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레베카>
“어젯밤, 나는 다시 맨덜리로 돌아간 꿈을 꾸었다”는 첫 문장으로도 유명한 다프니 뒤 모리에가 쓴 소설 <레베카> 는 오랫동안 꽤 많은 뮤지컬 창작자들이 탐내던 소재 가운데 하나였다. 1938년, 2차 세계대전의 어두운 전조 속에서 출판하자마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던 소설이다. 영국에서 활동했던 영화감독 히치콕은 자신의 첫 헐리우드 입성작으로 이 작품을 선택해 1940년에 개봉하여 크게 성공했다. <레베카>는 알프레드 히치콕에게 유일한 오스카상 감독상을 선사한 작품이 되었다. 히치콕은 이야기의 결말을 헐리우드의 특성에 따라 완벽하게 닫힌 해피앤딩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 사실에 만족하지 못했다. 실제 소설의 결말에는 행복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훨씬 더 사실적인 결말이겠지만, 영화가 유명해진 이후 뮤지컬도 영화의 결말을 따른다.
소설을 볼 때나, 영화를 볼 때, 뮤지컬을 볼 때에도 항상 가장 궁금한 사람은 한 번도 출연하지 않는 레베카 드 윈터스라는 인물이다. 그는 정말로 악의 화신이자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유령이 되어 안개처럼 드 윈터스의 집안에 스며있는 인물일까?
줄거리
‘나’는 이십대 초반으로, 여학교를 졸업하고 부자 미국인 부인의 말동무 겸 비서로 휴양지인 몬테 카를로에 와 있다. 말이 좋아 비서지 하녀와 다름없이 취급 받으며 기죽은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막심 드 윈터스라는 42살의 유명한 귀족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 뒤 그와 함께 그의 고향 콘월로 돌아온다. 분홍빛 신혼을 꿈꿨지만 그곳에서 ‘나’를 기다린 것은 전 아내인 레베카의 어두운 그림자와 레베카를 숭배하는 가정부 댄버스 부인이다.‘나’는 막심의 누나의 미묘한 환영을 받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신과 죽은 전 아내 레베카를 비교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특히나 댄버스 부인은 대놓고 레베카를 칭송하더니 마침내는 ‘나’의 중요한 파티에 레베카가 일년 전에 입은 것과 똑같은 옷을 입혀 내보내 막심의 분노와 망신을 사게 만든다. 막심이 여전히 레베카를 못 잊고 자신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절망한 ‘나’에게 댄버스 부인은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라고 종용하고 홀린 듯이 거의 뛰어내리기 직전, 바다에서 올라온 폭죽에 정신을 차리고 달려나가자 죽은 레베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편인 막심에게 레베카를 사랑하는 건 알지만 옆에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나’에게 막심은 울화통을 터트리며 레베카의 죽음에 자신이 책임이 있음을 고백하고 레베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막심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은 ‘나’는 막심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레베카의 죽음을 두고 공판이 열리고 막심은 레베카가 자살했다고 주장한다. 레베카의 내연남이었던 파벨은 레베카가가 얼마나 인생을 사랑했는데 그럴 리가 없다며 막심의 살해를 주장하는데, 그 과정에서 레베카의 주치의에 의해 레베카가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었음이 밝혀진다. 레베카가 자신마저 속였음을 깨달은 댄버스 부인이 맨덜리 저택을 불태우고, 불탄 집에서 다리를 절며 도망쳐 나온 막심과 ‘나’는 레베카 그 자신과도 같던 집이 불타버린 것을 차라리 후련하게 여기며 그들만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작품은 백델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 우선 이 모든 사건의 화자인 ‘나’에게는 이름도 배경도 없다. 게다가 뮤지컬 안에서 ‘나’가 대화하는 막심의 누나 베아트리체와 댄버스 부인, 나의 고용주였던 반 호퍼 부인과의 대화는 막심을 만나기 전이든 만난 후든 결국은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레베카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백델테스트를 통과한다. 레베카와 댄버스의 대화에서 막심은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레베카를 입에 올리지만, 일단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레베카를 죽도록 사랑했던 댄버스 부인과 레베카를 죽이도록 미워했던 그의 남편 막심의 입을 통해서다. 두 사람이 말하는 레베카는 양 극단을 달리는 인물이지만 그가 엄청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에서는 이견이 없다.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Yes
레베카의 운명은 다른 누구와도 얽히지 않는다. 레베카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게 무언가 하나를 속이는 인물이다. 레베카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레베카 그 자신이다. 때문에 그의 정부였던 파벨도, 남편이었던 막심도, 레베카를 어릴 때부터 봐오며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주고 바치며 사랑했던 댄버스 부인도 레베카의 전부를 알지는 못했다.
레베카는 자신의 비밀을 두고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고, 아름답고 화려했다고 일컬어지는 외모와 사교적이고 활달했던 성격으로 콘월의 맨덜리 성으로 런던의 사교계 인물들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소설에 따르면 사실상 콘월의 맨덜리를 유명하게 만든 인물이 바로 레베카다. 레베카는 맨덜리 저택을 사람으로 치면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장식하고 다듬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썼다.
안타까운 것은 이제 막 시작된 즐거운 삶이 병으로 인해 급격히 시들어갔다는 데 있다. 레베카는 병을 이길 꿈을 꾸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또 다른 영원을 계획한다. 레베카는 죽음마저도 막을 수 없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가득 찬 인물이다. 레베카는 자신이 살던 집을 떠나 자신이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기 위해 가부장제에 철저하게 매이고 세간의 눈을 신경 쓰는 막심이라는 남자를 자신의 남편으로 선택한다. 법적으로 일단 부부의 연을 맺자마자 막심에게 ‘쇼윈도우 부부’로 살 것을 거침없이 제안하며, 그 제안을 막심이 실제로 받아들이든지 말든지는 레베카의 관심 밖이다. 레베카는 유명해지고 싶고 더 아름다워지고 싶으며 더 많은 애정을 갈구하고 한 번도 그 애정을 얻는 데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죽음마저도 그 스스로의 계획대로 이루어낸다.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No, but...
레베카가 어째서 그토록 자신의 진심을 철저하게 숨기면서도 타인의 애정을 갈구하고 그 애정을 식량처럼 먹어치우는 인물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댄버스 부인도 알려주지 않는다. 레베카의 전사는 화자인 ‘나’만큼이나 불투명한 막 너머에 있다. 한 번도 누군가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수줍고 기가 죽은 나날을 보내온 ‘나’와 달리 댄버스 부인의 말에 의하면 레베카는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외모와 강렬한 삶의 욕구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베카의 삶에서 즐거움이나 육체적인 욕망이 그의 삶의 목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그것이 목표였고 부잣집 마나님이 되어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면, 레베카가 자신의 내면을 철저하게 사람들에게 감춰온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어쩌면 레베카는 정말로 ‘노는’ 것이 제일 좋은, 내면이 전혀 성장하지 않은 열 살같은 여성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놀이’가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인생의 마지막 게임을 벌려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레베카 그 자신도,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모양의 시체로 발견될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레베카의 신비로운 측면은 레베카에게 다른 어떤 목표가 있었다고 짐작하게 하지만, 실제로 이 작품에서는 알기 어렵다. 레베카의 숭배자 댄버스 부인과 레베카를 극단적으로 증오하는 막심의 이야기만으로는 그렇다.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Yes
막심이 들려주는 레베카는 당돌하기 짝이 없는 여성이다. 영국의 여성들은 아무리 귀족이라도 재산을 물려받을 길이 없었다. 만약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가문의 돌봄이 없다면 그야말로 한 푼도 없는 가난뱅이가 되어 길로 나 앉아야만 하는 신세였다. 많은 귀족 가문의 딸들이 그러한 경로를 통해 다른 귀족 가문이나 브루주아 가정의 ‘가정교사’가 되어 생계를 꾸려나가곤 했다.
그러나 레베카는 귀족들의 ‘허례’를 역공한다. 막심이라는 이 식물성의 귀족 남자에게 가문의 명예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그의 명예와 자신의 욕망을 거래한다. 막심은 대체 얼마나 자신감이 없는 남성이기에 가문의 영광을 빼면 시체와도 같은 인물이 되어버렸을까? 그런 그의 심연까지 꿰뚫어본 레베카가 막심보다 몇 년 늦게 태어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저 아름다고 사랑스러워 보였던 자신의 아내인 레베카가 어느 순간 자신이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머리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딘가 다른 사람으로 쑤욱 자라버렸을 때, 막심은 아내를 ‘감당’할 수가 없게 된다. 사실 레베카에게 가장 행복한 결말은 자신의 욕망에 걸맞는 대상을 만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런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던가? 그러한 인간은 거울 속에서만 존재했다고 댄버스 부인과 막심은 얘기한다. 그런 면에서 그들의 입에서 들을 수 있는 레베카의 성격은 초지일관 맹렬하다. 어쩌면 레베카는 거울 속의 자신의 인생의 몫까지 두 배를 사느라 생을 그토록 빨리 소진한 것일까?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Yes
댄버스 부인의 말에 따르면 레베카에게 있어서 연애란 그저 게임의 일종일 뿐이다. 그리고 사실은 댄버스 부인 그 자신조차도 게임 속의 인물이었다. 댄버스 부인은 어린 시절부터 레베카의 곁에서 레베카의 성장을 모두 지켜보며 그가 지닌 모든 비밀까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자신의 존재가치로 여긴 인물이다. 하지만 극이 마지막으로 치닫는 동안 댄버스가 깨닫는 것은 자신 역시도 파벨이나 막심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장기말 중의 하나였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댄버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베카에 대한 연정을 못 놓고 레베카 그 자신과도 같은 맨덜리 성을 불태우며 누구와도 레베카를 나누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불을 지르든지, 자신마저 속인 레베카에 대한 서운함이 광기의 극단을 불러 일으켜 불을 지르든지, 그의 레베카에 대한 소유욕은 어떻게 해도 충족되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댄버스 부인이 사망하지도 않고 불을 지른 당사자인지 아닌지도 흐지부지하게 되어 사라진다고 나오지만, 그 화재를 통해서 댄버스 부인은 자신의 방식으로 레베카를 소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댄버스 부인을 밀어부친 인물이 바로 레베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레베카의 지배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레베카에 대한 댄버스 부인과 막심의 묘사가 사실에는 못 미쳤음을 댄버스 부인의 방화가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Yes, but ...
레베카는 발전한다. 그는 막심의 대사를 보면 어리고 아름답고 순진한 줄 알았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돌변한다. 막심은 자신이 레베카에게 속았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레베카의 내면이 마치 파충류가 껍질을 갈아치우며 쑥쑥 성장하듯 자라났을 수도 있다. 물론 그 방향은 결코 막심의 입장에서 보자면 도덕적인 방식이 아니다. 막심은 레베카가 자신만을 사랑해주기를 기대하며 결혼을 했겠지만 당시의 귀족들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결혼의 조건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레베카는 아마도 자신의 부모에게서 그 모든 것을 목격하며 자랐을 터였다. 레베카가 이 세상에서 바랐던 애정은 숭배였지 자신을 속박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자신을 레베카는 숨기지도 않고 키워가며 궁극적으로는 타인의 마음까지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댄버스 부인의 묘사를 들어보면 레베카는 댄버스 부인의 품 안에서만 눈물을 흘리고 웃고 인생의 아름다움과 열정을 토로하는 사람이었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존재였지만 자신의 품 안에서는 잠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댄버스 부인은 믿었다. 그리고 레베카는 모두의 상상을 뛰어넘으며 극을 조종하는 깊은 심연이자 짙은 안개가 된다.
레베카와 나의 인생
이 작품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은 레베카가 아니라 막심이다. 막심은 귀족이자 영주로서 극 안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자다. 레베카가 원한 것은 그 권력을 자신의 발 밑에 두는 것이었다. 막심이 견디지 못한 지점이 바로 그 지점이다. 자신의 권력을 타인이 더 강렬하게 휘두른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권력은 그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가문이라는 배경 없이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저항할 방도가 없다는 것.
마침내 레베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되찾으려는 시도일 뿐이다. 사랑을 배신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레베카는 막심이라는 인물의 소심함과 그 내면에 있는 폭력성을 꿰뚫어 보았다.
반면에 ‘나’는 철저하게 레베카와는 반대의 길을 걷는다. ‘나’는 자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인 남편이 자신보다 전 아내인 레베카를 더 사랑한다는 의심과 질투 때문에 점점 더 우매한 인물로 변해가며 댄버스의 껍데기를 쓴 레베카에게 휘둘린다. 그러나 ‘나’가 정신을 차리고 강해지는 이유는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며 자신을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이다. 심지어 그 순간은 남편이 레베카를 살해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한 직후지만, 살해는 ‘나’의 귀에 들려오지 않는다. 레베카를 사랑한 적 없고 증오했었으며 ‘나’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면 충분했다. 맨덜리 저택에 돌아온 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애정을 보여준 적 없던 막심이 레베카의 시체가 발견된 그 순간 사랑을 고백하고 레베카에 대한 증오를 거친 언어로 쏟아내는 것은 결국 그가 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복종이며, 복종하지 않는 아내의 종말은 처참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복종을 택한다. 막심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쓸모에서 비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와 자존심을 회복하는 ‘나’는 여전히 반 호퍼 부인의 하녀와도 같은 위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애당초 왜 막심이 그토록 어리고 수줍어하며 자신감이라고는 없던 ‘나’를 선택했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첫 결혼에서는 레베카가 성공했다면 두번째 결혼의 승자는 막심이다. 막심이 말하는 레베카의 모든 악행은 결국 ‘그 여자는 죽을만한 짓을 했다’는 너무나 흔한 그 말, 가해자의 언어다. 게다가 레베카가 심각한 암에 걸렸었다는 이유로, 레베카가 스스로의 죽음을 계획했을 거라는 이유로 막심의 살해는 정당화된다. 살인자가 고백하는 ‘우연한 사고’로 인한 살인이 하필이면 레베카의 시체가 떠오른 다음에야 고백하는 그 완벽한 타이밍까지. 그리고 ‘나’는 그러한 남편의 편에 굳게 서기로 결심한다.
"물론 너는 그 사람이 너하고 결혼하는 까닭을 알고 있지? 그 사람이 너를 사랑한다는 생각 따위를 하여 우쭐해선 못 써. 넌 아무것도 아니야!“
‘나’의 고용주였던 반 호퍼 부인은 귀족의 아내가 된 ‘나’를 질투하고 화내며 외치는데, 사실 반 호퍼 부인이 말한 것은 대부분 맞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하녀’다. 뼛속 깊이 피고용인으로서의 삶을 산다. ‘나’를 보며 서글픈 것은 그 때문이다. 그나마 뮤지컬에서 ‘나’는 막심의 사랑을 얻고 맨덜리 저택의 악몽에서 벗어나며 그들만의 해피엔딩을 누린다.
그런데, 정말로 이름도 성도 없는 ‘나’의 삶에서 레베카는 맨덜리 성과 함께 재가 되어 날아갔을까? 그럴 수 있다면 제목이 레베카였을까. 깊고 힘있는 필체로 쓰여진 살짝 기울어진 대문자 R의 각인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여전히 ‘나’를 맨덜리로 이끌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