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드림걸즈>
남우 조연상(Cleavant Derricks), 조명디자인상, 안무상 등 6개 부문 수상
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 시리즈가 25회가 되도록 백인이 아닌 주인공은 초록 얼굴을 한 <위키드>의 엘파바, <컬러 퍼플>의 흑인 셀리, <에비타>의 라틴 아메리카노 에바 페론 이후 <드림걸즈>의 흑인 에피가 네 번째다. 1940년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를 통상 브로드웨이의 황금기라고 한다. 이 때 강력한 여자 주인공들, 소위 ‘디바’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들이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디바의 캐릭터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로 만드는 일은 늘 배역을 맡은 여성 배우들의 몫이었다. 물론 모든 디바 뮤지컬의 주인공들이 항상 ‘강력한 주인공’이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그나마도 존재하는 디바들은 의문 없이 대부분 백인들의 차지였다. 가끔 뮤지컬 <핼로 돌리!>처럼 흑인이 백인 역의 주연을 맡을 때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예외였다.
하지만 <드림걸즈>는 완전히 달랐다. 1981년 12월에 개막한 이 작품은 등장하는 모든 주요 인물들이 흑인이었다. 주인공 에피는 새로운 흑인 디바 캐릭터의 탄생을 알렸다. <드림걸즈>는 다이애나 로스가 센터를 맡았던 여성 보컬그룹 <수프림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작품을 만들던 초기에 창작자들이 영감을 받은 것은 오프-브로드웨이 데뷔작에서 코러스로 등장했던 흑인 ‘백업 코러스’들의 모습이었다. 초기 제목은 <Big Dream> 이었다.
줄거리
성격만큼이나 개성 강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에피는 아름답고 소극적인 디나, 감정에 솔직한 로렐, 작곡과 매니저를 맡은 남동생 씨씨와 함께 뉴욕의 ‘아폴로 극장’에서 열리는 탤런트 쇼 ‘아마추어의 밤’에 참가하기 위해 시카고로부터 달려 왔다. 아마추어의 밤은 마이클 잭슨과 형제들이 ‘잭슨 파이브’를 결성해 우승했던 바로 그 무대다. 연예계에서 성공하고 싶은 흑인들이 동경하는 꿈의 무대다.
이곳에서 이들의 재능을 먼저 알아본 사람은 관객들이 아니라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캐딜락 판매상 커티스다. 커티스는 사회자를 매수하여 에피 일행의 우승을 막은 뒤 자신이 뒤를 봐주던 가수 지미 얼리의 백 코러스가 되어달라고 유혹한다. 누군가의 뒤에서 ‘우~ 아!’만 할 생각이 없는 에피지만 커티스의 유혹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결국 그들은 커티스에 의해 연예계에 데뷔하게 되지만 커티스는 아름다운 디나를 센터에 세우며 연인인 에피를 달랜다. 불만에 가득 차 팀에서 겉돌던 에피는 커티스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 마음을 다잡지만, 이미 커티스는 에피 대신 노래할 사람을 구하고 에피를 해고해버린다.
‘드림걸즈’가 승승장구 하는 동안 에피는 혼자 아이를 키우며 고생하다 지미 얼리의 전 매니저를 만나 가수로 재기하게 되고, 재기한 에피를 보며 커티스의 인형처럼 살아온 디나도 자신의 인생을 되찾기로 결심한다. 커티스는 백인들이 흑인들의 노래를 무단으로 훔쳐간 것처럼 에피의 노래를 훔쳐와 디나에게 부르게 하지만, 결국 디나는 커티스를 떠나버린다. 해체된 ‘드림걸즈’는 각자의 길을 가고 그들의 마지막 고별 무대에 에피가 함께 하며 팀은 흩어져도 그들 각자는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간다.
성장
주인공인 에피는 강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1막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모순적이다. 슬럼가에서 자라 산전수전 다 겪은 듯이 보이는 에피지만 사실은 이제 막 이십대에 접어들었을 뿐이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커티스에게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작정하고 얽혀오는 그를 피하지 못한다. 에피의 1막 마지막 노래인 "And I Am Telling You I'm Not Going"은 그야말로 처절하게 매달리는 노래이자 이 뮤지컬의 최대 히트곡이다. 가수로서의 경력과 사랑이 눈앞에서 한꺼번에 무너지자 노래로는 한 번도 좌절해 본 적 없었던 에피가 커티스에게 매달리고 또 매달린다.
자유 따위 필요 없어. 가지 마, 가지 마.
당신은 나를 사랑하게 될 거야.
그렇게 되고 말거야.
안돼, 안돼, 그럴 수 없어.
아침에 일어나 내 곁에 당신이 없다니
그럴 수는 없어
하지만 이렇게 커티스에게 가진 모든 자존심과 인생 전부를 걸고 매달리는 순간에도 에피는 단 한 가지는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커티스의 아이가 뱃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고전적인 로맨스 소설에서 여주인공들은 남자 주인공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하고 임신한 상태로 도주를 했다가, 뒤늦게 찾아온 남자가 사실은 사랑해서 모질게 굴었다는 한 마디에 모든 걸 용서하고 해피엔딩을 맞곤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로맨스가 아니다. 에피는 끝까지 커티스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커티스가 에피를 쓰레기처럼 버린 그 순간부터, 에피는 커티스와 전혀 상관없는 자신만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 커티스를 차지하는 게 에피의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어렵게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도 버리지 않았던 가수로서의 자존심은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는 캬바레의 오디션에서 회복된다. 커티스에 의해 자신이 키운 지미 얼리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했던 지미 얼리의 전 매니저 마티는 에피가 오디션에 응하지 않으려고 핑계를 대는 것이 사실은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꿰뚫어 본다. 에피는 자신의 두려움을 솔직하게 지적하며 손을 내민 그의 진심에 반응한다.
그 순간 이후 에피는 이전의 자신과 달라진다. 실패가 두려워 도전하지 못하던 세월을 뒤로 하고, 실패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마티도 젊은 시절의 그라면 에피에게 직언을 해주지도, 에피가 마음을 바꾸기를 기다려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인생의 바닥에서, 한 사람은 인생의 저물녘에서 서로의 진심을 알아본다.
디나
이후의 에피의 행보는 그야말로 2리터짜리 사이다를 원샷하는 듯 통쾌하고 시원하다. 특히나 에피가 동생인 씨씨와 재결합 하여 만든 노래 “One Night Only"를 커티스가 강탈해 디나에게 부르게 하자, 고소장을 준비해 커티스에게 쳐들어가는 장면은 압권이다. 에피가 커티스에게 “너 좀 뚱뚱해진 거 같아, 살 좀 빼지?”하고 그가 헤어질 때 자신에게 해준 말을 그대로 내뱉어 줄 때는 엄지 두 개가 절로 올라간다.
그리고 이러한 에피의 모습은 커티스의 아내로 살아온 디나 역시 변화시킨다. “에피도 다시 시작했는데 왜 나는 못해! 나도 다시 시작할 거야!“ 디나는 처음부터 에피와 다툴 생각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에피와 센터를 두고 싸울 생각도, 에피와 커티스를 두고 싸울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친구를 위해 거부하지도 않았다.
침묵하는 수혜자였던 디나는 커티스의 아름다운 인형으로 살아가는 것에 회의를 느낄 만큼 충분히 자신의 욕망과 직면한다. 커티스를 떠나기까지 걸린 세월 10년. 디나의 서브 플롯은 에피의 메인 플롯을 가로막지 않으면서 에피와 다른 방식의 인생을 보여주는 다양성을 제공한다. 성공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커티스를 뒤로 하고 드림걸즈가 다시 모여 포옹하는 장면은 뭉클하다.
내 노래는 나의 것
1막에서 에피가 자기의 재능에 대한 우쭐함으로 가득 차 있었던 자의식 과잉의 여성이었다면, 2막에서 에피는 자신의 인생에서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는 인물이 된다. 아버지 없는 아이를 키우는 1970년대의 흑인 여성이 그들의 커뮤니티 안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는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럽다. 에피는 그 긴 십 년의 시절을 지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인물로 발전해 나간다.
과거 에피의 가장 큰 약점이었던 외모에 대한 자격지심에도 벗어나면서 에피의 행동은 더욱 더 당당해진다. 이렇게 달라진 에피의 곁에는 십 년의 세월을 지나 다시 친구가 된 디나와 로렐이 자리를 잡는다. 어떻게 보면 에피의 성공은, 에피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기까지의 길고 먼 길이다. 영화 버전의 <드림 걸즈>는 거기에 커티스가 에피의 딸이 자신의 아이란 사실을 깨닫는 곳까지 나아가지만 무대 버전은 드림걸즈의 고별무대로 깔끔하게 끝나버린다.
에피 ‘멜로디’ 화이트는 실제 수프림스의 센터였던 다이아나 로스가 흑인 버전의 <오즈의 마법사>인 <Wiz>에서 보여주었던 도로시보다도 훨씬 더 강렬하고 매력적이며 생생한 인물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백인 디바로 가득 찬 브로드웨이에서 흑인이고 여성인 캐릭터가 백인들의 방해와 가부장적인 남자 주인공의 방해를 뻥뻥 걷어차고 당당하게 서서 브로드웨이에서 무려 4년이나 롱런한 것은 주인공의 매력이 가장 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이건 내 목소리야!” 하고 외치며 이 배역을 맡았던 오리지널 주인공이었던 제니퍼 홀리데이도, 2006년 영화 버전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제니퍼 허드슨도 모두 에피를 통해 스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