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 움 7. 나의 작은 시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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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버스터 움 7. 나의 작은 시인에게

명숙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편집자 주 :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흥행에 크게 성공한 대작 영화를 '블록버스터'라 부른다. <핀치> 사전의 '블록버스터'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막대한 제작비는 들이지 않았을지라도, 흥행에 크게 성공한 적은 없을지라도, 여성이 주인공인,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의 숨겨진 대작 영화를 소개한다. '움'은 <이갈리아의 딸들>에 나오는 여성 및 일반 사람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다(남성은 맨움이라고 부른다). 언젠가 움의 영화가 블록버스터를 지배하는 그 날까지.

<나의 작은 시인에게(The Kindergarten Teacher)>, 2018, 사라 코랑겔로

F등급을 아시나요

F등급(F-rated) 영화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F등급은 여성영화를 찾는 관객들에게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하게 하는 유의미한 기준이다. 2014년 영국의 영화감독 홀리 타퀴니가 디렉터로 있는 배스 영화제(Bath Film Festival)는 처음 F등급이라는 걸 도입했다. 

  1. 여성감독이 연출했거나(is directed by a woman)
  2. 여성작가가 각본을 썼거나(is written by a woman)
  3. 여성캐릭터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영화 (features significant women on screen in their own right)

위 세 가지 중 하나 이상 해당하는 경우 F등급을 준다. 세 가지 조건을 다 갖추면 트리플 F등급이다. 나도 F등급 영화라면 눈이 더 가는 게 사실이다.

34회 선댄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사라 코랑겔로)는 트리플 F등급 영화라 할 수 있다. 메기 질렌할이라는 배우의 엄청난 연기력을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영화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유치원 선생인 리사 스피넬리(매기 질렌할)가 자신이 가르치는 다섯 살 학생 소년 지미(파커 세바크)의 놀라운 시 창작 능력에 매료된 후, 예술적 욕망이 돋아나면서 벌어지는 변화를 담은 작품이다. 어쩌면 시인이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이 영화는 천재시인 소년 지미보다는 그를 발견하면서 마음의 변화를 겪는 중년 여성인 리사를 중심으로 극이 전개된다.

몰입하게 만드는 뛰어난 연기력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유치원 선생인 리사는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중 자신의 학생 지미가 우연히 읊는 시에 감명을 받으면서부터 삶에 활력이 생기기 시작한다. 메기 질렌할은 이러한 심리변화를 탁월하게 연기했다. 그녀의 얼굴 표정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보여준 교실에서의 무료하고 공허한 표정이, 소년이 우연히 읊은 시를 듣고 난 후 생기가 도는 눈동자로 변한다.

행복감에 젖어 지미를 바라보는 표정, 지미의 시를 자신이 쓴 것인 양 발표한 뒤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때 흡족해하고 의기양양해하는 얼굴, 소년이 쓴 시를 더 듣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며 지미의 보모나 아버지를 설득할 때의 진지함, 지미의 천재적 문학능력을 키우고 싶어 시 발표회에 갔을 때의 자랑스러움, 지미의 시를 들으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울음을 터뜨릴 때의 표정…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 메기 질렌할은 리사의 동요하는 심리를 섬세하게 드러내 엄청난 흡인력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다섯 살 소년을 연기한 파커 세바크의 연기력도 훌륭하다. 툭툭 내뱉듯 시를 읊고,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선생인 리사를 쫓아가는 모습은 순진한 소년의 모습을 넘어서기에 매력적이다.

예술적 욕망의 변주

리사는 예술을 사랑하는, 딸의 표현을 빌자면 ‘히피’의 감수성을 가졌다. 그래서 그의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거나 돈을 잘 버는 것보다 예술을 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해서 그의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채워주기를 바랐다. 결국에는 자녀들조차 이 욕망을 채워주지 못해, 늦은 나이에 시 창작 교실에 다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녀들의 서운함이 대사에 묻어난다. 그런 서운함을 알려준 남편의 조언을 따라 아이들에게 소홀히 했던 자신을 뒤돌아보며, 자녀들과 같이 저녁도 먹으며 일상의 삶을 살아보려 한다.

그럼에도 도무지 리사는 오랜만에 찾아온 예술에 대한 욕망을 접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집을 나와 지미를 데리고 떠나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리사는 지미가 자신처럼 예술가로 살지 못하고 평범한 시민의 삶에 그칠까, “그림자”로 살아갈까봐 걱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미가 원하는 일이 아니다. 지미는 친구들과 뛰어 놀고 싶고 가족과 있고 싶어 한다. 리사는 여행이라고 속여 떠난 호숫가에서 하룻밤을 보내려 하지만, 지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위험으로 판단해 리사를 욕실에 가두고 경찰에 신고를 한다. 지미가 순수한 시를 짓는다고 해서, 리사의 선의와 집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순수는 어리석음과 동일어는 아니므로.

리사의 행동에서 보이듯, 열정과 집착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예술에 대한 열정, 창작에 대한 욕망이 리사의 삶을 일깨울 때, 예술은 그의 삶에 탄력을 준다. 하지만 그 정도를 넘어서는 순간, 똑같은 열정이 그를 극단적 파국으로 몰고 간다. 무한한 애정은 무모한 집착으로 변할 수 있다. 예술이 리사를 삼켜버린 것일까, 리사가 예술을 삼켜 버린 것일까. 

리사는 아마도 생각했을 것이다. 비록 자신에게 예술적 창작능력은 없어도 예술가의 잠재력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고, 그래서 지미라는 천재 시인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그녀는 낮잠을 자려는 지미를 깨워서까지 영감을 주려고 애쓰고, 화장실에 쫓아 들어가 감정이입과 화자에 대해 가르치려 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열망이 집착이 되는 순간, 시는 시가 아닌 것으로 변하게 된다. 마치 사랑처럼. 상대를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이기만을 바랄 때, 즉 대상화할 때,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이 된다. 영화는 예술에 대해, 삶에 대해,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시를 듣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시다. 시는 피아노 건반 소리처럼 극의 전개와도 연결된다. 지미의 천재성을 일깨워준 시 <애나>는 리사가 생각하는 지미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나는 아름답다
나에게는 충분히 아름답다
태양이 그녀의 노란색 집을 두드린다
마치 신이 보낸 신호처럼.

그녀에게 신이 보낸 예술의 신호가 지미가 아닐까. 지미가 그녀의 삶을 두드렸듯이….

마찬가지로 시 <황소>도 그렇게 읽힌다. 

황소가 뒤뜰에 홀로 서 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문을 열고 한 걸음 다가갔다
바람은 나뭇가지를 스쳐가고
소는 푸른 눈을 들어 나를 봤다
살기 위해 몰아쉬듯 계속 숨을 뱉었다
그런 소는 필요없다 난 어린 소년이니
그렇다고 말해 줘
어서 그렇다고 말해주렴.

어린 소년이 원하는 예술은 중년에 이른 사람의 욕망과 다르다고.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시를 듣다보면 더 많은 시가 있을 것 같아 원작 소설을 읽고 싶어진다. 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좀 더 원작에 가깝게 소년의 천재성에 방점을 찍은 영화는 <시인 요아브>(2014, 더나다브 라피드)다. 그 대신 리사가 가진 시를 읽어주는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당신에게 봄처럼, 나비처럼 예술과 삶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줄 것이다.  국내에는 2019년 4월4일 개봉해, KT&G 상상마당 시네마와 필름포럼에서 상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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