>를 좋아한다는 설정은 실제 감독의 출신과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5
로맨스 없는
로맨스 영화
두 작품의 또 다른 공통점은 주인공의 만남이 기대처럼 성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자는 맞선 상대를 기다리고, 은하는 옛 연인을 기다린다. 그러나 정자 앞에 나타난 맞선 상대는 대머리의 중년 남자였고, 은하의 연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포기의 순간이 작품의 가장 끝에 온다는 점은 두 영화에서 만남 자체가 중요한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중요한 것은 이 만남을 기다리는 두 사람의 감정이며, 두 인물의 감정이 구체화되는 것은 만남의 극적인 순간이 아니라 기다림의 과정 속에서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오늘은 평범한 어제와 같을 수 없다. 정자가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엉덩이를 들썩이는 것, 폭우를 맞으며 누군가를 좇아 가는 것, 은하가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늦은 시간 현욱의 집에 가 초인종을 눌러 보는 것은 기다림이 만든 변화다.
더 많은
여성 영화 감독이
필요한 이유
상업 영화에서든 독립 영화에서든 남성 감독은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있다.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한국 장편 영화 31편 중에서 여성 감독 영화는 12편이었다. 반면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27편의 한국 장편 영화 중 12편이 여성 감독 작품이었다. 소규모 독립 영화제로 갈수록 여성 감독의 비율이 높아진다. “남성 감독에게 영화 산업의 자본 및 네트워크(제작비 및 배급력)이 집중되어 있음을 말한다”는 게 영진위의 분석이다.
관객들은 더 많은 여성 서사를 만나기 위해 여성 감독의 활동에 응답하고 있다. 제작비가 16억 원에 불과한 <미쓰백>(2018)이 ‘쓰백러’라 불리는 여성 팬덤의 지지를 얻었고, 정다운 감독의 <걸캅스>(2019)가 손익 분기점을 넘기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세컨드는 따따블 상영회를 6월, 7월에도 이어서 개최할 예정이다. 의미 있는 여성 영화가 과거의 유산으로 멈춰 있지 않고 계속해서 화두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다음 상영의 주인공은 윤가은 감독과 김세인 감독이다!) 이런 노력을 통해 여성 감독에게 더 많은 기회가, 관객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생겨나길 바라면서.
[1] https://seojae.com/web/hani/hani941118.htm
[2] https://seojae.com/web/2014/cabletv199401.htm
[3] http://news.maxmovie.com/335552
[4]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7795
[5] <나만 없는 집>은 네이버 인디극장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https://tv.naver.com/v/58487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