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에비타(Evita)>
1976 컨셉 앨범 발매
초연 1978 6월 런던 Prince Edward Theatre, West End, London 연출 Harold Prince
1979 9월 뉴욕 Broadway Theatre, Broadway New York 연출 Harold Prince
1996 영화 개봉, 연출 Alan Parker
수상
1978 로렌스 올리비에 상 신작 뮤지컬상
1980 토니상 뮤지컬 작품상, 대본상, 스코어(작사/작곡)상
뮤지컬 <에비타>의 브로드웨이 초연 주인공이었던 배우 페티 뤼폰은 에비타의 창작자들이 여성 혐오주의자들이 아닌지 의심했다. 여성 코러스들의 노래는 대부분 히스테리라도 부리는 듯 하늘 꼭대기에 올라간 단조로운 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뮤지컬의 제목은 주인공인 에바의 애칭인 에비타다. 이 뮤지컬은 열다섯부터 서른세 살까지 에바의 인생을 다루고 있지만 에바의 내면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게다가 어느 뮤지컬의 여자 주인공도 이토록 가혹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에바는 극중 가사를 통해 암캐, 창녀, 못 배워먹은 년, 시궁창 출신 등 여성으로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욕을 두루두루 듣는다.
심지어 이게 다가 아니다. 두 허벅지 사이 말고는 쓸모 있는 게 없다는 군인들의 가사와, 에바는 침대 밖으로 나와선 안 된다는 가사는 모골이 송연하다. 하지만 에바는 극 중의 마초들이 요구하는 대로 침대에 머무는 대신 문 밖으로 나왔고, 분수를 깨닫는 대신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정했다. 에바 두아르테는 남미 역사상 브라질에서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가 선출되기 전까지 남미 전체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여성이었다.
폭풍 같은 에바 듀아르테의 생애
뮤지컬 <에비타>는 에비타의 부음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던 관객들 앞에서 알려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알란 파커 감독의 1996년 영화에서는 첩의 자식으로 자란 에바의 어린 시절이 그려지지만, 무대 위에서는 바로 나레이터로 ‘체’가 등장해 에바의 웅장한 장례식과 에바의 죽음을 애도하며 눈물 흘리는 군중들을 향해 이 무슨 소란이냐고 일갈하는 노래로 시작한다. 체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인 그 ‘체 게바라’가 맞다. 하지만 실제론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에비타는 열 다섯에 탱고 가수인 마갈디를 유혹해 후닌을 떠나 부에노스 에이레스로 간 이후, 여러 남자를 갈아타며 모델로, 성우로 성공가도를 달리다, 마침내 떠오르던 정치인인 후안 페론을 만나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가 싶지만, 재선된 직후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에바의 나이 고작 서른 셋이었다.
마초의 땅으로 유명한 남아메리카에서 에비타는 열 다섯살에 마갈디의 부에노스 에이레스로 데려가 준다는 달콤한 말에 넘어가 밤을 함께 보내지만, 다음 날 아침 그의 태도는 손바닥 뒤집히듯 변해버린다. 그런 마갈디에게 남자들은 에바 같은 여자와 하룻밤 즐긴 댓가로 에바에게 물렸다며 어서 도망가라고 여기 저기서 조언을 해대지만, 결국 에바는 마갈디와 함께 부에노스 에이레스, 빅 애플로 상징되는 꿈의 도시에 도착한다.
그렇게 그리던 대도시에 도착해 "Buenos Aires" 를 신나서 부르지만 이 노래에서조차 에바는 마음 놓고 즐기지 못한다. 에바가 자신의 꿈을 여기서 이룰 거라고 노래하는 동안, 반주를 들어 보면 거대한 군대라도 진군해 오는 듯한 긴장감을 유발하는 리듬과 멜로디가 쳐들어온다. 뮤지컬 <에비타>는 한 곡이 하나의 감정이나 하나의 상황을 보여주지 않는다. 주인공인 에바에 대한 수많은 엇갈리는 증언과 상황들, 평가들 만큼이나 노래들도 복잡하다.
야망을 드러내는 에바 페론의 생애
에바가 부에노스 에이레스에 도착해 남자들을 갈아치우며 신분을 상승시켜 가는 노래는 "Goodnight and Thank You"다. 에바에게 차인 남자들은 점점 큰 덩어리가 되어 처량하게 버려진 남자들의 코러스에 합쳐진다. 약 오분 가량의 노래를 통해 에바는 순식간에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남자들을 밟고 올라서는 ‘꽃뱀’으로 정의되고, 에바가 이 남자 저 남자를 거치는 모든 순간이 이 하나의 곡으로 모든 상황이 정리된다.
그리고 곧바로 노래는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을 알려주는 체의 노래 "The Lady's Got Potential"로 이어진다. 뮤지컬에서는 삭제되었던 곡이지만 영화 버전에서 다시 추가됐다. 특히 미국이나 영국 외의 나라에서 공연할 때, 배경을 알려주기 위해 꼭 들어가는 곡이다. 이 곡을 통해 관객은 아르헨티나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군부세력의 떠오르는 강자가 페론 대령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남자가 결국 에바와 만나게 될 것임을 알게 된다.
에바가 극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곡은 페론의 옛 애인을 쫓아내는 장면이다. 에바는 페론의 옛 애인을 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연민을 느끼면서도 냉정하게 페론의 침대에서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쫓겨나는 여성도 에바 만큼이나 젊고 어린 여성이다. 그가 "이제 난 어디로 가나요?" 하고 묻자 에바는 과거에 자신이 들었던 그 냉혹한 대답을 돌려준다. "내가 알게 뭐람." 이 장면에서 페론은 그저 이 불편한 순간을 방관하며 에바에게 모든 처리를 맡긴다.
에바와 페론이 만났을 때 페론의 나이는 49살, 에바의 나이는 고작 25살. 그들은 만나는 그 순간 사랑에 빠졌다. 에바를 ‘신데렐라’로 정의했던 작가 팀 라이스의 관점에서 볼 때, 에바의 인생은 최고의 권력을 지닌 페론을 만나기 위해 달려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에바는 서슴없이 열 다섯 이후 십년 간 익힌 자신의 유혹의 스킬을 쏟고, 아내를 잃은 페론 역시 젊고 아름다운 배우가 자신에게 보내는 존경과 애정에 푹 빠져들어 간다.
뮤지컬은 페론을 마치 맥베스처럼 묘사한다. 군부에 의해 제거될 위기에 처하자 페론은 파라과이로 망명을 가서 그저 평범하게 살자고 제안하지만, 에바는 마치 덩컨 왕을 처치하라고 부추기는 레이디 맥베스처럼 단호하게 페론을 부추긴다. 이 장면을 통해 에바는 인생의 목표가 평범한 인생이 아니라 거대한 욕망의 실현에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제목도 에비타고 주인공도 에바 페론이지만, 심지어 에바 그 자신도 자신의 입으로 노래하는 모든 가사가 에비타에 대한 관조다. 뮤지컬은 에바의 인생을 어떤 쪽으로도 결론을 내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체를 통해 마치 신문기사의 연속처럼 그렇게 이어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뮤지컬을 보며 관객들이 이입하는 것는 두 가지 요소 때문이다. 에바를 연기하는 배우와, 에바 그 자신의 삶이다.
아부하는 대사는 모르는 배우
에바의 삶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가난했다, 가난하지 않았다부터 마갈디와 함께 떠난 적이 없으며 남성편력은 과장된 것이라는 것까지 다양하다. 특히나 페론과 에바가 폈던 민중에게 부를 돌려주는 다분히 사회주의적인 정책은 그 당시의 ‘미국 진영’의 시각에서는 ‘공산주의’에 부합하는 악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페론은 언론을 탄압하고 반대파를 숙청하고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는 전형적인 전근대적 독재자의 길을 걸어가지만, 실제 펼쳤던 정책 자체는 에바의 영향으로 가난한 자를 위한 복지정책이 꽤 많았다.
페론이 대통령이 된 후 에바가 귀족들을 모아 놓고 부르는 노래인 "The Actress Hasn't Learned the Lines (You'd Like to Hear)" 에서 가장 인상적인 가사는 제목 그대로 "나는 아부하는 대사는 외운 적이 없었다"고 서슴없이 노래하는 부분이다. 만약 에바가 정말로 권력과 돈을 위해 남자를 계단처럼 이용해 올라갔던 악녀였다면 자신에게 아부하는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비싼 옷과 장신구를 사들이며 인생을 즐겼으면 그만이었겠지만, 에바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페론의 재선 과정에서 에바는 부통령이 되기를 바랐지만 군부의 반발 때문에 그 결정을 거둬들여야 했다. 뮤지컬 안에서 에바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단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페론 대령은 에바를 욕하는 자신들의 관료들 앞에서 말한다. "당신들이 앉은 모든 자리는 에바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모두가 알지만 에바를 받아들일 생각은 전혀 없다. 그리고 에바는 자궁암에 걸려 서른 세 살에 세상을 떠난다. 모든 걸 손에 쥐었지만 그 순간은 너무 짧았다. 그저 우연이겠지만 페론의 첫 아내도 자궁암으로 세상을 일찍 떠났다.
뮤지컬을 쓴 팀 라이스와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를 풍자하거나 미디어의 영향력을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 생각은 연출가인 해롤드 프린스의 의도였다. 하지만 그들 각자가 에비타를 어떻게 생각했든, 에비타의 인생은 단순한 악녀의 신데렐라 스토리도, 미디어의 미화로 성녀로 포장된 창녀의 스토리도 아닌 에바 그 자신의 것이다. 대통령인 남편 페론보다 더 유명해진 에바의 굵고 짧은 인생의 여정만은 누구도 바꿀 수 없었다.
성녀 혹은 창녀, 선택지는 단 둘인가?
배우 페티 뤼폰은 처음에는 에바 페론을 악녀라고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자신이 에바의 인생과 사랑에 빠진 후에야 비로소 에바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에바 듀아르테가 살아서도 성녀와 창녀 사이의 극단적인 평가 속에서 흔들렸듯이, 관객들은 1막에서는 에바를 비웃고 2막에서는 에바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에바의 인생은 무엇이든 간에 결국 양극단에 놓여있다. 배우들 역시 그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에바의 인생에 깊이 이입했다. 대본과 가사에 담기지 않은 인간을 찾아내는 것은 늘 에바 역을 맡은 배우들의 숙제다. 죽어도 죽지 못하고 남미를 이리 저리 떠돌아야 했던 에바의 시체처럼 우리는 여전히 에바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에바는 창녀도 성녀도 아닌 에비타 그 자신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