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34. 비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34. 비

이응

뮤지컬 <Something Rotten!> 


초연 2015년, St. James Theatre, NYC

대본 Karey Kirkpatrick, John O'Farrell
작곡 Wayne Kirkpatrick, Karey Kirkpatrick
작사 Wayne Kirkpatrick, Karey Kirkpatrick
연출 Casey Nicholaw
안무 Casey Nicholaw Associate
무대디자인 Scott Pask
의상디자인 Gregg Barnes
조명디자인 Jeff Croiter
수상 2015년 토니상, 남우 조연상(셰익스피어 역 : Christian Borle)

 

셰익스피어는 죽은 지 사백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공연계의 아이돌이다. 단지 연극만이 아니다. 오페라, 연극, 영화, 발레, 뮤지컬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온 지구가 셰익스피어 때문에 끙끙 앓는다. 그의 작품이 주는 매력은 하루 하루 더 큰 숙제와 인기를 동시에 안긴다. 작품이 성공하면 셰익스피어의 원작 덕분이고, 실패하면 재해석에 실패한 현대‘것’들의 잘못이다. 

셰익스피어에 대해선 많은 가십이 난무한다. 셰익스피어는 한 사람이 아니다, 셰익스피어는 여자다, 셰익스피어는 이름만 빌려줬다, 셰익스피어는 동시대에 살았던 귀족 사상가다 등등. 여기 또 하나의 셰익스피어를 빙자한 어마무시한 코미디가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셰익스피어를 당대의 연극계의 아이돌 같은 존재로 그려놨다. 그럴 리가 없다, 저게 어떻게 말이 되느냐 하는 질문 같은 걸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밑도 끝도 없는 패러디로 인한 웃음의 향연 속에서도 주인공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고 주린 배에서는 눈치도 없이 꼬르륵 소리가 난다.

줄거리

주인공 닉 바텀은 성부터 이미 밑바닥이다. 그는 셰익스피어 같은 잘 나가는 극작가가 되고 싶지만 그의 극장은 파리만 날린다. 그나마 그의 작품을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동생인 나이젤 바텀의 머리에서 나온다. 하지만 나이젤은 지나치게 소네트만 좋아하고 쓰잘데기 없이 철학적이고 진지하다. 그의 아내 비는 남편이 연극하는 걸 말리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꼼꼼하게 없는 살림을 야무지게 꾸려 나간다. 

매번 망하는 공연만 올리는 데 지친 닉은 마침내 세기의 대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를 찾아가는데, 아뿔싸! 이 예언가는 그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사촌의 육촌 정도 되는 먼 친척이라 미래가 보이긴 보이는데 흐릿하게 보인다. 게다가 보이는 게 얼마나 먼 미래인지를 가늠할 능력도 없다. 그런 그에게 돈을 쥐어주며 미래에 성공할 공연이 뭔지 말해달라고 하자 예언가는 뮤지컬이라고 외친다. 

삼백년은 이른 예언에 실망한 그는 이번에는 아내가 절대 손대지 못하게 한 돈까지 몰래 들고 와서 투자한다. 이번 질문은 구체적이다. 셰익스피어의 다음 히트작은 무엇인가? 그러자 이 흐릿한 예연자는 ‘음릿’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낸다. 자신이 아는 것 안에서 단어를 조합하는 능력 뿐인 닉 바텀은 그게 오믈렛이라고 성급히 결론을 내리고 ‘데니쉬(덴마크)’를 빵으로 결론내린 뒤 인기를 얻을 방편으로 노래를 붙인다. 정말로 뮤지컬을 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장렬하게 말아먹는다. 문제는 이 뮤지컬 ‘오믈렛’을 제작하기 위해 유태인 샤일록의 돈을 빌려쓴 것. 그 당시 유태인은 공연 제작비를 대지 못하는 게 법이었기 때문에 닉과 나이젤은 머리가 날아갈 처지가 되는데, 그의 아내 비는 마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포샤처럼 남장을 하고 법정에 들어와 셰익스피어의 지원을 끌어내고 남편을 풀어준다. 아니, 풀어준다기보다는 신대륙으로 추방당하는 길을 선택한다. 이들은 신대륙으로 향하며 진짜 뮤지컬을 흥행시킬 꿈에 부풀어 오른다.

큰 일은 여자가 한다

닉 바텀의 아내 비는 아주 오묘한 인물이다. 아니 미묘하다고 해야 할까? 비는 거의 모든 면에서 남편인 닉 바텀보다 낫다. 두 인간을 같은 선상에 두고 누가 더 낫다고 비교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이 있을까? 사람을 비교해선 안 된다는 말은 제 1의 도덕률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 두 등장인물 간에는 이 저울질이 성립된다. 왜냐하면 이 저울질을 끊임없이 하는 인물이 바로 남편인 닉 바텀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와 협상하는 비

닉 바텀이 그렇게 원한다면 비교를 해줄 수는 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닉은 비를 저울에 올릴 생각조차 없는 인물이다. 형과 아우 사이인 웨인과 카레이 커크페트릭의 이 배꼽 빠지는 코미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인들은 남자와 한 눈에 사랑에 빠져 아버지도 유산도 나 몰라라 도주하는 인물이거나 그저 셰익스피어를 따라다니며 꺄악 소리를 지르고 샴페인 잔을 들고 기절하는 여인들이다. 유머는 남자가 하고 여자는 꽃이나 흔드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인기인을 보면 흥분해서 기절하는 여인들을 뚫고 비가 등장한다. 비는 매우 현실적인 인물이다. 남편인 닉에게 화가 날 때조차도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물론 이 노력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간다. 화를 낼 사람은 비지만 항상 더 화를 내고 집을 쿵쿵 나가버리는 것은 밑바닥 인생 닉 바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애정전선은 이상이 없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재능 없는 닉 바텀에 비해 시도 곧잘 쓰고 희곡 클래스에서 꽤 좋은 작품을 내밀고 있는 나이젤은 셰익스피어의 스텝으로 스카웃 당할 뻔하기도 하지만 결국 형의 옆에 남는다. 이 작품 안에서 패러디 되는 세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로미오와 줄리엣, 베니스의 상인, 햄릿 등 다양하다. 나이젤은 부자 청교도인 예레미아의 딸인 포샤와 사랑에 빠지고, 닉의 아내 비는 남장을 하고 재판정에 나아가 샤일록의 투자금을 받은 남편을 변호하는 등, 얽히고 설킨 것 같지만 미묘하게 말 되는 이야기들이 정신없이 진행된다. 

그 와중에 남편이 마지막 보루인 비상금마저 빼가서 희미하게 보이는 예언자에게 돈을 갖다 바치자, 비는 남편 대신 막노동에 나서는데 그 일은 바로 곰잡이다. 비는 남자 옷을 입고 남자 수염을 붙이고 남자들 사이에서 신망을 수월하게 얻어낸다. 비록 사백년 전이지만 비는 ‘남자 못지않게’ 자신의 몫을 초과해서 달성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다. 비는 남자가 아니기에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토록 영민하고,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을 단박에 구별할 줄 아는 식견을 지니고 있고, 곰도 한 손에 때려잡는 비는 자신의 모든 재능을 재능 없는 남편 닉 바텀을 돕고 구해내고 그와 함께 떠나는 데 쓴다. 근거는 사랑이다.

작품 속에 존재하지 않는 비의 신대륙

그래서 처음에는 비를 두고 미묘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비의 수많은 행동들이 남자와 동등하거나 더 나은 결과를 냈다 하더라도, 비의 내면에서는 그 행동들이 ‘남자 못지않은’ 행동의 바운더리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마치 유럽의 낡은 질서 속에서 아무리 남자 옷을 입어도 여성이라는 내면을 감추지 못한다는 작가들의 마인드처럼. 하지만 비는 마지막 노래에 참여하면서 뭔가 좀 달라보인다. 유럽인들의 눈에는 신대륙이었던 아메리카로 떠나면서 비는 남편보다 훨씬 더 설렌다. 그곳에는 계급이 없기 때문이다. 

비는 남편이 바보짓을 하고 일을 키울수록 더욱 더 단단하고 근사한 인물로 변해가는데, 이는 셰익스피어가 은근히 자신의 작품 속에 깔아 놓은 단단한 여성들의 영향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비는 다른 인물들처럼 글래머의 머리 나쁜 여성으로 스쳐 지나가 버렸을 게 틀림없다. 비는 셰익스피어가 남겨 주고 간 좋은 여성 인물들의 엑기스를 쪽 빨아마신 뒤 그것을 체화한 캐릭터다. 

그럼에도 비는 자신이 아닌 남편을 위해서 이 모든 훌륭한 행동들을 하고, 남편과의 동고동락을 택한다. 미국에서 이들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지만, 극 전체의 전개를 볼 때 미국에서도 여전히 비는 남편을 건사하며 아이들에게 아버지를 하늘이라고 가르치는 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비는 무대 위에서 그토록 빛이 나지만, 빛이 난다고 다 금이 아니다. 그 모든 빛이 자신이 아닌 남편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비라는 인물 역시 남편의 운명에 끌려가는 인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은 작품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 너머, 열린 결말 속에 비의 미래가 있다. 새로운 대륙이 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뮤지컬 씨어터에서 일하게 됐다고 환하게 웃는 비, 나아가 극장 사업에까지 뛰어든 비를 상상하고 싶다. 비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아주 작은 한 발짝을 떼기가 이토록 어렵다. 그토록 큰 일을 다 해치우고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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