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20. 루스 셔우드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20. 루스 셔우드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뮤지컬 <Wonderful Town>

초연 1995, Winter Garden Theatre, New York
대본 Joseph A. Fields, Jerome Chodorov
가사 Betty Comden, Adolph Green
작곡 Leonard Bernstein
원작 "My Sister Eileen" by Joseph A. Fields, Jerome Chodorov
연출 George Abbott
안무 Donald Saddler
무대디자인 Raoul Pène Du Bois
수상 토니상 뮤지컬 작품상, 여우주연상(Rosalind Russell), 무대디자인상, 안무상, 음악감독상

2003년 리바이벌 공연 포스터

 로맨틱 코미디의 수명이 깔딱 깔딱 넘어가네 마네 할 즈음이던 2003년, 케이트 허드슨과 매튜 맥커너히가 열흘 안에 서로를 차고, 붙잡아야 하는 내기에 걸려들었다가 결국 정말 사랑에 빠지는 영화 <열흘 만에 남자에게 차이는 법How to Lose a Guy in 10 Days>이 개봉했었다. 로맨틱 코미디의 열풍을 되살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꽤 신선했던 전개 덕분에 흥행에 성공했었다. 로맨틱 코미디만큼 진부하다 욕먹으면서도 재미진 장르도 없겠지만, 이 작품은 제목부터 오래 전부터 유명했던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의 유명 넘버를 살짝 변형한 것이다. 바로 1953년에 개막한 <Wonderful Town>의 주인공 루스 셔우드가 부른 노래 "One Hundred Easy Ways to Lose a Man" 이다. 루스 셔우드는 남자에게 쉽게 차일 수 있는 법을 백 가지나 소개해 준다. 그것도 1953년에.

배경은 1935년, 경제대공황으로부터 벗어나던 시기의 뉴욕. 오하이오의 컬럼버스를 처음으로 떠나온 자매 루스와 에일린은 각각 작가와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뉴욕에 도착한다. 이후 1막과 2막 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겪는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뉴욕에서의 좌충우돌 끝에 루스는 일자리와 연인을 찾고, 에일린은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가운데 자신이 사실은 무대공포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말부에서 에일린은 개중 자신이 마음에 들어 했던 사람과 언니가 연인이 된 모습을 지켜보며 축하해준다. 이 사이에는 수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해 자매에게 사기를 치고, 유혹을 하고, 캣콜링으로 공포감을 조성하고, 노처녀 글쟁이라고 비하하고, 이웃이 되어 손을 내밀고, 말다툼을 벌이고, 함께 콩가를 추고, 감옥에 갔다가 어이없는 인종에 대한 편견으로 구애를 받고, 혐의를 덮어쓰고 취소하는 등이 다 각각 다른 인물들과 얽히면서 일어난다. 그리고 대사보다 가사가 많은 최근의 뮤지컬에 비해 대사량이 현저하게 많다. 노래는 하나의 상황, 하나의 감정적인 정서만을 표현하는 넘버가 주를 이룬다. 때문에 상황은 훨씬 더 연극적이고 복잡하며 꽤 많은 복선이 깔린 뒤 수습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 작품의 원작은 <내 동생 에일린>이라는 희곡으로, 실제 루스 맥케니라는 작가와 동생의 뉴욕 정착기를 기반으로 한 내용이다. 루스 맥케니는 작가 지망생인 자신의 시각에서 아름다운 여동생의 좌충우돌 연애기와 연예계 도전기를 그렸다. 희곡은 루스보다는 에일린의 좌충우돌 연애담 중심이었다. 하지만 뮤지컬로 제작되었을 때는 희곡을 쓴 원작자들에 더불어 작사가로 배티 캠든과 아돌프 그린이 참여하면서 중심이 화자였던 루스로 넘어갔다. 제목도 번스타인의 브로드웨이 첫 데뷔 뮤지컬이었던 <On the Town>의 속편이기라도 한 듯이 <Wonderful Town> 으로 변경되어 일련의 뉴욕 시리즈가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 뉴욕 시리즈는 <West Side Story> 로 완결된다. 

경쟁하지 않고 협력하는 여성들

Donna Murphy (왼쪽, 루스) Jennifer Westfeldt(오른쪽, 에일린) 2003년 리바이벌 공연 Photo by Paul Kolnick

이 작품 속의 루스는 전형적인 듯 보이면서도 전형적이지 않다. 도시로 향한 작가 지망생이라는 점에서 한 세기 전에 발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던 루이자 올콧의 <작은 아씨들>의 주인공 조세핀 마치를 연상시키고 에일린은 에이미를 연상케 한다. 주인공인 루스는 작사가인 베티 컴든 그 자신이기도 했다. 아니 배티 컴든은 루스이자 에일린이었다. 배우였다가 작가로 전향한 사람이었고,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안고 뉴욕에 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브루클린 출신의 뉴요커였다. 배티 컴든이 참여한 덕분에 루스와 에일린은 전형적인 라이벌 구도의 자매에서 벗어난다. 배티 컴든이 작가로 참여했던 작품들은 대부분 뉴욕이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다. 그러다보니 남성의 숫자만큼 여성들이 등장하고 사랑의 경쟁자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어느 여성도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료로서 서로를 격려해주는 양상을 보인다. 남성 등장인물들이 여성 등장인물을 두고 결투를 벌일지언정 여성 등장인물들이 사랑을 두고 음모를 꾸미거나 서로를 배척하는 법이 없다.

이 평화로운 배티 컴든의 자매애로 가득찬 세계 속에서 루스와 에일린 역시 조세핀과 에이미처럼 한 인물에게 마음이 끌린다. 잡지사의 에디터인 로버트 베이커는 마치 조에게 베어씨가 조언했듯이 ‘그럴싸해 보이는 이야기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쓰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루스는 정말로 그럴싸해 보이는 사건에 휘말리는데, 에일린과 단 둘이 있고 싶었던 마트 점원이 브루클린에서 해군들이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 루스와 에일린이 마음을 준 듯한 로버트를 한 방에 보내버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작은 질문에서 시작했던 해군 인터뷰는 이내 엄청난 소동이 되고, 그들이 루스를 줄줄 따라오게 된다. 결국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이들은 에일린과 마주치고, 해군들은 아름다운 에일린을 서로 차지하려고 난동을 피우며 춤을 추는 사태 끝에 에일린이 그들과 함께 유치장에 들어가게 된다. 지역신문 모퉁이에 작게 날만한 이 스캔들로 루스는 작은 이야기를 써서 로버트의 상사인 편집장에게 보여주지만 그는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원고를 던져 버린다. 그런 상사에게 대들다 로버트도 직장에서 잘리고 말자, 에일린은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겠냐며 두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이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자신의 첫 무대 직전에 에일린이 깨달은 것은 자신에게 무대공포증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에일린은 무대 대신 클럽에 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 아는 모든 사람을 불러모아 노래를 부른다.

남자에게 차이는 100가지 방법

1953년도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로잘린드 러셀(루스 역)

두 자매는 처음 뉴욕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조금씩 서로에게 화가 날 만한 상황이 닥치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성격이 극단적으로 다른 두 사람이지만 다름을 완벽하게 감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와중에 관객은 <작은 아씨들>을 읽을 때 조에게 사랑에 빠지는 속도로 루스와 사랑에 빠진다. 루스는 너무나 매력적이라 근처에 있다면 반드시 친구로 삼고 싶은 그런 인물이다. 특히나 루스가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에 이른바 ‘맨스플레인’에 대해 설명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남자가 야구경기장에 데려가면 무릎을 얌전히 붙이고 앉아
‘다음 타자는 번트를 칠거야, 두고 보라고!’
그가 말해
‘어머 번트가 뭐에요?’
라고 얌전하게 묻는 대신
’너 바보야? 1923년 월드 시리즈 잊었어? 
원아웃에 주자 일 이루 나가있고 왼손 타자 들어왔는데 번트를 쳤다 병살로 싸그리 죽는 꼴 보고 싶어?'

하면 바로 차일 수 있지. 

루스는 알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 시대의 남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지. 하지만 루스는 할 수 없다. 전형적인 말괄량이 캐릭터여서가 아니다. 루스는 아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스는 배티 컴든의 유머감각을 고스란히 입은 인물이다. 관객들은 루스의 대사에 웃음을 터트린다. 루스가 출판사 면접을 보러 갔다가 "이 노처녀 내 앞에서 끌어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여유만만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에 단언컨대 로버트는 반해버렸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욕설을 넘긴 루스가 눈물을 보인 순간은 자신의 작품이 뜬구름을 잡고 있다는 로버트의 직설적인 지적 앞에서다. 그토록 열심히 쓴 작품의 단점을 지적받았을 때, 그 지적에 스스로도 공감할 때, 그 고통 앞에서야 루스는 눈물을 보인다. 이 눈물을 핑계로 로버트는 사과를 한다는 명목으로 티격태격 했던 루스를 찾아나선다. 관객들은 이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싸울 때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이 사랑에 빠질 것임을.

반면 동생인 에일린은 뒤늦게 사랑받는 인물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전형적인 머리 텅 빈 금발 미녀처럼 보인다. 수많은 남자로부터 구애를 받지만 그게 너무나 자연스럽다. 심지어 자신과 어떻게든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하는 ‘폭도’들과 유치장 한 방에 갇혔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에일린은 2막으로 가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비로소 관객의 흐뭇한 박수를 받는다. 언니의 첫 연애를 위해 나서기 시작하는 때부터다. 에일린이 그토록 다양한 구애를 받다가 처음으로 마음이 끌린 사람은 자신을 성적인 대상으로 보지 않는 로버트 베이커다. 하지만 그 남자는 만나자마자 싸웠던 루스에게 마음이 끌린다. 

세상 모든 남자를 다 거머쥘 수 있을 거 같은 에일린이 유일하게 가지고 싶은 남자는 언니인 루스에게 마음을 빼앗긴 상태. 여기서 사랑의 승자나 패자가 등장한다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로 가겠지만 루스도 에일린도 사랑을 두고 다투기는 커녕, 이 일로 무언가 하나씩 배워나갈 생각에 설렌다. 루스는 연애를, 에일린은 누군가에게 마음이 설렐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 사랑스러운 자매의 뒷이야기를 계속 보고 싶지만 이 작품은 1953년에는 생각보다 크게 히트하지 못했고 후속 이야기는 들을 길이 없다. 모든 로맨스의 해피앤딩이 ‘결혼’이었던 이 시절에 이 뮤지컬의 결말은 결혼이 아니라 ‘연애의 시작’이다. 배우자를 찾는다는 이성애적 로맨틱 코메디의 가장 아슬아슬한 가장자리에서 균형을 잡으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하는 여성, 루스 셔우드를 어떻게 응원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참고로 작사가인 배티 컴든은 1947년에 시작된 토니상 역사상 최초로 뮤지컬 작품상과 작사상, 대본상을 거머쥔 여성 작가다. 1968년의 <Hallelujah, Baby!> 이후 1978년 <On the Twentieth Century>, 1991년에 <The Will Rogers Follies> 등으로 세 번의 대본, 작사상을 받은 유일한 여성 작가다. 혼자가 아니라 동료인 아돌프 그린과 공동으로 수상하긴 했지만 그 빛이 바라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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