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1976 할란카운티>
바바라 코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할란카운티, USA(Harlan County, USA, 1977)>는 매우 놀라운 작품이다. 이 다큐에는 바바라 코플 감독의 목소리가 거의 담겨있지 않다. 어쩌다가 질문을 던질 때 아주 조금 들려올 뿐이다. 바바라 코플 감독과 그의 크루들은 필름에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미국의 스타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의 작품들을 생각하면 완전히 대조적이다. 마이클 무어의 영화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그의 독무대다. 하지만 이 필름에서 바바라 코플은 자신의 목소리를 죽인다. 대신 파업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거칠게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늘 말하는 것은 광부들과 그의 아내들이고, 그 중에서도 주로 아내들이다. 왜냐하면 일하는 남편들을 대신해서 아내들이 파업을 주도하고, 마을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알리는 전단지를 나눠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바라 코플 감독은 어느새 이 파업의 아주 중요한 구심점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코플의 카메라가 돌아가는 한, 주 경찰과 사측이 고용한 폭력배들은 총을 감춰야만 했다. 카메라를 끄라는 협박과 살해 협박이 계속되었지만 코플은 그만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이 파업을 지키는 수호천사라도 된 양 으스대지도 않는다. 협박하는 자와, 협박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척 하지만 총과 폭력 앞에서 두려움을 이길 수 없었던 사람들이 모두 한 화면 안에 있다.
바바라 코플이 처음 캔터키주 남동쪽 끝에 위치한 탄광마을 할란 카운티에 도착했을 때, 그의 주제는 광산노조위원장 토니 보일과 탄광의 소유주인 듀크 전기회사의 유착관계를 파헤치는 것이었다. 당시 토니 보일은 라이벌인 조셉 야브론스키 일가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마을을 통과하는 길에서 전단을 돌리던 광부들은 카메라와 장비를 들고 나타난 바바라 코플과 세 명의 크루들을 향해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할란 카운티의 광부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뉴욕에서 온 이기적인 히피 여성들이었다. 그들을 계집애(girl)라고 부르며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속이 답답했던 바바라 코플은 파업 중인 사람들에게 왜 자신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느냐고 솔직하게 물었다. 이보다 더 기본적일 수 없고 진실할 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야 네가 여기서 뭘 할 건지 먼저 말하지 않았잖아.” 한 마디로, 너는 누구의 편이냐는 질문이었다. 바바라 코플은 다큐멘터리의 방향을 바꿔 파업하는 광부들을 담았고, 그들의 편에 섰다.
광산 수익이 백 배로 뛸 동안 광산 인부들의 임금은 고작 두 배 올랐다. 이들은 정당한 권리를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해고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이 작업은 바바라 코플의 남은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버린 곳도 할란 카운티였다. 햇수로는 삼년, 머문 기간으로는 18개월, 바바라 코플은 마을의 파업이 마침내 승리하는 장면까지 찍었지만 누구도 감히 환호하지는 못했다. 그 긴 싸움의 끝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쟁취해 낸 승리였기 때문이다.
뮤지컬 <1976 할란카운티>와 코플 감독의 <할란카운티>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작품이다. 뮤지컬에 반영된 실제 사실은 딱 하나, 할란카운티에서 광부들이 파업을 했다는 것 뿐이다. 다큐멘터리와 같은 이름의 인물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실제 그 인물들의 행적이나 삶과 뮤지컬 속 내용은 아무 상관이 없다. 대체 이 뮤지컬은 왜 <할란카운티>라는 이름을 가져온 것일까?
줄거리
제작사의 시놉시스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1976년, 미국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10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미국 남부 10개 주의 흑인은 여전히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백인인 다니엘은 자신을 위해 평생 부당한 처우를 받고 살아 온 흑인 라일리의 자유를 위해 함께 북부 뉴욕으로의 탈출을 감행한다. 한편, 미국 중남부 켄터키 주의 작은 마을 할란 카운티. 광산 노조 광부들은 이스트 오버 광산회사의 횡포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존을 필두로 파업하고 회사와 대립한다. 할란카운티를 지나던 낯선 이방인 다니엘과 라일리는 자신들에게 도움을 준 노조위원장 모리슨의 은밀한 부탁을 받게 되는데...'
라일리는 다니엘의 부모가 사온 노예다. 부모가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자, 라일리는 어린 다니엘을 돌볼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실수로 난 화재를 보상하기 위해 대신 일한다. 바보처럼 우직하고 말을 하지 못한다. 새 주인에게 팔려가던 라일리를 빼내 뉴욕으로 가던 다니엘은 기차역에서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모리슨이 총에 맞는 걸 목격하고, 모리슨의 부탁으로 할란카운티 광산노조에게 서류를 전해주기로 한다.
파업 중인 할란카운티의 광산노조는 사장인 토니 보일과 악독한 변호사 패터슨, 노조이면서 회사 측에서 일하는 배질로 인해 풍전등화. 다니엘이 가져 온 서류는 전국광산노조에 할란카운티가 가입됐다는 증명서이다. 즉, 할란카운티 광산노조가 전국구 노조의 지원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리슨의 뒤를 이어 노조를 이끌다 투옥된 존의 아내 나탈리는 존의 석방을 위해 그 서류를 패터슨에게 전해준다.
한편 흑인인 라일리는 난데없이 모리슨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며 체포되는데, 라일리의 도움을 받았던 신문팔이 소년 올리버가 패터슨의 돈을 받고 거짓 진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증언을 엎기 위해 다니엘은 기차역에서 자신들을 모욕했던 두 여성을 찾아내 라일리의 무죄를 증명하고 패터슨은 위기에 몰린다. 보일에게 버림받을 처지에서, 패터슨은 광산을 폭파해 노조원들의 보험금을 챙겨 튈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이 보험금을 보일과 나눠먹기로 약속한다.
보일은 이런 계획을 숨긴 채 노조원들에게 유리한 조건의 계약서를 내밀고 사인하게 한다. 하지만 그들의 진짜 계획을 엿들은 나탈리가 다니엘에게 사실을 폭로한 뒤, 패터슨에게 돌아가 살해당한다. 다니엘은 노조원들과 함께 탄광에 들어가 보일의 계획을 망치기로 결심한다. 보일의 계획을 뒤늦게 안 배질은 자신이 노조를 위해 왔다고 생각했던 모든 게 거짓임을 깨닫고, 보일에게 총을 겨눈다. 보일 사장과 패터슨, 그리고 배질이 서로에게 총질을 할 때 탄광 폭발을 피했던 노조원들이 나타나고,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자, 보일 사장은 다니엘에게 총질을 한다. 그러나 라일리가 그 총을 대신 맞고 죽는다. 다니엘은 뉴욕으로 가지 않고 할란카운티에 남아 엘레나와 함께 새 날들을 시작한다.
벡델 테스트는 통과하지만
이 작품에는 세 명의 여성 주연이 등장한다. 죽은 노조위원장 모리슨의 딸 엘레나, 존의 아내 나탈리, 올리버의 여동생 엠버다. 엘레나와 나탈리는 서로 파업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일단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이 작품 속의 여성들은 철저하게 남자에게 주어지는 여자거나, 남자들의 발목을 잡는 여자거나, 미움을 받아도 할 말 없는 천박한 존재들로 그려진다. 이 작품의 여성 인물들을 아무리 합쳐도 한 명의 성숙한 여성 인물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No
우선 엘레나를 보자. 엘레나는 살해당한 노조위원장 모리슨의 딸로 광산 유일한 여성 광부지만 탄광에서 얻은 폐병에 시달린다. 설정 상은 유일한 여성 광부인데, 뮤지컬 속에 드러나는 모습은 매우 가녀린 여성이다. 실제 일하는 모습은 전혀 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죽고 광부들이 자신을 외면하자 그들을 설득하는 대신 마을을 떠나버린다. 그랬다가 그는 외부인인 다니엘의 설득에 의해 다시 돌아와, 보일 사장의 만행을 기자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떠맡는다.
미인으로 그려지는 엘레나는 다니엘에게 주어지는 짝이자 성녀 역할을 맡는다. 그는 노조위원장인 모리슨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마치 탄광노조의 공주님처럼 보인다. 엘레나는 자신의 아버지가 목숨까지 바쳐 지키려 했던 노조를 초개처럼 버리고 떠났다가, 다니엘이 보일의 음모를 폭로하자 돌아와서 다니엘을 돕는다. 다니엘이라는 외부에서 온 잘생긴 남자 ‘선지자’를 보필할 만한 유일한 미인이다.
그나마 성녀로 그러진 엘레나는 다른 여성인물들에 비하면 운이 좋은 편이다. 부위원장인 존의 아내 나탈리는 노조 일로 정신이 없는 존에게 “내가 더 중요해, 노조가 더 중요해?”라고 묻는다. 그것도 모리슨이 남긴 전국노조가입서를 존에게 전달하러 가서 하는 말이다. 나탈리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존과는 그렇게 한 판 싸우더니, 존을 감옥에서 석방시킨다면서 그 서류를 들고 패터슨에게 달려가 남편의 석방과 바꾸고, 남편에게 미안하다며 사라진다. 극 후반에 불쑥 다시 나타난 나탈리는, 보일과 패터슨의 광산 폭파 계획을 엿들은 뒤 패터슨을 유혹해서 그들의 서류를 훔치더니 남편도 엘레나도 아닌 다니엘에게 그 서류를 가져다 준 뒤 뜬금없이 다시 패터슨에게 돌아가서 죽임을 당한다. 일련의 행동에 아무 개연성도 없는 이 인물은 그저 존의 발목을 잡을 뿐이다. 극중에서 그렇게 중요한 줄 알았던 초반의 전국노조 가입 서류는 후반부에는 전혀 언급이 안 되는 어이없는 맥거핀으로 전락해 버린다.
엠버는 ‘착한’ 올리버를 나쁜 일로 내모는 동력이다. 올리버는 자신 때문에 다리를 다친 여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게 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엠버의 행동이나 존재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악인' 올리버를 개심하고 변화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그 역할은 외부에서 온 멋진 남자, 다니엘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또한 엠버는 어린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고 무조건 감싸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 같은 라일리의 새로운 돌봄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작품 속의 여성 인물들에게 자신만의 운명 같은 것은 없다. 엘레나의 운명은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나중에는 다니엘에게 묶이고, 나탈리는 애당초 희생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며, 엠버는 올리버의 악행을 설명하는 혹일 뿐이다.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No
때문에 이들에게는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 같은 것도 그저 화장대 위에 놓인 목걸이처럼 벗었다 걸었다 할 수 있는 장신구에 불과하다. 엘레나는 그나마 자신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목표'를 때려치고 나가는 인물이다. 엘레나는 아버지인 모리슨에게 남들과 같은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탄광 광부로서 제대로 대접받는 인생인지, 그렇지 않으면 힘든 탄광을 떠나 ‘남들처럼’ 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느 쪽이든, 광부인 그들조차 광부라는 직업을 노예처럼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실, 이 작품은 광부들을 현대판 노예와 다름없이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자부심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죽지 않아도 되는데도 굳이 패터슨을 찾아가 죽는 나탈리의 목표는 존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인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엠버의 목표는 굳이 말하자면 그저 생존일까?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No
가장 일관적이지 않은 인물은 물론 나탈리다. 나탈리는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여성 인물의 '유용함'은 남자를 유혹하는 것이고, 남자를 유혹한 뒤에는 더렵혀진 몸이라 살해당하는 용도로 쓰인다는 아주 고전적이고 마초적인 사용법과 플롯에 의해, 나탈리는 그저 쓰이고 버림 받은 뒤 애도를 당하는 존재가 된다. 엘레나의 캐릭터가 가진 일관성이라면 좋은 성품을 들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꿈도 목표도 다 버리는 인물이라 역시 일관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등장 빈도가 가장 낮은 엠버다. 엠버는 오빠가 무슨 일을 했건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자동 인형처럼 말하는 아이다. 단지 다리를 다쳤다는 이유만으로, 이 아이는 세상과 단절되어 오빠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누가 집으로 찾아오든지 자신의 저는 다리를 내보이며 무조건 오빠를 용서하라고, 미워하지 말라고 소리친다. 게다가 극중에서 어린 엠버의 이런 호소는 매우 잘 먹혀서 씩씩거리고 들어왔던 올리버도 이내 엠버의 편이 되고, 라일리는 따듯하게 엠버를 감싼다. 물론 그 모습에 감동받은 올리버는 패터슨의 음모를 고발하는 증언을 해준다. 그리고 올리버와 엠버의 역할은 거기서 끝이다. 다니엘과 라일리의 숭고함을 더욱 빛내주는 것이다.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Yes, but...
나탈리의 모든 결정은 남편인 존에 매이지만, 엘레나의 마을을 떠나겠다는 결정은 자신만의 것이다. 물론 이 결정은 두 발 전진을 위한 한 발 후퇴를 상징한다. 그러나 '두 발 전진'에 해당하는 결말이 다니엘의 설득이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 엘레나 본인의 결정조차 완전히 자신만의 결정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우습게도 이 상황에서 증언을 하기 위해 먼 곳의 법정까지 와 주는 ‘귀부인’과 ‘승무원’이야말로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등장한다. 다니엘은 모리슨의 죽음을 목격한 증인들로서 라일리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이들을 법정에 부른다. 그러나 사실 귀부인은 흑인인 라일리가 자신을 밀친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승무원은 자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잘생긴 다니엘을 언급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의도하지 않게 그들이 혐오해 마지않는 흑인의 무죄를 증언하는 무식하고 이기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어쨌든 이 두 사람은 머리가 나쁘고 이기적일지언정, 전적으로 자기 발로 먼 곳에서 할란 카운티의 법정까지 왕림해 주는 인물들이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No
엘레나는 애당초 모리슨의 딸로 등장해 이미 누구보다도 앞서 나가는 인물인 듯이 다뤄지고, 나탈리는 발전하기는 커녕 맥락도 이유도 없이 희생만 당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극중에서 여성 인물들이 뭔가 발전을 이루지는 않는다. 그나마 발전이라면, 백인 마을이던 할란카운티가 희생적인 인물인 라일리에 의해 흑인이라고 무조건 나쁘지 않다는 점을 깨우친 점일까?
종합 별점 ☆
잘생긴 백인 영웅과 충직한 흑인 노예?
사실을 말하자면 뮤지컬 <1976 할란카운티>를 보며 여성 인물에 경악하는 순간보다 오히려 흑인 인물인 라일리에 경악한 시간이 더 많았다. 등장하는 빈도는 그 누구 못지 않지만, 라일리는 말을 할 수 없기에 그저 바보처럼 다루어진다. 라일리를 바라보는 극중의 시선은 소름끼친다. 극중에서 가장 약자로 등장하는 흑인인 라일리는 눈처럼 하얀 백인 마을 할란카운티에 도착하자마자 마을 사람들로부터 엘레나를 폭행했다는 오해를 받는다. 그 오해를 스스로 풀 수도 없다. 정신을 차린 엘레나의 해명이 있고 난 후에야 풀린다.
라일리는 그야말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강자들의 기대감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인물이다. 백인들이 아무리 억압을 가해도 라일리는 미친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주고 또 준다. 예수도 이렇게 다 주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게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다보면, 언젠가는 백인들이 흑인의 선량함을 알아주고 받아들여주는 날이 올 거라면서. 물론 그 날이 오기 전에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작은 주인을 대신해 총에 맞아 죽는다.
작은 주인 다니엘을 보자. 다니엘은 이 작품의 구세주다. 굳이 극중에서 그를 두고 모든 여성 등장인물들이 잘생겼다를 연발해야 하는 이유를 찾고 싶지도 않다. 다니엘은 모리슨의 부탁으로 마을에 도착했지만, 도착하자마자 마을 사람들의 사정을 다 이해하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 나서는 인물이다. 게다가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탄광에 폭발 위험이 있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라일리와 함께 들어간다. 도움보다 폐가 될 게 뻔한 이 사람을 광부들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저 두 구의 시체가 추가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다니엘은 외부에서 온 영웅이므로, 광부들을 어느새 그의 영도하심을 따라 갱도에 들어간다. 외부에서 온 눈처럼 하얀 백인 영웅과 그를 떠받드는 흑인 노예의 이야기를 2019년 대한민국 무대에서 한국인이 창작한 작품으로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눈이 내리면 너도 하얗게 될 거야
가진 자의 박애주의. 약자인 당신이 선하게 굴고 한없이 복종한다면, 언젠가는 그 진심이 닿는 날이 올 것이다. 복종의 서약을 그대로 담은 듯한 내용이다. 내려다 보는 박애주의는 그저 인종차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당신처럼 착한 백인은 처음 봤어요!" 다니엘이 라일리를 도운 모리슨에게 한 말이다. 자기 자신도 백인인데, 마치 스스로는 백인의 예외인 것처럼 쏙 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라일리가 자신을 노예로 사왔던 다니엘의 부모가 죽었는데도 자유민이 되지 못하고 계속 노예로 살아온 것은 다니엘의 존재 때문이다.
라일리는 현대판 톰 아저씨다. 한없이 패배주의적이며 노예의 삶이 피에 새겨진 인물이다. 하다못해 자유조차 백인 주인이 찾아준다. 그런 인물이 현실적인지는 둘째 치고, 다니엘은 남과는 다르게 흑인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진 인물이다. 이 인물을 쓴 작가는 그런 다니엘을 쓴 자신이 자랑스러울까?
백인인 모리슨은 흑인인 라일리에게 말한다. 광산에 들어갈 땐 하얗지만 나올 때는 모두 검은색이라고, 광산 안에서 우린 모두 평등하다고. 그 말을 마음에 담은 다니엘은 라일리에게 뉴욕은 흑백이 평등한 천국일 거라며, 그곳은 하얀 눈이 오는 도시라며, 눈을 맞으면 라일리도 하얗게 될거라며 기뻐한다. 이 대사는 진심으로 소름이 돋는다. 검은색은 더럽고 나쁜 것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고, 백인처럼 하얗게 될 때 라일리의 자유가 온다는 것은, 라일리에게는 결코 자유가 올 날이 없음을 뜻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승무원의 분홍 미니스커트
이 작품은 사회 가장 밑바닥에 흑인이 있다고 간주하고, 흑인도 아닌데 노조에 협조하지 않는 백인 여성을 서슴없이 머리 나쁘고 이기적인 존재들로 밀어붙인다. 때문에 이 작품에 나오는 모든 여성 인물들은 제대로 형상화되지 않으며, 그들은 '착한 흑인'보다 미성숙하고 악하고 뒤떨어진 존재다. 뭔가 굉장히 현실적이지 않은가? 실제로 미국에서는 흑인 남성이 여성보다 먼저 투표권을 획득했다. 여성보다 흑인이라도 남성이면 우선순위에 있는 것, 그 백년 전 현실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심지어 무대 의상조차 여성혐오적이다. 미국 고속철도 '암트렉'의 승무원 캐릭터는 굳이 분홍색 미니 스커트를 휘두르고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 70년대 암트렉의 승무원은 검고 통이 큰 바지를 입고 근무했다. 별로 오래 전 일도 아닌데 굳이 의상을 이런 형태로 정했다는 건, 성적 대상화를 거친 혐오의 결과물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정작 진짜 할란카운티의 실상을 다룬 다큐멘터리에는 이 모든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큰 일을 하고, 가장 강력한 언어들을 뱉어내는 것은 모두 여성들이다. 이들은 못 배웠고 교양도 없지만, 원초적인 힘과 지혜를 가졌으며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할란카운티는 1931년에 이미 한 번 탄광노조와 회사 간에 격렬한 전챙을 치렀다. 그 전쟁을 치렀던 노인들은 1976년의 파업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정도로 몇 명이나 죽어 나갔다. 그 때 이미 할란 카운티의 탄광노조는 전국노조에 가입했었다. 미 전국탄광노조위원장이었던 보일은 실제로 뮤지컬 속의 배질처럼 사측에 서서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조셉 야브론스키 일가족을 살해한 인물이다. 하지만 다큐에서 그는 그리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 할란카운티의 파업에 그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할란카운티에는 이미 흑인 광부들이 동료로서 일하고 있다. 폐병에 걸려 백인 동료들과 나란히 보건소에 앉아 진료를 기다리는 흑인 광부가 말한다.
탄광에 들어갈 때는 백인이지만, 나올 땐 모두 흑인이지.
그의 마지막 말은 다른 백인 광부들이 합창하듯 받는다. 그만큼 이 구절은 그들에게 매우 익숙한 말이다. 하지만 흑인 광부의 이 말도 극중에서는 숭고하신 백인 모리슨의 신념으로 둔갑한다. 뮤지컬 <1976 할란카운티>가 왜 이 아름답고 처절한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따왔는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어떤 카운티의 이름을 붙여도 나았을 것이다. 어설픈 박애주의로 흑백의 남성들이 시혜적인 박애주의 아래 뒤엉키며 여성들을 깔아뭉개는 작품을 보면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 라일리의 모습에서 감동을 말할 바에야, 차라리 총을 들고 무장투쟁에 나서는 라일리를 보고 싶다. 우리가 2019년에 <톰 아저씨의 오두막> 논쟁을 다시 시작할 이유가 뭔가. 그것도 대한민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