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넷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클레어

알다뮤지컬여성 주인공

2019년 넷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클레어

이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초연 2016년, DCF 대명문화공장 2관 라이프웨이홀
공연 2018년 11월14일~2019년 2월10일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
대본, 작사 박천휴
작사, 작곡 윌 애런슨
연출 김동연
수상 2017년 제 2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소극장 뮤지컬상, 여우주연상(전미도),
연출상(김동연), 작사상(박천휴&윌 애런슨), 작곡상(윌 애런슨), 프로듀서상(한경숙)

 

<어쩌면 해피엔딩>은 티켓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초연, 앵콜 공연을 놓치고 재연으로 처음 접했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작품이다. 수상과 흥행에 흥분하지 않고 소극장 규모를 유지하는 것도 식지 않는 인기에 한 몫을 하고 있다. 

인간이 아닌 두 로봇이 등장해 사랑을 나눈다는 설정은 ‘로봇’이라는 단어가 최초로 등장했던 카렐 차펙의 1920년 작 뮤지컬 <R.U.R>을 연상케 한다. 카렉 차펙의 두 로봇은 인류도 사라지고 없는 세상에 단 둘만 남는다. 이들에게는 주어진 수명을 극복할 기술도, 지식도, 후손을 남길 방법도 없다. <R.U.R>에서 로봇들은 그저 슬프게 소멸하는 존재로 그려져 영원이라는 것에 대한 의문은 물론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제목부터 이미 아련하고 간질간질한 안타까움이 물씬 든다. 해피엔딩이 아니라 ‘어쩌면’ 해피엔딩이라니, 그렇다면 해피엔딩이 아니란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클레어라는 안드로이드, 아니 이 안드로이드에 투영된 여성성 그 자신은 해피하다. 그렇지만 이 인물을 분석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사람은 착잡하고 해피하지 못했다. 어쩌면이라는 가능성조차 없이, 해피할 수 없었다. 

줄거리

* 아래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결말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까운 미래의 사회, 인간을 도와주다 은퇴한 로봇들이 모여 사는 낡은 아파트에 사는 올리버는 헬퍼봇 버전 5다. 자신을 데리러 오겠다는 옛 주인 제임스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을 보낸다. 복도 건너편에 사는 헬퍼봇 버전 6 클레어가 충전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올리버의 문을 두들기면서 올리버의 똑같으면서도 안정적인 일상은 깨진다. 클레어가 자신보다 상위 버전인 6이라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올리버는 자신이 더 나은 이유를 조목조목 늘어놓으며 클레어의 속을 긁는다. 

시작은 그랬어도 헬퍼봇으로 프로그래밍된 올리버의 측은지심이 사람이 아닌 클레어에게도 발동하면서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고, 마침내 올리버의 전 주인 제임스가 살고 있다는 제주도를 향하여 과감하게 출발하게 된다. 출발 전부터 이미 손목과 발목 등이 고장나기 시작한 두 사람, 아니 로봇들은 자신들에게 남은 나날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 한다. 

애써 찾아간 보람도 없이 제임스는 이미 죽었고 그의 가족들은 올리버의 도움을 원하지 않는다. 제임스는 죽으면서 올리버에게 오래된 LP를 유산으로 남겼다. 클레어는 인간이 로봇에 뭔가를 남겨주는 걸 처음 보았다며 인간 사이의 사랑을 믿기 시작한다. 두 로봇은 함께 클레어의 목적이었던 반딧불을 본 뒤 집으로 돌아와 서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만 내구성이 약한 클레어가 급격하게 망가지기 시작하게 된다. 이내 클레어는 올리버를 괴롭히기 싫다며 메모리를 초기화 하자고 제안한다. 

메모리를 만나기 전날로 돌려 지운 두 로봇. 클레어는 망가진 한 쪽 발목을 끌고 올리버의 문을 두드리고 올리버는 친절하게 클레어를 맞이한다. 올리버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두 로봇의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며 공연이 끝난다.

로봇에 박제된 성역할의 편견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NO

클레어는 운명에 순응하는 인물이다. 관객들은 시종일관 무대 위에 등장하는 클레어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클레어의 취미는 무엇인가? 클레어가 좋아하는 음악은 무엇인가? 없다. 클레어에게는 분홍색 가디건을 좋아한다는 취향만이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올리버다. 클레어는 전적으로 올리버를 설명하기 위해서, 올리버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증거로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이 글은 여성 인물을 분석하는 글이지만 할 수 없이 올리버를 봐야만 한다. 올리버는 지난 세기의 향수를 간직한 로봇이다. 이름부터 고풍스러운 올리버는 전 주인의 취향을 고대로 빼다 박았다. 존 콜트레인이나 듀크 엘링턴처럼 재즈가 아트의 경지로 미친듯이 달려가던 시대의 재즈를 사랑하고, 마치 레옹처럼 화분을 키우며, 음악잡지를 정기구독하고, 입은 옷마저 1940, 50년대를 연상케 하는 고풍스러운 색감이다. 그의 성격은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고지식한 클래식 재즈 매니아다. 어떤 하나의 인물이 이 한 줄만으로도 충분히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지만 클레어를 보자. 클레어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상냥함, 귀여움, 사랑스러움...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에 클레어의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토록 사랑스럽고 귀엽지만 클레어의 운명은 사실 올리버를 만나기 전이든 후이든 소멸해 가는 것, 그 자체다. 클레어에게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올리버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서서히 망가지는 것이다.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NO

극 중에서 클레어가 목표로 세우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제주도에 가서 반딧불을 보는 것, 나머지 하나는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반딧불은 주인공인 로봇들 스스로의 운명과 동일시 하는 상징이다. 이러한 단기적인 목표는 인생의 신념이나 목표와는 다르다. 

클레어는 올리버와 다르게 많은 주인을 섬겼다. 클레어가 우선 순위는 아닌 ‘친구’도 있다. 클레어가 사랑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전 주인인 여성이 이별을 경험한 뒤 극단적으로 피폐해져 가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클레어에게 어떤 목표가 있을까? 자신이 섬기는 주인을 돕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 그런데 클레어에게 그럴만한 물리적인 힘은 있었을까? 이런 의문을 품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이 작품 속에서 클레어는 여성에 대한 ‘아름다운’ 편견의 집합체다. 저런 여성이 있어 주었으면 하는 희망사항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누구의? 친구나 애인을 원하는 남성들의.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NO

클레어는 헬퍼봇 6다. 헬퍼봇 5인 올리버보다 좋은 프로세스를 지니고 있는 대신 내구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극 중에서 클레어가 올리버보다 실질적으로 나은 성능을 보여주는 것은 언어의 자연스러운 구사력과 GPS의 존재 뿐이다. 클레어는 더 많은 지식을 담고 있지만 자신의 충전기를 고칠 줄 모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여자는 기계를 다루지 못한다는 전형적인 프레임 안에 갇힌 두 로봇을 연기하는 두 배우를 객석에 앉아 보는 기분이란 매우 미묘하다. 그 프레임은 파스텔 색감의 몽글몽글하고 예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감옥에 무지개색을 칠한다고 해서 감옥이 감옥이 아닌 건 아니다. 

클레어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희망 여성’의 틀 안에 갇혀 있다. 더 많이 배웠지만 남자 로봇처럼 기계를 만들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는 못한다.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말해서 ‘공주병’ 환자라는 소리를 듣고 만다. 그 순간 올리버가 느끼는 감정은 분명히 우월감이다. 버전 낮은 남성인 내가 버전 높은 여성인 너를 내 아래 계단에 두었다는 그 우월감은 이 작품 내내 올리버가 단 한 번을 버리지 않는 태도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몇 년 전 어느 장관이, 혹은 어느 국회의원이 여성들에게 ‘눈을 낮추라’고 지엄하게 충고했던 바로 그 지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게다가 클리어의 생명줄인 충전기마저도 올리버에 의해 만들어진다. 클레어는 왜 이토록 이율배반적인가. 클레어는 대체 무엇을 도와주는 핼퍼봇이었을까. 꽃을 들고 먼지를 털었을까? 마지 이전 세기의 여성들처럼? 외출을 할 때는 분홍 가디건을 입고? 매니악하고 고지식하게 살아온 모태솔로에게 내려진 한 줄기 사랑의 빛으로?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NO

클레어의 결정은 전적으로 올리버에게 달렸다. 클레어는 ‘어린 왕자’인 올리버에게로 가서 그의 ‘여우’가 아니라 그의 ‘장미’가 된다.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나를 길들여줘"라는 말로 어린 왕자의 친구가 되어 만남을 기다린다.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댓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올리버와 클레어의 관계에는 충전기라는 목숨줄이 걸려있다. 처음에는 충전기를 주고 받는 것을 거추장스럽게 여기지만, 나중에는 충전기가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핑계가 된다. 어쨌든 충전기의 본질적인 역할은 변하지 않는다. 올리버 때문에 클레어가 좀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는 사실이다. 올리버와 클레어는 마치 어린 왕자가 장미에게 그러하듯 벌레를 잡아주고 유리 보호막을 씌워주는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클레어는 로봇이지만 변덕스럽고 즉흥적이며 약하고 보호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어린 왕자에 비유하자면, 발 달린 장미다. 

올리버를 만나기 전의 클레어는 마지막 순간까지 혼자서 살아가는 일상을 보내는 로봇이었다. 하지만 올리버와 친해진 뒤, 제주도에 있는 주인을 만나기 위해 빈 병을 수집해 파는 올리버가 안쓰러워 자신의 여행에 올리버를 끼워준다. 계획적인 올리버가 이를 거절하자 거듭 제안한다. 표면적으로 나온 핑계는 그의 휴대용 충전지가 필요하기에 함께 가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제임스의 집 앞에서 다시는 못 볼 거라며 헤어질 때, 그들 중 누구도 충전기를 떠올리지 않는다. 클레어는 차마 제임스의 집 앞을 떠나지 못하고 올리버를 기다린다. 혹시라도 올리버가 버림받았을 때를 대비해서다. 역시나 올리버는 제임스의 가족들에게 거부당한 후 망연자실해서 집을 나온다. 

두 로봇이 인간 흉내를 내면서 모텔에서 묵었을 때, 홀로 카운터를 지키는 호텔 직원을 돕고 싶어 안달하는 올리버에게 클레어는 "너는 인간을 돕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서 그래"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누군가를 도와주는 로봇은 클레어다. 처음 클레어가 도움을 청할 때는 소통이 싫어서 못 들은 척 하던 올리버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 올리버의 도움은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만 발현된다. 인간과 로봇을 가리지 않고 상냥함을 실천하는 클레어의 모습은 단지 상위 버전이기 때문에 나오는 다정함일까? 

고장이 가속화 되어 가자 클레어는 자신의 메모리를 삭제하기로 결심한다. 이는 클레어의 로봇 생애 중 가장 큰 결정이다. 이 결정 역시 올리버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올리버에게 계속 의지하는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망가져 가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고통스러워 한다. 고통보다는 망각을 택하는 것, 그것도 올리버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YES, but...

클레어는 변하는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 사랑을 믿지 않던 클레어는 제임스가 남긴 LP를 보며 진실한 사랑이 있다고 믿게 된다. 그리고 올리버에 대한 마음을 거부하기를 그만둔다.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올리버 앞에서 장황하게 사랑에 대해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사랑에 빠진다. 

사랑을 깨달은 후, 그들의 행복은 아주 짧다. 기계인 몸이 망가져 가는 것에 대해 그들은 인간처럼, 혹은 인간보다 더 큰 상실감을 느낀다. 소멸되어 가는 신체로 인해 클레어는 사랑의 양가적인 면 가운데 고통과 직면한다. 하지만 클레어에게는 고통을 견딜 힘이 없다. 남은 시간동안 클레어는 오로지 올리버의 노력에 기대어 버틴다. 망각을 택함으로서 클레어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고통 없는 로봇으로 남는다.

종합 별점 ☆

점수를 굳이 내자면 클레어는 별점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2점으로 땅으로 파고 드는 수준이다. 유일한 여성 캐릭터기 때문에 당연히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데다가 그는 메모리 삭제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올리버의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장치로 전락한다. 클레어가 망각을 택할 때 반대 쪽의 올리버는 클레어의 고통까지 스스로 짊어지기로 결정하는 굳센 존재로서 완성된다. 클레어는 그렇지 못하고 올리버에게 기댄다. 

반면에 올리버는 처음 등장하던 순간부터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 차분하게 자신의 성장을 이루어낸다. 더 기능이 떨어지는 로봇이지만 그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 인간과 유사한 취향, 취미, 고집까지 있으며 돈을 모으기 위해 불법도 마다하지 않는 결단력도 지녔다. 클레어는 올리버의 마지막 생에 주어진 상과도 같은 존재다. 하지만 올리버가 상을 받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한 주인만을 우직하게 섬겨서? 자신만의 일상이 있는 나날들을 보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클레어라는 인물, 아니 로봇이 하나의 등장인물로 얼마나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가는지만 평가했다. 종합 별점은 작품 전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작품 속에는 아름다운 노래와 따뜻한 장면과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걸 다 제치고 클레어의 주체성만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만든 작품과 사랑스러운 인물들이라고 해도, 그 안에 담겨 있는 무시무시할 정도의 여성과 남성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로봇이라는 장치 안에 담긴 여성과 남성의 메타포가 미래 사회에서도 그 정도에 그친다면, 인간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만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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