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스물네번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안나 아르카지예브나 카레니나

알다뮤지컬여성 주인공

2019년 스물네번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안나 아르카지예브나 카레니나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안나 카레니나> 

초연 2016년, 오페레타 씨어터, 모스크바
한국 초연  2018년,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
공연 2019년 5월17일~7월14일,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대본·가사 율리 킴
작곡 로만 이그나티예프
연출 알리나 체비크
한글 가사 박창학
의상 바체슬라프 오쿠네프
분장·가발 안드레이 드리킨

 

안나 카레니나는 늘 단죄의 대상이었다. 죄명도 한결 같이 욕망이었다. 남편을 버리고, 아들을 버리고, 사랑을 쫓았다. 그렇게 가진 걸 모두 버리고 사랑에 매달리더니, 결국 남자로부터도 버림받아 기차에 몸을 던져 신의 구원마저 바랄 수 없게 된 사람, 안나 카레니나는 그런 식으로 묘사됐다. 그런데 왜 그토록 많은 작가들이 이토록 통속적이기 짝이 없는, 백 년도 더 지난 소설을 인생 소설로 꼽을까? 안나에게 무엇이 있기에? 그 '무언가'를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에서 찾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찾을 수 없다. 뮤지컬에는 그저 이리 저리 휘둘리는 안나가 있을 뿐이다. 물론 방대한 원작 소설 속의 안나를 두 시간 좀 넘은 분량으로 추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안나의 내면을 비추지 않고 안나를 둘러싼 세상의 비난에 집중한다. 사실 원작 소설은 그 비난조차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뮤지컬은 소설에 비해 친절하지 않다. 때문에 안나는 마치 미친 여자처럼 넋을 놓고 기차 바퀴에 몸을 던진다. 안나는, 정말 그런 인물이었을까?

줄거리

안나는 오빠인 스티바를 방문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왔다. 그런데 스티바의 처제 키티에게 프로포즈를 하기 직전이었던 젊고 잘생긴 장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진다. 안나는 브론스키를 피해 급히 집으로 돌아오지만, 브론스키가 안나를 따라잡으면서 그들은 불온한 사랑에 빠진다. 

러시아 정계의 고관인 안나의 남편 카레닌은 안나의 불륜으로 사교계의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를 참지 못하고 부인에게 경고를 한다. 그러나 안나는 그럴수록 더 당당하게 남편에게 브론스키에 대한 사랑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며, 스스로 사교계를 버린다. 

안나가 아들인 세료자와 브론스키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사이, 브론스키는 그런 안나와의 사랑에 점점 지쳐간다. 안나와 대척점에 있는 스티바의 친구 레빈은 모스크바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살면서 키티를 방문해 청혼하려 한다. 그러나 키티의 마음이 브론스키에게 가 있는 것을 보고 상심하여 다시 시골로 돌아와 농장을 돌본다. 

사교계 한가운데서 브론스키에게 농락을 당했다고 여긴 키키는 그 부끄러움 때문에 병이 깊어져 유럽을 돌며 요양을 한다. 그러다  레빈의 농장 근처 시골로 요양을 와서 그와 재회하고, 둘은 결혼한다. 이 커플은 안나와 단 한 번 스쳐 지나가게 되는데, 이 때 키티와 안나는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한다. 그러나 행복한 그들의 모습은 안나의 불행을 더욱 깊게 만들었을 뿐이다. 자신을 향한 브론스키의 사랑이 식었다고 확신한 안나는 기차 앞에 몸을 던진다.

생략된 키티의 이야기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벡델 테스트 세 가지 항목 중 앞의 두 가지 전제를 가뿐하게 통과한다. 자신의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두 명 이상 등장하며, 그들이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나, 키티, 벳시 등 다양한 이름의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등장할지언정, 뮤지컬 속 이들의 대화내용은 초지일관 남자다. 특히나 키티는 머릿속에 남자밖에 없는 인물처럼 그려진다. 나를 버린 남자, 나를 사랑하는 남자, 그게 다다. 

안나와 키티가 마주쳐서 단 한 번 듀엣을 부를 때조차도 이들의 가사는 ‘그 때 알았다면’이다. 무엇을? 그 남자가 나에게 고통을 줄 것이라는 것을, 그 남자가 나에게 행복을 줄 것이라는 것을... 이들의 인생 속 불행은 모두 타인의 시선과 남자에 매인 운명 때문이다. 

키티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유럽의 요양지를 떠돌며 끔찍한 불행 속을 떠돌았던가. 브론스키로부터 배신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남들 앞에서’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열여덟의 키티는 이 모든 일을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어렸다. 쇠약하진 것은 육체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그 장면이 그의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 속의 키티는 타인에게 자선을 베풀면서 서서히 그 악몽에서 벗어난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브론스키가 자신에게 했듯이 키티 또한 한 예술가 가족을 후원하면서 예술가의 가정이 흔들리는 것을 목격했을 때였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부유하고 젊고 아름다운 키티는 가난하고 쪼들리던 예술가의 열렬한 구애를 받게 됐다. 키티가 애써 모른척 하는 사이, 예술가의 아내는 거칠어진 두 손을 모아 남편을 떠나달라고 애원하는 상황까지 다다른다. 그 상황에서 키티는 비로소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키티는 아름다운 외모에만 정신이 팔렸던 스스로를 돌아보며 그제서야 자신이 신경도 쓰지 않았던 레빈을 떠올렸다. 

뮤지컬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키티는 그야말로 사랑에 헤픈 여성처럼 보인다. 반면에 레빈은 순정남처럼 그려진다. 레빈의 감정은 몇 번이나 거듭 노래하고 길게 언급된다. 하지만 키티는 레빈이나 브론스키의 출연에 따라 붙는 악세사리처럼, 그저 레빈의 사랑을 증명해 주는 인물로 등장할 뿐이다. 

문제는 주인공인 안나 카레니나조차 그렇다는 데 있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가 안나를 '단죄'할 목적으로 원작 소설로부터 백 년이나 지난 후에 제작된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안나와 레빈이 각기 다른 인생을 상징하며 대비된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런 대비는 공평하지 않다. 안나는 인생에 단 한 번 불륜을 저질렀을 뿐인데, 레빈은 젊은 시절을 ‘난잡’하게 보냈다고 스스로의 입으로 키티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정도다. 그런데도 결과적으로 레빈의 죄는 용서받을지언정 안나의 죄는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어 기차 밑에 깔린다. 여성의 욕망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죄다.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Yes, but...

안나에게는 안나의 운명이 있다. 뮤지컬의 첫 장면에서 묘사된 기차 사고로 인한 죽음은 명확하게 안나의 파멸을 예고하는 장치다. 안나의 운명은 기차 바퀴 아래 몸을 던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불륜 때문이다. 

하지만 안나는 그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파국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물론 중간에 ‘도피’를 하긴 한다. 뮤지컬에서는 슬쩍 언급하고 지나가지만, 브론스키의 경마장 사고 이후 불륜을 만천하에 드러낸 안나는 더 이상 러시아 사교계에 머무를 수 없어 유럽으로 도피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안나는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그 모든 경험은 안나의 불안함을 증폭시킬 뿐이다. 점점 커지는 안나의 불안은 브론스키가 자신과 지내는 것을 무료해 한다는 사실과 그런 브론스키를 자신의 곁에 영원히 붙들어 놓을 수단인 결혼을 할 수가 없다는 ‘불륜’ 상태 때문이다. 

안나의 ‘불륜’은 책에서도 뮤지컬에서도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 치부된다. 이 불륜 상태를 깨끗이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이혼과 재혼이지만, 안나는 감히 이혼을 선택하지 못한다. 부부 사이에 아들인 세료자가 있기 때문이다. 세료자는 안나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가르쳐 준 인물이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연애'보다 평판을 더 신경 쓰는 인생을 살아왔던 안나는 자수성가한 관료인 나이 많은 카레닌과 사랑 없는 결혼을 했다. 고아였던 카레닌은 부유한 친척에게 키워졌고, 은혜라도 갚듯이 좋은 학벌과 관직을 차지해 나가지만, 안나와의 불륜이 회자되면서 승진의 길이 막힌다. 어찌 보면 안나는 카레닌의 인생 목표인 관직에서의 성공을 자신의 불륜으로 막아버린 셈이다. 

결국 안나는 카레닌에게 가장 잔인한 복수를 했다. 자신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대하지 않고 집안의 부속품처럼 여긴 것에 대한 복수. 그리고 세료자를 낳아 그에게 사랑을 퍼부으며, 처음으로 자신이 그런 대우를 받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인생에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안나는 <노라의 집>의 주인공 노라가 아니다. 노라는 자신의 인생을 위해 남편과 아이를 두고 가정을 뛰쳐 나갔지만, 안나는 아이를 두고 갈 수가 없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안나가 배운 사랑의 근본이 세료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떠날 수 없는 안나

거기에서 안나의 불행이 시작된다. 남편과 이혼하면 세료자를 볼 수가 없다. 안나는 남편을 혐오하면서도 세료자 때문에 이혼을 감행하지 못한다. 오죽하면 둘째인 딸을 바라보며 안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딸을 냉대할 정도다. 뮤지컬에서는 안나가 딸을 유산하여 병들어 누운 곳에 키티와 레빈이 방문하지만, 원작 소설에서 안나는 집으로 돌아가 딸을 낳으면서 사경을 헤맨다. 남편 카레닌은 그때야말로 자신의 도덕성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기회라 여긴다. 동시에 안나를 발 밑에 무릎 꿇릴 수 있다는 기쁨으로 카레닌은 관대하게 브론스키를 집 안에 들여 그의 딸을 보게 해줄 뿐만 아니라 정성으로 안나를 돌본다. 이를 통해 안나는 더 이상 나쁠 수 없을만치 오명을 뒤집어 쓴다. 그토록 관대한 남편을 결국 떠난 여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의 속셈을 꿰뚫어본 안나는 남편이 자신에게 관대할수록 더욱 더 남편을 혐오하며 그를 저주한다. 나중에는 남편 몰래 집에 와서 세료자와 재회한다. 세료자는 엄마가 죽었다는 말을 거듭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기다리다, 마침내 엄마를 만나 포동포동한 팔을 엄마의 목에 두르고 행복해 한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안나의 마음 속은 온통 '브론스키는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는가?' 하는 물음으로 가득하다. 안나는 브론스키의 마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가늠하려고 든다. 그러면 그럴수록 브론스키는 안나를 불행하게 만들 뿐. 안나는 마침내 브론스키와 카레닌을 동일시하게 되는데, 두 남자는 모두 그녀를 불행하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안나의 마음의 변화는 뮤지컬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마지막 몸을 던지는 순간의 안나의 마음이 '브론스키를 벌주겠다는 마음'이었다고 썼다. 몸을 던진 직후 안나는 후회한다. 그 후회는 너무 늦었다. 

어쩌면 안나의 내면은 자신의 장례식을 꿈꿨던 꼬마 니꼴라나 톰 소여 등, 십대 초반 아이들의 심리상태까지 밖에 성장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십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로 인생을 살았던 여성이, 결국에는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긴 남자를 단죄하기 위해 생명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이 운명. 어찌 그만의 운명을 지녔으니 됐다고 할 수 있을까.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Yes, but...

안나의 목표는 행복이다. 하지만 안나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브론스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안나도 그저 평이한 일상을 살며 세료자가 커가는 모습에 만족하다가, 평안하게 러시아 혁명 전에 수명을 다해 세상을 떠났을까?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브론스키는 안나가 지나온 인생에 대해 스스로 지니고 있었던 막연한 후회와 회한을 한 방에 끌어올려 준 계기였을 뿐이다. 안나가 사랑한 것은 어쩌면 브론스키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 

안나는 다른 사교계의 여인들처럼 내놓고 불륜을 하면서도 아니라고 딱 잡아떼지도 않는다. 그러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인형처럼 대해왔던 남편 카레닌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에 안나는 한 번 쯤 엿을 먹인다. 너무나 당당하게 브론스키에 대한 사랑을 공표하는 것으로. 

덕분에 뮤지컬에서 카레닌은 안나를 두고 ‘은혜를 모르는 것’이라며 이를 가는 노래를 부른다. 재밌는 것은 이 장면에서 안나를 욕하고 안나에게 상처 주는 법을 코치하는 인물로 벳시가 선택된 것이다. 벳시는 뮤지컬 중에서 아무 설명 없이 단지 사교계의 잔인함을 대표하는 인물로 설정됐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안나와 카레닌의 불륜을 돕는 카레닌의 사촌이다. 하지만 이 인물도 결국 패티의 오페라를 보러 가기 전날 안나에게 우회적인 절교를 선언해 오면서, 안나는 완전히 궁지에 몰린다. 

브론스키는 패티의 오페라를 보러 가겠다는 안나를 화를 내면서 말린다. 안나가 없을 때 브론스키는 안나를 사랑한다며, 자신이 안나를 슬프게 했다고, 아름다운 멜로디로 가슴 치는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안나 앞에 선 브론스키는 안나를 인생의 걸림돌로 느끼는 지친 연인일 뿐이다. 안나는 애당초 그 자신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고 한 것부터 단추를 잘못 채웠다. 다시 단추를 꿸 기회를 갖지 못한 채로, 안나의 마지막 옷자락은 결국 기차 바퀴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Yes

안나라는 캐릭터는 붕괴되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안나를 통해 인과응보를 드러낼 생각이었을 것이다. 

안나가 삶을 사랑했던가? 잘 모르겠다. 긴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 동안, 뮤지컬을 보는 동안, 영화를 보는 동안, 안나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책에는 단 한 번도 없었고, 뮤지컬 속에서는 ‘눈보라’를 부르며 한 번 정도 행복의 순간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에너지 또한 불안함 때문에 주어진 긴장인지 행복인지 알 수가 없다. 

너무나 슬프게도 안나의 인생은  행복과 거리가 멀다. 심지어 책에서도, 브론스키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조차도 안나는 이미 비참한 결과를 예상한다. 안나가 차라리 키티처럼 어려서 두번째 기회라도 잡게 되었다면 모를까. 애초에 안나 그 자신도 결국 서른도 되기 전에 인생을 끝내버린다. 

여성이 사회적 규범 안에서 허용되지 않는 욕망을 품을 때, 단죄는 처절하게 돌아온다. 극중에서 안나를 손가락질 하는 것은 여자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나쁜 것은 바람 피는 브론스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남성들의 사회다. 두 사람 다 바람 피는 당사자지만 브론스키는 귀족 회의에서 승승장구하며 인심을 얻고 안나는 매장당한다. 안나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안나는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브론스키를 증오하고 사랑하고 싸우고 용서하기를 거듭한다. 남편인 카레닌과의 사이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안나는 자신을 둘러싼 관계들을 면밀히 바라보면서, 귀족 사회에서 살아갈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칼날 위에 선 자신의 위치를 깨달아간다. 

안나는 붕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붕괴될 운명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안나는 단지 사랑 때문에 자신을 던지는 인물이 아니다. 비록 행복을 손에 쥐는 방법을 제대로 찾지 못했을지언정, 안나는 자기 자신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임을, 당당한 인간임을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No, but ...

안나의 결정 중에 가장 나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최초의 결정인 오빠 스티바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아들을 두고 모스코바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스티바는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다 또 들키고 키티의 큰 언니인 돌리에게 이혼당할 위기에 놓인다. 물론 돌리는 이혼할 생각은 없지만, 남편을 용서할 수도 없다. 스티바는 이 세상 유일한 자신의 편인 안나를 불러 아내를 설득해 줄 것을 간청하고, 안나는 돌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들어준다. 

돌리는 안나가 스티바의 편을 들 거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안나는 돌리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뒤 돌리에게 공감하며 같이 눈물을 흘려준다. 게다가 피곤하고 지친 돌리를 대신해 아이들을 자상하게 돌봐주기까지 한다. 안나와의 이러한 모습 덕분에 돌리는 마지막까지 심정적으로 안나의 지지자로 남는다. 심지어 자신도 상상 속의 불륜의 대상을 만나 남편인 바람둥이 스티바에게 치욕을 안겨준다는 대리 만족까지 느낀다. 

하지만 이렇게 안나를 모스코바로 불러 들이고, 브론스키를 소개해 주고, 심지어 레빈의 농장에 가서도 여러 하녀들을 희롱했던 스티바는 소설 속에서도 뮤지컬 속에서도 그저 '사람 좋은 스티바'일 뿐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고 사랑받는다. 그에게는 어떠한 단죄도 주어지지 않는다. 노래 가사처럼 이미지를 잘 만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남성이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어떻게도 대답할 길이 없다. 

남성 캐릭터들인 레빈이나 스티바가 연애와 아무 상관없이 그들의 진로를 결정하고 그 진로 안으로 여성들을 끌어들일 때, 주인공인 안나는 한결같이 브론스키의 결정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안나가 할 수 있는 결정은 어떤 옷을 입을 것인지, 그리고 누구를 끌어들여 자신을 보호할 것인지 정도다. ‘큰 결정’은 결국 브론스키에게 달려 있고, 브론스키는 그런 안나를 두고 정치를 하겠다며 집을 비워버린다. 

연애 말고 안나를 속박하는 것은 없다. 안나는 자신의 생을 걸고 브론스키와 연애를 시작했다. 비참한 결과가 있으리라고도 예상했다. 다만 얼마나 비참할지 몰랐을 뿐.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No

안타깝게도 안나의 발전은 남편을 떠나는 데서 멈춘다. 그 이후에는 다시 후퇴하기 시작한다. 원작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브론스키에게 매달리는 안나의 내면에 휘둘리다가, 레빈의 파트가 시작되면 안정을 얻든가, 또는 안나의 이야기가 멎는 것에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뮤지컬은 키티와 안나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립점을 이루지 못한다. 키티는 순수함의 상징처럼 그려지지만, 실제로 뮤지컬 속에서는 레빈과 다시 만나자마자 유리창에 두음 맞추기를 하며 사랑에 빠지더니, 이내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는 안나를 보호하는 인물로 설정된다. 결국 키티는 처음에는 안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겼지만 나중에는 안나를 이해하고 보호하려는 관대한 인물이 된다. 실제 소설에는 없는 설정을 통해 안나의 비참함을 더욱 확대하려는 의도겠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카레닌이 안나에게 했던 야비한 도덕심의 발로와 결과적으로 똑같은 양상을 보인다. 

소설 속의 안나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해석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만, 뮤지컬 속의 안나는 모든 솔로 노래를 사랑에 바치고, 마지막 죽음 앞에서조차 매우 짧은 심경만을 남긴 채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다. 뮤지컬 속의 안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사랑을 했다
내 것이 아니었던
나의 삶을

일러스트 이민

초연 당시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은 안나가 아니라 남편 카레닌인 듯이 보였다. 재연 때는 카레닌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안나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레빈이 주인공이 되어 모든 행복을 거머쥔 마지막 승자인 듯이 보인다. 

작품의 제목이 <안나 카레니나>라면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기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초지일관 안나의 내면은 철없이 사랑이나 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그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은 안나가 얼마나 철이 없는지를 욕하거나 행복한 결혼생활로 증명할 뿐이다. 소설 속에 남겨진 그 수많은 안나의 독백 중에 가사로 가져다 쓸 것이 이토록이나 없었던가 싶다. 

여성이 주인공인 극을 만들 때, 왜 이토록 주인공에게 야박한 것일까? 주인공의 내면에 귀 기울이기 보다 그들을 판단하려고 드는 건 왜일까? 여성은 주인공이 되어서도 여전히 주인공으로서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니라 재판정에 서 있다. 

이응님의 글은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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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S

뮤지컬 속 여성

01

2019년 첫째 주, 마리 퀴리

02

2019년 둘째 주, 엘리자벳 폰 비텔스바흐

03

2019년 셋째 주, 오목

04

2019년 넷째 주, 클레어

05

2019년 다섯째 주, 알렉산드라 오웬스

06

2019년 일곱째 주, 그레첸

07

2019년 여덟째 주, 제루샤 '주디' 애봇

08

2019년 아홉째 주, 메리 포핀스

09

2019년 열번째 주, 핑크 레이디

10

2019년 열한번째 주,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11

2019년 열두번째 주, 아랑

12

2019년 열세번째 주, 샬롯 드 베르니에

13

2019년 열네번째 주, 나팔, 혜란, 이은숙

14

2019년 열다섯번째 주, 에바 호프

15

2019년 열여섯번째 주, 1976 할란카운티의 여성들

16

2019년 열일곱번째 주, 앤 보니, 메리 리드

17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1) 마법에 걸린 사랑

18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2) 바그다드 카페

19

2019년 스물한번째 주, 빨래

20

2019년 스물두번째 주, 자스민

21

2019년 스물세번째 주, 심청

22

2019년 스물네번째 주 안나 아르카지예브나 카레니나

현재 글
23

2019년 스물다섯번째 주, 조왕, 덕춘

24

2019년 스물여섯번째 주, 테레즈 라캥

25

2019년 스물일곱번째 주, 음악극 <섬>

26

2019년 스물여덟번째 주, 기네비어와 모르가나

27

2019년 스물아홉번째 주, 허초희

28

2019년 서른번째 주, 강향란, 차순화

29

2019년 서른한번째 주, 진

30

2019년 서른두번째 주, 개비, 바비, 도나, 울리

31

2019년 서른세번째 주, 록산

32

2019년 서른네번째 주, 옹녀

33

2019년 서른다섯번째 주, 엠마 커루

34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3) 갓 헬프 더 걸

35

2019년 서른여섯번째 주, 마리 앙투와네트

36

2019년 서른일곱번째 주, 베스

37

2019년 서른여덟번째 주, 그 여자

38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4) 호커스 포커스

39

2019년 마흔세번째 주, 루미 헌터

40

2019년 마흔다섯번째 주, 아드리아나와 엘로이즈

41

2019년 마흔여섯번째 주, 레베카 드 윈터스

42

2019년 마흔일곱번째 주, 아이다

43

2019년 마지막 주, 암네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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