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16. 페기 소여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16. 페기 소여

이응

일러스트레이터: 솜솜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42nd Street)>

초연 Winter Garden Theatre(1980)
대본 Michael Stewart, Mark Bramble
작곡 Harry Warren
가사 Al Dubin
원작 Bradford Ropes;
연출/안무 Gower Champion
무대디자인 Robin Wagner
의상디자인 Theoni V. Aldredge
수상 1981년 Tony 상 뮤지컬 작품상, 안무상 수상

배우들의 역할 가운데에는 언더스터디라는 게 있다. 주역을 맡은 배우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하는 대역배우다. 언더스터디, 스탠드바이 등으로 불리는 대역배우들에게는 기회가 그리 흔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일단 주연 배우에게 반드시 무슨 일인가 생겨야만 한다. 그 '무슨 일'이란 대부분 주연배우가 불행해지는 경우라서 대놓고 바라기도 어렵다. 

언더스터디 출신으로 스타가 된 배우들의 이야기는 늘 흥미진진하다. 가장 유명한 배우로는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맹장염에 걸리자 그 자리를 메꿔 스타가 된 안소니 홉킨스가 있다. 이후 영화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로 스타가 됐다. 하이스쿨 뮤지컬 드라마인 <글리>의 주인공 매튜 모리슨은 뮤지컬 <풋 루스> 척 역의 언더스터디로 데뷔했다. 한 번도 직접 무대를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투입된 그는 큰 인기를 모으며 뮤지컬 <헤어스프레이>의 주연으로 발돋움하여 브로드웨이의 새로운 왕자님으로 등극했다.

이런 사례들은 모두 언더스터디들의 궁극의 목표이자 꿈이다. 1987년의 런던 웨스트앤드에서 3년째 공연 중이었던 브로드웨이 뮤지컬 <42번가>의 페기 소여 역의 언더스터디였던 캐서린 제타-존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캐서린 제타-존스는 주연배우와 첫 번째 언더스터디가 동시에 출연하지 못할만한 무슨 일인가가 생겨야 무대를 밟을 수 있는 두 번째 언더스터디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주연배우는 아팠고 첫 번째 언더스터디도 공연을 할 수가 없었다. 캐서린 제타-존스는 무대에 섰다. 고작 17살이었던 캐서린 제타-존스는 그 후 2년간 뮤지컬 42번가의 주연 페기 소여로 무대에 섰고, 무대가 끝난 뒤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헐리우드 영화사 파라마운트사의 계약서였다.

내 인생의 대타는 없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는 부러진 다리의 신화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앤드 등의 서구 극장가에서는 공연 전에 행운을 빌 때 "다리나 부러져라Break a leg!"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여러 가지 기원설이 있지만 요는 말로 액땜을 대신 하겠다는 미신이다. 그리고 이 미신을 통해 스타가 되는 가장 유명한 극중 인물이 바로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주인공인 페기 소여다. 

1932년에 발표된 동명의 단편소설이 원작이다. 원작을 쓴 브랫포드 로페즈는 많은 시나리오와 브로드웨이 뮤지컬 대본을 쓴 작가다. 1933년에는 영화도 개봉했다. 버드아이뷰 촬영기법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벅스비 버클리가 뮤지컬 장면을 감독했다. 대공황기를 지나던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가의 화려한 보더빌 쇼들은 제작비 부족과 관객 부족으로 인해 시들어가던 반면, 대륙 반대편 할리우드의 영화사들은 호황을 이루었다. 영화가 말을 하기 시작한 이후 뮤지컬 영화는 영화관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장르였다. 원작 영화 <42번가>를 찍은 벅스비 버클리만 해도 1933년 한 해에만 감독한 영화 5편이 줄줄이 개봉할 정도로 스튜디오 안에서 공장처럼 영화를 찍어내던 시절이었다. 

<42번가>는 1932년을 배경으로 한다. 보더빌 공연이 줄줄이 망해나가고 있을 때 전설적인 연출가 마쉬는 새로운 공연 <프리티 레이디>를 맡는다. 오디션을 보기 위해 펜실베니아 앨런타운에서 달려온 페기는 지각을 하는 바람에 오디션을 놓칠 위기에 놓이지만 탁월한 탭댄스 실력으로 앙상블을 따낸다. 프로덕션은 한물간 배우 도로시 브록을 주연으로 하는 걸 조건으로 부자 투자자가 붙은 상태. 그런데 이 도로시 부록이 진짜 애인인 팻 대닝과 몰래 만나는 걸 알게 된 마쉬는 투자가 취소될까봐 마피아에 연락해 처리를 부탁하고, 이 통화를 우연히 엿들은 페기 소여가 팻 대닝을 도와주면서 오히려 도로시 브록에게 오해를 사게 된다. 

오해는 자꾸 겹치고, 마피아는 팻 대닝을 쫒고, 도로시 브록은 페기를 구박하고, 팻 대닝은 자기를 구해준 페기 소여에게 상냥하게 대하고 그걸 본 도로시 브록은 더 심하게 페기를 구박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해프닝은 공연 직전 도로시 브록이 페기에게 밀려 다리가 부러지면서 끝난다. 화가 난 마쉬는 페기를 해고하지만 이내 대역을 할 사람이 페기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기차역으로 모든 프로덕션 멤버들이 페기를 설득하러 달려간다. 돌아온 페기 덕분에 공연은 성공하고, 대역으로 선 페기는 스타가 되고, 도로시는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팻 대닝과 약혼한다는 이야기다.

순진한 배우 지망생? 야심찬 탭댄스 신동!

흔히들 페기 소여를 악의 없고 순진한 시골에서 갓 상경한 배우 지망생이라고 생각하지만, 페기의 탭댄스 실력을 보고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탭댄스를 잘 못 추는 배우의 잘못이거나 보는 관객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페기 소여가 뉴욕에 가서 유명배우가 되겠다고 꿈꾼 이유는 자기가 살고 있던 지방에서 이미 신동으로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페기보다 더 빠르게 탭을 밟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페기는 자신감은 물론 실력에 패기까지 가득 차 있었다. 비었던 것은 지갑과 뱃속이었다. 하지만 동전 몇 개만 달랑 든 페기의 지갑은 동료들의 동정을 산다. 페기는 흔히들 살벌하게 그려지는 코러스걸의 세계에서 단숨에 친구들을 사귀며 사뿐하게 안착하는데 성공한다. 

모든 사람들이 앨런타운에서 온 촌뜨기로 취급하는 동안 페기는 착실하게 도로시 브록의 노래와 춤을 마스터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대역을 할 수 있다고 충분히 알릴 정도로 영리한 인물이다. 마쉬의 전화를 엿듣고 팻 대닝을 구해주기 위해 마피아들을 속아 넘길 정도로 대담하고 똑똑하며, 팻 대닝이 자신의 애인인 도로시의 걱정을 덜기 위해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자 도로시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뚝심 있게 비밀을 지켜주는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페기 소여가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 팻 대닝에게 한 눈에 반한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이상형이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자 그 남자를 빼앗기보다는 그에게 도움을 주는 길을 택한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호의를 표시하는 다른 사람들의 애정을 덥석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이토록 영민한 페기 소여의 캐릭터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공연을 앞두고 얼어붙은 페기의 긴장을 풀기 위해 연출가인 마쉬가 강제로 진한 키스를 하는 장면이다. 1932년에 쓰여지고 1933년에 개봉한 영화에서 구시대 연애물의 가장 인기 있던 장르인 ‘키스로 입 막기’를 시도하는 거야 그럴 수 있다고 해도, 1980년에 만들어진 무대 뮤지컬에서도 이 장면은 고스란히 살아남는다. 그 때까지도 여전히 강압적인 키스가 인기 있는 장면이었다는 뜻이다. 긴장한 배우의 얼어붙은 심정을 녹여주는 방법이 도대체 강제로 들이미는 키스 말고는 없단 말인가. 

호화 파티로의 초대를 거절한 '신데렐라'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이다. 그 키스를 통해 누군가 마음이 움직였다면 그것은 페기 쪽이 아니라 중년의 연출가 마쉬 쪽이다. 키스를 한 그 순간에는 마치 페기가 흐물거린 것처럼 보이지만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낸 후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마쉬다. 하지만 페기는 마쉬의 파트너가 되어 공연계의 높으신 분들과 부자들이 모두 오는 멋진 호텔로 가자는 초대를 가볍게 거절하고, 배고파 기절했던 자신에게 빵과 스프를 사주었던 코러스 친구들의 파티로 날아가 버린다. 그런 페기의 등 뒤에 대고 마쉬는 "제길, 페기, 너는 정말 스타가 될 거야!"하고 외친다. 스타가 되길 바란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마쉬 스스로도 모를 것이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는 오래된 백스테이지 신데렐라 스토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기 소여는 결코 케케묵은 캐릭터가 아니다. 페기 소여 역의 배우가 오래 전 할리우드의 전설이었던 탭 댄서 앤 밀러처럼 일분에 오백 탭을 밟을 필요는 없지만 ‘아무것도 몰라요’ 병에서는 나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페기 소여는 다 알고 있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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