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 움 6. 미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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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버스터 움 6. 미성년

느티

일러스트레이터: 이민

편집자 주 :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흥행에 크게 성공한 대작 영화를 '블록버스터'라 부른다. <핀치> 사전의 '블록버스터'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막대한 제작비는 들이지 않았을지라도, 흥행에 크게 성공한 적은 없을지라도, 여성이 주인공인,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의 숨겨진 대작 영화를 소개한다. '움'은 <이갈리아의 딸들>에 나오는 여성 및 일반 사람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다(남성은 맨움이라고 부른다). 언젠가 움의 영화가 블록버스터를 지배하는 그 날까지.

 


<미성년(Another Child)>, 2019, 김윤석 감독

미성년. 사전적으로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나이 또는 그러한 사람, 법률적으로는 만 19세 미만을 가리킨다. “독자적으로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적, 신체적 자율성을 갖추지 못했다”(2013년 헌법재판소 판결문)며 선거권도 부여하지 않는 나이다. 무책임, 미숙함이라는 단어와 쉽게 결부되어 쓰인다.

그러나 우리는 ‘어른’이 그저 나이만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는 어른답다,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말이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인 <미성년>은 바로 이 ‘어른다움’에 관해 묻는 영화다. 누가 어른인가,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가, 좋은 어른들은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라는 질문 말이다.

* 이하 영화 <미성년>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두 가족을 뒤흔든 한 사건 앞에서, 이 사건에 연루된 다섯 사람이 각자 어떻게 그 문제를 풀어가는지를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주리(김혜준)와 윤아(박세진)은 같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다. 그러나 출신 중학교도 다르고 반도 다르며 이과와 문과라 서로 만날 일도 없었다.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이어진 건 주리의 아빠 대원(김윤석)과 윤아의 엄마 미희(김소진)이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다. 미희는 임신까지 한 상태다.

도망치는 어른, 책임지는 아이

주리는 엄마 몰래 이 사건을 해결하려 했지만, 주리의 뜻과 달리 사건은 결국 주리의 엄마 영주(염정아)에게 폭로된다. 주리의 집과 윤아의 집이 모두 휘청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일차적 ‘책임자’는 대원과 미희다. 그러나 두 사람은 ‘책임지는 자’는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과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그 과오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거나 방어적 태도로 일관한다.

대원은 책임지고 대면해야 할 사람들에게서 말 그대로 도망치기 바쁘다. 미희는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어 그것을 일방적으로 발산하면서 문제에서 회피한다. 회피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회피의 맥락에는 젠더 차이가 있다. 대원은 아내든 딸이든 간에 누구와도 제대로 된 대화라는 걸 하려 들지 않는다. 잘못을 빌지도 않는다. 오로지 준비된 변명만 반복할 뿐이다. 영주는 남편 대원이 못 들어오게 안방 문을 잠가버린다. ‘우리 집 재산이 다 들어 있는 방’에서 쫓아냈다고 영주는 말하지만, 어차피 그 통장의 명의는 다 남편 대원의 것이다. 통장들을 넘겨보는 영주는 착잡하기만 하다. 대원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는 도망쳐도 되니까 도망친다.

윤아 엄마 미희는 현실을 회피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어 회피한다. 도박에 미쳐 일찌감치 가족을 버린 남편,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엄마가 되어 홀로 감당한 생계와 육아는 그녀에게 감당하기 힘든 무게였을 것이다. 여자 혼자 하는 가게라고 음식을 먹고 도망치는 사람이 많다며 손님에게 선불을 요구하는 대목도 그녀가 놓인 사회적 위치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녀가 회피로 일관하는 동안 그녀는 딸 윤아와 상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대원과 미희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지만, 그러면서도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다. 대원과 미희는 그러한 관점과 의지가 부족하다.

그 결과, 응당 이들이 책임졌어야 할 몫은 다른 이의 책임으로 미뤄진다. 그 빈자리를 인식하고 책임을 떠맡는 것은 주리와 윤아다. 우리가 흔히 보아온 텔레비전 드라마였다면, 주리와 윤아는 서로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세계에서 불륜은 어른들의 일일 뿐이고, 아이들은 당사자의 지위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주리와 윤아는 각자의 가족을 뒤흔든 사건에 대응하는 주체로서 등장한다.

성장이라는 권리

주리와 윤아가 만난 건, 두 사람의 행동에서 비롯된다. 주리는 아빠의 외도를 우연히 알게 되자, 아빠의 뒤를 밟아 외도상대인 미희가 운영하는 음식점까지 따라간다. 윤아와 마주친 주리는 휴대전화를 떨어뜨린 채 황급히 집으로 돌아간다. 윤아는 이를 돌려주려고 주리를 학교 옥상으로 불러낸다.

그런데 이때 주리가 생각한 사건의 ‘해결’은 존재하는 문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주리는 엄마가 알기 전에 아빠의 외도를 멈추게 하고,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묻으면 된다고 믿었다. 자기 가족의 평온함을 지키는 데에만 몰두하는 동안 주리에게는 윤아도, 미희도, 미희 배 속의 아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고, 모두 귀찮은 소거 대상에 불과했다. 주리와 윤아는 서로에게 적대적이고 관계는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둘은 책임을 회피하는 어른들의 ‘끝’을 본다. 그것은 세상의 끝과도 같았다. 주리는 도망치는 아빠를 보며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세계의 보잘것없음을 인식한다. 주리는 ‘이제 아빠 딸 안 한다’라는 말로 그 세계와 단절한다. 윤아는 불륜의 결과로 태어난 채 아빠도 엄마도 관심을 주지 않는 아기를 자신의 책임으로 떠안는다. 주리는 그런 윤아의 곁에 서서 책임을 나눠진다. 둘의 관계는 발전적인 변화를 겪는다. 소녀들은 서로를 알아가면서 성장한다.

성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직면하고 사유하는 자가 얻어낸 권리이다. 아빠처럼 또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어, 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다르게 직조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사람은 어떤 면에서 어이없을 정도로 연약하다. 그래서 나에게는 네가, 너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책임을 미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나누어 지기 위해 함께하는 존재 말이다. 성년은 그러한 관계성을 인식하고 서로 존중하며 만나는 이들이다.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여배우들의 무대

주리의 엄마 영주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어른들 중 거의 유일하게 ‘어른 됨’을 보여준다. 미희의 딸 윤아는 영주가 엄마의 병원비를 대신 냈다는 걸 알고 어렵게 돈을 마련해 돌려준다. 돈을 돌려받지 않아도 된다는 영주에게, 윤아는 자신이 빚지고는 못사는 사람이라며 꼭 돈을 돌려주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영주는 윤아의 마음을 존중한다. 그리고 영주는 자기 안의 복잡하고 마주하기 힘든 감정과도 피하지 않고 맞선다. 주리는 아빠와 단절을 선언했지만 엄마와는 함께 식탁에 마주 앉는다. 식구(食口)는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지만, 한솥밥을 먹을 자격은 신뢰를 나누는 이에게만 주어진다. 

<미성년>은 이야기의 힘보다 캐릭터의 힘이 더 빛나는 영화다. 스쳐 지나가는 캐릭터 하나하나까지 적절한 연기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여배우들에게 충분한 무대를 준다. 주리와 윤아, 영주와 미희가 나오는 모든 장면이 아름답고 특별하다. 이 범상치 않은 여성 영화의 감독이 김윤석이라는 사실은 그가 지금껏 연기해온 한국영화의 남성 캐릭터와 대비되어 놀라움을 자아내고 있다.

‘감독’ 김윤석은 배우들이 집중해서 연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배우와의 교감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염정아 배우는 “배우 입장에서 현장을 배려해 주셨다”고 말했고, 김소진 배우는 “어떤 이야기든 귀담아들어 주셨다”고 말했다. 

소통의 중요성은 김윤석 감독에게 단순히 영화를 잘 만들기 위한 기능에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좋은 배우들, 좋은 스탭들과 함께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가고, 이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게 형상화 되거나 그들과 소통이 잘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될 때 오는 기쁨은 그 어느 것에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나에게 <미성년>은 소통의 의미를 알고 소통하는 방법을 몸에 익혀 행할 때, 한 사람의 세계는 이렇게나 확장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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