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5. 일라이자 둘리틀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5. 일라이자 둘리틀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뮤지컬 <My Fair Lady>

초연 Mark Hellinger Theatre(3/15/1956)
연출 Moss Hart
안무 Hanya Holm
대본/가사 Alan Jay Lerne
작곡 Frederick Loewe
원작 George Bernard Shaw의 "Pygmalion"
일라이자 둘리틀 Julie Andrews
핸리 히긴스 Rex Harrison

 

일라이자 둘리틀, 삶으로 돌진하는 갈라테아

뮤지컬 <My Fair Lady>의 원작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이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로 키프로스 섬의 조각가였다. 자신이 만든 조각을 사랑하게 되어 아프로디테에게 아내를 달라고 기도하며 작은 글씨로 ’조각을 사랑해요‘ 하고 덧붙이자 기도가 현실이 되었다는 이야기. 조각이었다가 생명을 입은 여성은 갈라테아라는 이름을 얻고 인생을 시작한다. 

버나드 쇼는 이 피그말리온에게 핸리 히긴스, 그가 창조한 여성에게 일라이자 둘리틀이라는 이름을 주고 그 생명의 수단으로 ’교육‘을 여성 캐릭터의 뇌에 조각한다. 음성학자인 히긴스는 길에서 꽃을 파는 일라이자의 험악한 말투를 듣고 자신이라면 고작 몇 달 안에 그녀를 공작부인처럼 말하게 할 수 있다고 같은 음성학자인 픽커링 대령에게 장담한다. 그 말을 들은 일라이자는 다음날 히긴스를 찾아와 우아하게 말하는 법을 배워 상점에 취직하겠다며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내놓는다. 픽커링 대령은 히긴스에게 전날 말한 내용을 증명하라며 자신이 비용을 대겠다고 내기를 건다.

두 남자의 내기 대상이 된 일라이자는 고된 훈련 끝에 대사관 파티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히긴스와 픽커링이 서로의 승리를 자축하느라 일라이자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모습에 일라이자는 깊은 회의를 느끼고 히긴스의 집을 떠난다. 사라진 일라이자를 찾아 헤매던 히긴스는 자신의 어머니 집에서 일라이자와 다시 조우하고, 이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일라이자와 마주하게 된다.

일라이자의 나이는 열일곱, 열여덟, 많이 봐줘도 스물은 안되었다고 대본에 언급되어 있다. 실제로 브로드웨이에 이 작품으로 데뷔한 쥴리 앤드류스는 스물 한 살이었다. 반면 상대역인 핸리 히긴스는 최소한 마흔살이라는 설정이고, 배우인 렉스 해리스는 마흔 여덟이었으며, 동명의 영화가 개봉했을 즈음에는 쉰 여섯이었다. 

선택

일라이자는 뮤지컬에서 히긴스보다 먼저 등장해 오리처럼 꽥꽥거리는 과장된 거친 목소리와 억양으로 꽃을 판다. 일라이자의 모습은 사람의 옷을 입은 야생의 짐승처럼 보이며, 핸리 히긴스의 냉소적인 농담을 알아듣지 못한채 천치 같은 질문이나 해댄다. 일라이자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을 보고 나오는 우아한 중상류층의 관객들이 비를 피해 처마 밑에서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꽃을 한 송이라도 더 팔기 위해 애쓰지만, 그들 사이에서 일라이자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일라이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단 한 사람이 바로 핸리 히긴스지만, 그 역시 일라이자의 신상에 대한 궁금함이나 처지에 대한 연민과는 전혀 상관없는 음성학 연구에 관한 호기심 뿐이다. 그마저 다 채워지자 그는 미련 없이 일라이자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관심을 옮겨간다. 

그토록 엉망진창인 듯 하지만 첫 노래 <Wouldn't It Be Lovely?>를 부를 때의 일라이자는 지극히 평범한 꿈을 꾸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음날 핸리 히긴스의 문을 두드린다. 그렇다. 이 작품은 일라이자가 핸리 히긴스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면 시작되지 않을 이야기다. 갓 스물인 거리의 꽃 파는 여성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진 전 재산을 스스로의 교육에 쓰겠다고 마음 먹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았다. 

히긴스와 함께 있던 픽커링 대령이 일라이자에게 감동받은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곧바로 일라이자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즉석에서 내기를 주고받는다. 이 내기를 주고 받을 때 내기의 대상인 일라이자는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은 채 소외당한다.

변신 

1957년의 <마이 페어 레이디>, ABC 제공

일라이자가 처음부터 이 의도치 않은 교육에 고분고분했던 것은 아니다. 훈련이 고되고 히긴스의 막말에 심신이 고달파지면 일라이자는 핸리 히긴스를 총살하는 꿈을 꾸며 상황을 견딘다. 마침내 하층민의 액센트를 극복하는 <The Rain in Spain> 을 똑바로 발음할 수 있게 된 날 일라이자는 밤새도록 춤을 출 수도 있을 것만 같다는 벅찬 감동을 느낀다. 스스로의 힘으로 가장 어려운 단계를 넘어간 기쁨을 뮤지컬 속의 일라이자는 히긴스 박사에 대한 애정과 동일시한다. 이러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것은 대사관 무도회를 위하여 화려하게 차려입은 일라이자를 마주한 히긴스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 대사관 무도회에서 화려하게 성공한 이후 픽커링 대령과 히긴스가 성공의 기쁨을 나누면서도 일라이자에게 공치사 한 마디 하지 않으면서 터져 나온다. 일라이자는 더이상 거리에서 꽃을 팔던 그 사람이 아니기에, 히긴스의 집에서 보고 배운 소위 ‘교양’에 의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정한 후였기에,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에서 소외되었음에 분노한다. 하지만 여전히 일라이자를 길에서 꽃 팔던 시절과 똑같은 눈으로 보는 히긴스의 일라이자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일라이자는 히긴스의 집을 나와 히긴스의 어머니의 집에서 어머니의 비서를 하면서 자신을 오매불망 바라보는 프레디와의 결혼을 고려한다. 히긴스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라며 오만하게 일라이자를 가르치려 들지만, 일라이자는 더 이상 히긴스의 학생이 아니다. 일라이자는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히긴스가 하는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히긴스의 속을 까맣게 태운다.

교육 받은 여성이라는 괴물

일라이자는 이제 다시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배워버렸고, 이미 다른 계층의 인생에 진입해 버렸기 때문이다. 단지 중산층의 삶에 대한 욕구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일라이자는 차라리 몰랐으면 하고 원망까지 하는데, 그 원망의 대상은 알기 전에는 알고 싶어하는지조차 몰랐던 ‘지식’을 알려준 히긴스에 대한 원망이다. 

하지만 이렇게 배운 여성이 된 일라이자는 뮤지컬 속의 히긴스에게는 재앙이다. 그저 잘 웃고, 비서 일을 잘 해낼 줄만 알았던 여성이 교육의 결과로 대등하게 턱을 치켜드는 것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네 모습을 봐. 이렇게 당당하다니!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어!" 즉, 자신에게 감사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라는 말이다. 인간의 ‘원래’란 대체 어느 지점일까. 

사랑이라는 퇴행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에서 일라이자는 히긴스에게 돌아가 그의 슬리퍼를 말없이 내줌으로서 커리어가 아닌 사랑을 선택하는 결말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교육받은 여성이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과거로 회귀하며 자신을 교육한 대상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1956년의 해결책이었다. 아니, 그것은 버나드 쇼가 제시한 합의다. 1938년에 개봉한 영화 버전에서 버나드 쇼가 두 사람을 이어주기를 열망하는 관객들과 제작자의 요구에 못 이겨 반 정도 타협하는 결말을 내놓은 것이 바로 슬리퍼를 가져다 주는 일라이자였다. 뮤지컬 창작자들은 그 결말을 기반으로 작품을 로맨스로 완전히 밀어 붙이는데 성공했다. 

원작인 <피그말리온>의 작가 버나드 쇼는 일라이자가 히긴스에게서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고 그의 유산을 상속받는 대신 가난한 프레디를 선택하는 결말이야말로 진정한 갈라테아로서,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결말이라고 여겼다. 그 모습을 보는 히긴스 역시 감탄했다. 보수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계에서 창작자들은 더할 나위 없는 밀당의 로맨스 뮤지컬로 이를 재창작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라이자의 역할은 다시금 슬리퍼를 가져다 주는 전통적인 여성으로 추락을 겪는다. 그토록 당당하게 "내가 원하는 건 상점에서 일하며 월급을 받는 것"이라고 외쳤던 일라이자가.

2018년, 돌아온 일라이자

2018년 3월 15일, 브로드웨이에서는 뮤지컬 <My Fair Lady>의 리바이벌 프로덕션이 공연을 시작했다. 1956년 초연한 이후로 네 번째다.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으로 이번에는 #MeToo 열풍 아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일라이자와 히긴스의 나이 차이가 대폭 줄어들어 거의 같은 또래의 인물들로 설정되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에 있어서는 버나드 쇼의 원작을 많이 참고했다고 하여 오리지널 버전을 사랑하는 뮤지컬 팬들과 새로운 결말을 지지하는 뮤지컬 팬들 사이에서 격한 논쟁이 되고 있다. 

그러나 평단의 평가는 대체적으로 당당한 여성으로 새로 태어난 일라이자에게 동감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듯 하다. '짓이겨진 양배추잎'이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불리던 일라이자는 자신의 본 모습을 찾기까지, 진정한 갈라테아로서 인생과 마주하기까지 6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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