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거대한 문. 불길하게도 나무판자 13개가 늘어서 있다. 두꺼운 쇠경첩과 이중 잠금 장치가 달려 있다. 작은 창문을 열면 쇠창살이 막고 있다. 손이 겨우 들어가는 틈새로만 바깥과 이어져 있다. 천장에는 쇠사슬에 매달린 샹들리에 같은 철제 사각형이 매달려 있고 그 위에 장례식이나 미사에 쓰는 굵은 양초들이 타다 만 채로 늘어서 있다. 샹들리에를 고정하는 쇠사슬이 거대한 엑스자 그림자를 무대 한 가운데에 드리운다.
문 뒤에서 숨막히는 붉은 조명이 쏟아진다. 10월24일 저녁 8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첫 공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라이선스 극으로,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된 원작에 대한 리뷰를 보면 줄거리와 메시지를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에서 선보인 첫 공연에 집중해 본다. 특히 핵심적인 세 가지 요소에 주목했다. 의자, 플라멩코, 그리고 시선이다. 극의 스토리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다. 제작사에서 공개한 인물소개 정도의 스포일러는 있다. 극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보러 가고 싶다면 피하길 권한다.
의자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무대를 처음 목격했을 때, 나무의자 10개가 사각형의 나무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하나 다 다른 모양의 나무의자 10개는 베르나르다 알바와 다섯 딸들, 미친 할머니 호세파, 그리고 하녀 세 명을 위한 자리다.
‘자리’. 인간 사회를 하나의 상상된 공동체라고 규정했던 구조주의 사회학자들은 결국 개인 역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을 통해 상상되고 인정되는 하나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개개인을 특정 짓고 구별하는 개성적이고 특수한 정체성 이전에, 그 개성을 담는 그릇으로서 ‘사람’이라는 보편적인 정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조르지오 아감벤은 저서 <호모 사케르>에서 그런 자리가 없는 사례를 들었다. 로마 시대에 특정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결혼이나 장례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누군가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아니었다.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지만 사회적으로 살아있지 않은 사람들, ‘한 사람’의 자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었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여자들은 ‘집’이라는 사회 속에 각자 자신의 자리를 갖고 있다. 그건 나무라는 같은 재질로 만들어졌고 비슷한 크기다. 그들이 지닌 여자라는 공통의 ‘사회적 자리’를 상징하는 것처럼. 하지만 모든 의자들은 조금씩 디자인이 다르다. 다섯 딸들과 하녀들이 타고 난 사회적 자리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 혼자 아버지가 다르기 때문에 유산을 가장 많이 가진 앙구스티아스, 뛰어난 바느질 재주를 가진 막달레나, 착하고 수줍은 성품을 타고 난 아멜리아, 추한 외모와 결손이 있는 신체를 가진 마르티리오, 아름다운 아델라.
이들의 자리는 족쇄다. 1930년대 스페인 안달루시아에서 사회가 미혼 여성을 인간으로 대해 주는 순간은 그 작은 나무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언젠가 찾아올 결혼식을 기다리며 바느질을 할 때 뿐이다. 그게 당시 사회가 미혼 여성에게 마련한 유일한 자리였다. 결혼을 하면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지만, 하녀 폰시아의 증언에 의하면 ‘아내’라는 다른 자리에 다시 묶인다. 그들이 가진 재산, 외모, 성품 같은 특성들도 그저 각각 다른 방식의 억압이 될 뿐이다. 앙구스티아스는 재산이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을 여자로, 아멜리아는 소문조차 나지 않는 여자로, 마르티리오는 남자들이 도망가는 여자로, 아델라는 창녀로 불린다.
질서, 침묵, 권력
딸들과 하녀들은 작은 의자를 짐짝처럼 끌고 다닌다. 베르나르다 알바가 등장할 때마다 의자와 딸들은 무대 끝 양 쪽에 정렬한다. 베르나르다 알바가 그렇게 중요시하는 ‘질서’와 침묵의 모습 그대로. 그리고 무대 정 가운데 베르나르다 알바의 의자가 놓인다. 그는 장군처럼 두 다리를 넉넉히 벌리고 굳건히 허리를 펴고 앉는다. 하지만 베르나르다 알바의 의자도 다른 여자들의 의자와 다르지 않다. 작고, 나무다. 집안에서 그것들을 마음대로 정렬하고 침묵시키는 것만이 베르나르다가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이고, 그는 그것을 마음껏 휘두른다.
그러나 베르나르다 알바가 무대에서 사라질 때, 딸들과 하녀들은 의자들을 흐트러트리고, 그 위에 뛰어올라 창 밖을 내다보고, 의자를 두들겨 연주한다. 이런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딸들과 하녀들이 모여서 바느질을 하다가 한 명씩 자신의 내면을 털어놓는 노래를 부를 때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캐릭터가 100분 내내 그토록 엄격하게 정해진 여자로서 그들의 ‘자리’에 들어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각자의 내면은 그들에 대한 사회적 규정에 들어맞지 않는다. 한 명씩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치마를 휘두르며 화려하고 격정적인 플라멩코를 춘다. 그들은 의자에 갇히지 않는다. 의자를 사용해 자기 자신을 연주한다.
아델라가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안에서 그를 거역하고 자신의 욕망에 몸을 맡길 때, 다른 여자들은 자기 의자를 아델라를 향해 내던진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의자들은 그대로 극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제자리에 세워지지 않는다. 사회적인 자리가 사라진 존재는 어떻게 될까? 조르지오 아감벤이 지적했듯이, 그런 존재는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 원치 않는 사생아를 낳아 살해한 것을 들통 난 옆집 림브라다의 딸처럼. 가부장제의 폭력을 답습하는 베르나르다의 폭정을 폰시아가 ‘과보호’라고 부르는 이유다.
남자를 위한 의자는 없다
결국 이 무대의 여성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다. 사회적인 자리에 갇히는 것. 그 자리를 없애 버리고 미치거나 죽어서 자유로워지는 것. 오늘날 여성이라는 사회적 자리는 얼마나 다를까? 초라하고 조그마한 나무의자는 여러가지 크기와 디자인의 의자로 변했더라도, 여전히 여성에게 남자처럼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온전한 의미의 사회적 자리가 주어지는지는 의문이다.
재미있는 건, 무대 위에 남자를 위한 의자는 한 개도 없다는 사실이다. 멀티 역할의 여배우가 연기하는 두번째 남편 안토니오의 모자는 장례식에서만 가지런히 늘어선 의자 위에 놓이고, 베르나르다 알바가 그 모자를 들어 땅바닥에 내던진다. 남자들은 굳이 의자에 갇히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시대적 상황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억압자도 피억압자도 심지어 남자를 연기하는 것도 오로지 여성들에게만 허락된 이 무대가 보여주는 거대한 아이러니일 수도 있다. 여자의 고통을 묘사하기 위해 남자는 ‘사회적 조건’이자 ‘전제’로만 존재해도 충분하다. 실제로 무대에 올려 줄 필요까진 없는 것이다.
플라멩코
플라멩코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배경인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무용이다. 유럽 전역을 떠돌아다니던 집시들의 춤에서 유래했다. 순수한 플라멩코는 캐스터네츠를 쓰지 않고 구두 소리(사파테아드)와 손뼉 소리(팔마), 손가락 튕기는 소리(피트)로 구성된다고 한다. <베르나르다 알바>에서도 캐스터네츠는 단 한 장면에만 등장한다. 모든 배우들은 곡마다 사파테아드, 팔마, 피트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역할을 겸한다.
집시들에게 플라멩코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춤이 아니었다. 춤추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기 위한 춤이었다. 국경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민족, 새가 인간으로 변해서 자신들의 선조가 되었다고 믿었던 집시들의 춤. 절묘하게도 집시는 실제로 조르지오 아감벤이 말했던 ‘호모 사케르’의 가장 유명한 실존 사례 중 하나다. 2차대전에서 집시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존재로 취급됐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 갇힌 여자들은 집시가 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았을 것이다. 물론 출신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베르나르다는 자기 딸들이 집시와 말만 섞어도 용서하지 않았겠지만. 베르나르다의 딸들은 각자 마음 속에 춤추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열망을 품고 있다. 그래서 이 극은 플라멩코가 아니면 안 된다.
바느질을 하다가 한 명씩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는 노래를 부를 때(각 노래 제목은 딸들의 이름이다), 아델라는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사는 꿈을 노래한다. 노래의 제목은 "아델라". 클라이막스부터 그 노래의 끝까지, 아델라는 노래하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플라멩코를 춘다. 객석을 똑바로 쳐다보는 자신만만한 미소와 번뜩이는 눈빛. 백 마디 말보다 1분의 플라멩코다.
시선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무대를 구석구석 사용하는 동시에 배우들의 시선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 걸맞지 않았던 각자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 앙구스티아스는 뒤돌아보는 장면이 많다. 불안함에 자꾸만 뒤를 확인하는 사람처럼. 외면하는 장면도 많다. 막달레나는 가장 중심을 잘 잡는 모습을 보여준다. 앙구스티아스와 달리 그는 무엇도 외면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할 때도 상대를 똑바로 쳐다본다. 아멜리아는 수줍게 고개를 숙일 때도 많고, 동그란 눈을 여기저기 돌리느라 바쁘다. 감정이 풍부한 캐릭터라 표정을 보는 재미가 있다.
마르티리오는 집 밖에서는 시선에 난도질 당하는 희생자다. 남자들은 마르티리오의 추한 외모와 굽은 등을 손가락질하고 욕한다. 그러나 집 안에서 마르티리오는 거꾸로 시선을 자신의 무기로 사용한다. 그는 아델라를 빤히 쳐다보며 경멸하기를 좋아한다. 아델라가 “쳐다보지 마!”라며 질색할 정도다. 그는 잠도 자지 않고 형제들을 감시한다. 자신이 불행하기에 다른 형제들도 불행하기를 비밀스럽게 바라면서.
아델라는 베르나르다 알바 다음으로 무대 밖을 똑바로 바라볼 때가 가장 많은 캐릭터다. 미친 할머니 호세파와 함께 집 안에서 유일하게 상복이라는 사회적 의례를 벗고 광기의 흰 옷을 입은 캐릭터. 어머니 베르나르다가 강요하는 검은색 부채 대신 흰 꽃무늬 부채를 웃으며 흔드는 캐릭터. 극의 종반, 아델라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을 깨닫는다.
가장 흥미롭고 복잡한 시선을 가진 캐릭터는 하녀 폰시아다. 폰시아는 집 안의 모든 것을 보고 있다. 베르나르다 알바보다도 진실에 자세하다. 딸들이 모여서 툭툭 던지는 대사 속에 서로에 대한 긴장감과 갈등이 불꽃을 튀길 때, 폰시아가 누구를 쳐다보고 있는지 주목해보는 것도 이 극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멀티 역할의 두 여배우가 유일하게 캐스터네츠를 연주하며 춤추는 노래 "I Will Dream of What I Saw"는 여자들이 창 밖을 지나가는 남자들을 쇠창살 틈새로 보면서 갈망하는 노래다. 전형적인 시선 권력인 '캣콜링'을 성별을 바꿔 미러링한 듯한 장면이다. 남자들은 말을 타고 초원을 가로질러 가고, 여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환호하며 격렬하게 자신들이 바느질하던 레이스 자락을 흔들어댄다. 남자를 향한 욕정과 그 남자들이 소유한 자유를 향한 열망이 완전히 일치하는 순간이다. 배우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엄청난 장면이다. 눈이 열 쌍 있다면 열 개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