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7월, 저는 한 강의실에 앉아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동그랗게 모여 앉아 ‘나는 왜 영화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명씩 돌아가면서 나누고 있었습니다. 모두의 눈길은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의 입을 향해 있었지만 그들은 ‘미안해,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던 사실 아무 관심이 없어’라는 표정을 애써 숨기려 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비슷비슷한 대답이 주를 이뤘습니다. 자기표현, 영화에 매료된 씨네필들의 이야기... 이 질문은 이렇게 힘없이 몇 사람을 뱅뱅 돌다가 결국 끝자리에 앉아있는 한 여학생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짧은 커트머리에, 꼿꼿한 자세 그리고 강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수줍게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저는요, 외로워서 영화를 하는 것 같아요.
그녀의 대답은 너무나 명료한 것이었습니다. 그 누구에게서도 이렇게 공감되는 대답을 들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도 저는 계속해서 그 말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외로워서 영화를 한다...’ 그녀의 이 한마디는 영화를 만드는 수많은 영화인들의 속내를 들추고, 더 나아가 영화를 소비하는 모든 사람들의 본질을 겨냥하는 말이 분명했습니다.
<외로움과 영화의 상관관계>는 영화를 한답시고 ‘감독놀이’를 해 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이 영화 재밌네 혹은 핵노잼이네’라고 말하며 구겨진 티켓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본 적이 있는 관객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불행히도 두 가지에 모두 해당되었던 저는 이 말이 가진 가시에 수도 없이 찔려야 했고, 결국 그 양심의 성화에 못 이겨 이렇게 글을 쓰기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외롭기 때문에
영화를 한다
외롭기 때문에 영화를 한다는 말에 그토록 많은 핏빛 가시가 있었던 이유는 이 말이 굉장히 본질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본질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왜 영화를 보는가?’ 혹은 ‘인간은 왜 스토리/서사에 열광하는가?’에 대한 (관념적이지만) 꽤 설득력 있는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모든 인류의 철학사, 서사의 역사를 낱낱이 들춰볼 필요도 없이 제가 내린 답은 간단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인간이기에, 그것도 어쩔 수 없이 고독한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뫼비우스의 띠처럼 새로운 질문이 하나 탄생하게 됩니다. "(지독히) 고독한 인간은 왜 영화를 보는가?" 그것은 바로 영화가 인간의 이야기를 그 어떤 매체보다 생생히 담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삶의 조각을 담은 영화 안에서 또 다른 인간을 만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영화를 보러 갑니다. 무의식적으로 고독한 나 자신을 위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고, 이해하기를 원하고,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실 현실 속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인내심과 시간을 요구합니다. 다른 이에게 나를 이해시켜야 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린왕자의 사랑스러운 여우처럼 길들여지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평생의 시간동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인구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며, 우리가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바운더리는 딱 내 주변에 있는 것 그 이상으로 뻗어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선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고름으로써 만나고 싶은 인간을 선택할 수 있고, 나의 것을 많이 희생시키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인생을 마주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태인의 공포와 절망을 만날 수 있었고, 중국 문화대혁명 속 경극 배우의 삶을 엿볼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영화를 통해 시청각적으로 생생하게 구현된 수백의 다양한 인생을 엿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영화를 찾는 이유이고, (외로운) 인간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화 안에서 ‘진짜 사람’의 삶의 조각을 찾아내길 원합니다.
감정, 연대의 시작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인력과 장비에 돈을 들여 3D, 4D로 입체적인 '사람탈'을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것만으로 스크린 앞에 있는 관객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화면 안의 세상을 입체적으로, 화려한 CG로 훌륭히 담아내었다 하더라도,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것이 자신의 현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스크린 안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보고 혼비백산 자리를 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대체 영화의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닐 패트릭 해리슨이 노래했던 것처럼, 영화는 그저 Moving Picture, 움직이는 그림일 뿐일텐데요.
단언컨대, 화면 속에서 튀어나와 우리의 마음을 쥐어흔드는 것은 스크린을 구성하는 자잘한 픽셀들이 아닐 것입니다. 평평한 16:9 (혹은 그보다 더 큰) 스크린에서 입체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그 안의 그림이 아닌 그 속에서 단단히 영겁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인 것입니다. 감정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스크린은 그저 스크린으로 남아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 움직이는 그림들에 더 이상의 흥미를 느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감정들이 스크린 밖의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감정과 감정이 맞닿는 연대를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화 속 인물을 통해 인간만이 서로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연대’를 느끼고 싶어 합니다. 그 연대감이야 말로,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이 인간을 만나고 싶어 하는 진짜 이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여 지는 모습이 얼마나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는가 보다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그 감정의 깊이가 맞닿아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연대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요(굳이 신학적 개념인 "영혼"이라는 단어를 끌고 들어오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인간과 무기체의 차이점이 감정의 유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무엇이
감정의 연대인가?
감정의 연대. 어쩌면 조금 낯설게 다가오실 수도 있겠습니다. 연대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이 단어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하지만 연대는 공감이 가진 개념과는 조금 다른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연대는 공감보다는 훨씬 더 넓은 포용력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사전에는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공감이라는 단어가 조금 더 경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면 연대는 그보다는 좀 더 강한 '존재(Being)' 자체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존재에 연대한다는 것, 살아있음에 연대한다는 것은 듣기에는 어렵고 철학적으로 느낄 수 있겠지만 이것은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나 자주 겪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람을 사람이라고 인정함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생기는 나와 다른 이를 잇는 하나의 끈인 것이죠. 이 연대의 시작은 내 눈앞에 있는 상대방이 복합적이고, 의외성을 가진 인간 그대로라고 믿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조금 더 식상하게 표현하자면, 연대라는 것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만의 소우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내가 모르는 무언의 세계가 그 사람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인생, 화법, 가치관에 공감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공감이라는 것은 나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고, 상대방보다는 '나 자신'에 좀 더 강하게 기울어져 있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의 범위는 각 사람에 따라 그 범위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연대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 이해의 범주를 떠나 훨씬 더 큰 포용력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것을 옛 중국에서는 인(仁)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으며, “인(仁)은 자기 한 몸을 넘어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는데 작용하는 덕이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러한 연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결코 어떤 식으로든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과, 맞닥뜨리지 못했던 상황에 대해서도 우리의 마음을 쏟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나의 세계를 넓혀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
세계를 넓힌다
저는 이것이 현실 속 인간인 관객과 스크린 속 인간인 인물(혹은 캐릭터)에게도 반영된다고 생각합니다. 관객이 스크린 앞에 앉아 한 인물을 보는 순간, 그 사이에는 스크린과 관객석의 거리를 넘어선 연대의 끈이 생깁니다. 연대의 끈은 극이 진행될수록 점차 그 모양이 변하게 됩니다. 짧아질 수도 있고, 길어질 수도 있고, 굵어질 수도, 얇아질 수도, 그리고 최악의 경우 아예 끊어져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연대의 끈이 견고해 질수록, 우리는 스크린 안의 움직이는 그림들을 ‘인간’이라고 굳게 믿게 됩니다. 그리고 좀 더 고차원적이고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여 이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결국 이것을 통해 인물을 '입체적이다'라고 느끼는 지점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입체적인 한 인물을 만나고 연대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지평이 한 뼘 더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시적인 순간’과 비슷하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시적인 문구가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감정이나 모르고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에 대해 짚어주면, 마치 우리의 사고의 폭이 (혹은 감정의 폭,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영화 속의 입체적인 인물은 우리에게 바로 그러한 지점을 가져다 줍니다. 어린아이가 새 언어를 배우며, 새 표현을 배우며 그 머리가 영원을 향해 점점 자라나듯이 우리의 감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입체적인 인물들은 슬프다, 기쁘다 등의 단어들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의 깊이로 우리를 이끌어내고, 생각하게 만들고, 떠올리게 만듦으로써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지평의 바운더리에 작은 불빛 하나를 더 비추도록 도와주게 되는 것입니다.
강한 연대감은
인물이 가진
감정의 깊이로
결정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사람들이 모든 영화 속 인물에게 강한 연대감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연대의 끈을 (어떤 방식으로든) 끊어버리거나 희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순간이 쌓이고 쌓일수록, 관객은 눈 앞 스크린 속의 인물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으로 나누던 연대의 고리를 끊어버리게 됩니다. 인물과의 몰입을 방해하고, 연대의 고리를 쥐어흔드는 순간은 꽤 다양합니다. 기술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고, 배우의 연기, 연출력의 문제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조금 더 중점적으로 다루고 싶은 것은 결국 ‘감정의 깊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감정이 얄팍하게 다루어질수록 우리는 그 인물에 대한 연대감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영화 속에서 인물이 아닌 단면적인 '캐릭터'를 보게 됩니다.
아쉽게도, 생각보다 많은 영화들이 인간의 감정을 단편적으로 드러내면서 이 깊이감을 덜어내고 연대의 끈을 흔들어버리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 들, 혹은 아무 고민 없이 플롯에 따라 그대로 끼워 넣은 캐릭터들의 감정이 너무나 얄팍하게 담겨 있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발견할 수 있었지요. 이런 캐릭터들은 대부분 서사에 부여되어 있는 강한 동기를 가지고 움직이고, 오직 이 동기를 위해서만 행동합니다. 목적과 행동이 캐릭터의 감정을 대체해버리면, 그 감정들이 마치 짜여진 것처럼, 서사에 억지로 꾸겨 넣은 느낌을 받게 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 모종의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캐릭터들에게는 ‘왜?’라는 질문이 빠져 있습니다.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려진다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한 캐릭터를 그려왔던 방식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것은 결국 캐릭터의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그 캐릭터만의 고유한 감정이 아닌, 관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습은 편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기도 하고, 이미 많이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재생산하기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또한 효율성을 중시한다면 관습의 재생산은 굉장히 큰 장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쉽게 만들어낼 수 있고, 가장 쉽게 대중들에게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 낸 캐릭터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인간의 감정이 아닌 익숙한 행동뿐입니다. 그들은 ‘왜?’라는 질문이 없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하고, 키스를 퍼부으며, 자신을 희생하곤 합니다. 왜 그 자리에 존재하는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영화는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감정이 결여된 움직이는 정밀한 인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인간은 인형에게 연대감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이윤기 감독의 <여자, 정혜>(2005)는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모종의 성폭행 피해자를 다룬 영화와 크게 다른 점은, 이 정혜라는 한 인물을 결코 관습적인 절차와 서사에 따라 그려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폭행을 다룬 영화라고 하면 우리는 으레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들의 나열만을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수많은 매체들이 대중에게 불어넣은 비뚤어진 단면(單面)입니다. 하지만 <여자, 정혜>에서 그런 장면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결코 ‘한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다’라는 사건의 서사가 아닙니다. 영화는 그런 아픔을 지니고 있는 한 여성의 단조로운 일상과, 그 안에서 날카롭게 숨 쉬고 있는 그녀의 감정들을 세밀하게 캐치하여 보여줍니다. 정혜에게는 정혜만의 일상이 존재하고, 관객들의 (성폭행 피해자라는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에게 기대하는) 예상을 뛰어 넘은 행동을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집으로 초대한다든가 낯선 취객을 모텔 방에 데리고 가서 다독여준다든가 하는 행동들을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들은 그냥 자행되는 이상한 일들이 아닌, 정혜가 자신의 감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 낸 것이라는 걸 영화는 우리가 천천히 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카메라에는 정혜라는 이 여성을 존중하는 시선이 담겨져 있고, 그녀가 느끼는 감정들을 영화 안에서 세세하게 표현합니다. 영화에서 특이한 점은 바로 카메라가 제3의 시점으로 정혜를 관찰하기 보다는 항상 정혜의 눈으로, 마음으로 사물들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연대의 힘,
<여자, 정혜>
영화 안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정혜의 표정입니다. 신혼여행에서 남편이 그녀를 애무할 때 카메라가 중시하는 것은 섹스로 이전되는 그 ‘행위’가 아닌 그녀의 표정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가 짓는 표정, 자신을 성폭행한 친척에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돌아섰을 때 그녀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 그리고 마지막 엔딩에 “다시 사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느끼는 그녀의 표정을 카메라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담아냅니다.
그 표정들에 담긴 감정으로 계속해서 관객을 이끌어 나갔기 때문에 영화의 관점이 서사가 아닌 정혜 위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여자, 정혜를 전형적인 성폭행 피해 여성 캐릭터가 아닌 정혜 그대로의 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그 감정에 깊은 연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녀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에 애정을 느끼게 되고, 시시하고 단조로운 일상에 공감하게 되면서, 그녀가 가진 아픔과 불행의 단독성 을 느끼게 됩니다.
<여자, 정혜>의 리뷰를 살펴보면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폭행 피해 여성들이 이 영화를 보고 “‘다시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피해자를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결국 그들에게 또 하나의 상처를 얹어주었던 것과는 다른 결과이지요.) 그리고 정혜와 ‘똑같은’ 아픔을 겪어보지 않았던 사람들 또한 그녀를 보고 같은 희망을 느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자, 정혜>는 ‘성폭행을 당했다’라는 큰 비극의 프레임에 안에서 정혜의 아픔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가 집중한 것은 고통을 감당해내며 살아가는 한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이었죠.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볼 때 주목한 것은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고통스러워 한다’라는 서사가 아닌, 그녀가 느끼고 있는 여러가지 감정이었습니다. 정혜의 안에서 송곳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고통, 그리고 그 속에 버무러진 행복하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를 느꼈던 것입니다. 관객들은 제3자의 입장에서 그녀의 불행을 동정하는 것이 아닌, 정혜와의 깊은 감정의 연대를 통해, 또 다른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함께 희망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것이 바로 감정의 연대를 이루어 낸 영화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이야기로만 끝내는 것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이루어내고 그로 인해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결국 우리가 갈망하는 좋은 영화의 한 지점이며, ‘입체적인 캐릭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정리하며 :
“입체적인 캐릭터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서 참 많은 시간을 고민했습니다. 인터넷과 서적에는 입체적인 캐릭터에 대해 수많은 정의를 내리고 있었지만 그 명제는 사실 너무도 쉽게 반박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욕망을 가진 모든 캐릭터가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부를 수 없듯이, 서사를 이끌고 반전미를 가진 캐릭터가 곧 입체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결국 '입체적인 캐릭터는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이 정리될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요. 때문에 저는 '입체적인 캐릭터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나는 어떤 인물을 보고 입체적이라고 느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역대 오스카상을 받은 영화 목록과 캐릭터를 죽 살펴보고, 유망한 국제영화제에서 '거장'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영화 속 캐릭터를 정리하면서 저는 더욱 더 미궁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캐릭터들의 성격은 중구난방이었고, 그것을 하나의 특징으로 귀결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죠. 그것은 바로 제가 이 영화들을 보며 굳이 이 캐릭터가 '입체적이구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입체적이지 못한 캐릭터를 보았을 때 비로소 '입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것이 우리가 사람을 보고 있을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굳이 한 사람을 보고 ‘넌 정말 입체적인 인간이구나!’라고 생각하지는 않듯이, 우리가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이 캐릭터는 이래저래해서 참 입체적이군'이라거나 '어? 이런 대사를 치네. 정말 입체적이다!'라고 하나하나 분석해가며 영화를 보지는 않습니다. 그저 캐릭터가 인간이라고 믿을 뿐이고 그것이 우리를 순수한 몰입으로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을 관찰하게 되면서 관객들의 이 사랑스러운 마인드에 (그것은 저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만) 감탄하게 되었고, 영화를 만드는 모든 영화인들이 이 믿음을 배신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많은 제작자들이 관객들의 이 믿음을 배신하고 심지어 조롱하는 영화를 계속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입체적이지 못한 캐릭터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스크린 속의 인물을 '인간'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모여져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믿음에 대한 배신감이 영화 전체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크린 속의 인물을 그저 '캐릭터'화 시키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어떤 큰 고민과 철학 없이, (거대자본과 여러 영화인들의 배제된 자기성찰로) 인물을 물건처럼 도구화시켰을 때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입체적인 캐릭터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는 인간이 없이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