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애니Annie>
무대 디자인상, 의상디자인상, 안무상 등 7개 부문 수상.
난 여자아이들이 싫어!
어린 영웅 마틸다가 무대 위에서 허리에 손을 얹고 턱을 치켜 들고 어른들의 세상을 홀딱 뒤집어 놓기 이전, 브로드웨이에는 1977년에 개막한 뮤지컬 <애니>가 있었다. 물론 뮤지컬 <애니>는 소설 <마틸다>가 출판되기 전에 나온 뮤지컬로, 어린 여자 아이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빼면 영향력을 주고 받은 흔적은 크지 않다.
1970년대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사망 선고를 받을 정도로 흥행작이 많지 않았다. 관객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던 시기였다. 1950년대만 해도 작곡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뮤지컬 작곡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1970년대의 젊은이들은 달랐다. 그들의 꿈은 비틀즈나 데이빗 보위, 제니스 조플린, 다이애나 로스였다. 유명 디바들이 주인공으로 나선 작품들이 프리뷰만 간신히 채우고 막을 내리던 시절이었다.
그런 때에 열 살짜리 어린 여자 아이가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우르르 등장하는 뮤지컬은 투자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줄거리도 빨강머리 앤이 올리버 트위스트와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이야기 속으로 잠시 들어가 악당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 부자 아버지를 낚는 소공녀의 천방지축 버전 같다. 클리셰 범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주인공인 애니에게는 초능력도, 거창한 출생의 비밀도 없는 대신, 대책 없는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에 콧방귀를 뀌며, 그 따위 건 개나 주라며 주먹을 흔들어댄 악당이 오늘의 주인공인 미스 해니건이다. 마틸다는 자신의 어른 보호자로 부모를 버리고 미스 허니를 선택하지만, 애니는 미스 해니건에게서 탈출한다. 그 목표가 달성되어야만 애니는 행복의 첫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어린이들의 악몽과도 같은 미스 해니건은 누구일까.
줄거리
뉴욕의 허드슨 복지원. 올리버 트위스트가 구빈원에 버려졌다면, 애니는 구빈원의 뉴욕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여자 어린이 고아원에 버려진다. 고아원의 원장인 미스 해니건은 세상에서 여자 아이들이 제일 싫은 사람. 고아원 최고의 악동은 열 살의 고아 애니. 허구한 날 탈출을 감행하는 과감함과 어른을 포함해 누구와 말싸움이 붙어도 지지 않는 영민함을 갖추고 있다. 고아원을 탈출했다가 꼭 자신처럼 길을 헤매는 털북숭이 개 샌디를 만나는 바람에 경찰에 잡혀서 ‘또’ 돌아오게 되지만, 그러면서도 샌디를 포기하지 않는 정이 넘치는 아이다.
그리고 이 모든 애니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빨강머리’에 대한 편견이다. 고집 세고 기가 세고 공상이 넘치고 말재간이 풍부하다는 점에서 애니는 여러모로 그린 게이블스의 빨강머리 앤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애니는 그린 게이블스가 아니라 억만장자인 워벅스의 집에서 일주일을 보낼 기회를 잡는다. 워벅스는 빨강머리 앤의 마릴라와 완전히 똑같은 대사를 내뱉는다. "남자애가 아니잖아!"
애니 역시 앤처럼 크게 실망하면서도 실망을 감추고 잠시나마 멋진 경험을 한 것에 대해 긍정적인 대사를 늘어놓는다. 결국 애니에게 푹 빠진 워벅스는 애니를 입양할 결심을 하지만 자신을 고아원에 맡기고 간 친부모가 살아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던 애니는 그 제안을 거절한다. 워벅스는 애니의 부모를 찾는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고 애니의 부모에게 큰 돈을 주겠다고 선전한다. 그러자 워벅스의 집 앞에는 애니의 부모라 주장하는 긴 줄이 늘어선다. 애니의 고아원 원장인 해니건은 감옥에서 탈출한 동생과 그의 여자친구를 애니의 부모로 그럴싸하게 꾸미기 위해 애니의 부모가 남긴 유품을 이용한다. 이 음모를 엿들은 애니의 고아원 친구들은 애니를 구하러 워벅스의 집으로 달려가 해니건 일당은 체포되고 애니는 워벅스의 딸이 되며 고아원 친구들 모두 워벅스의 집에서 살게 된다는 해피엔딩이다.
여자 악당 vs 여자 주인공
뮤지컬 <마틸다>의 가장 대표적인 악역이 아가사 트렌치불이라면 뮤지컬 <애니>의 악당은 아가사 해니건이다. 트렌치불이 피도 눈물도 없는 파렴치한 악당이라면 해니건은 미워할 수 없는 매력적인 악당이다. 둘 사이의 공통점이라면 상 받기 좋은 배역이라는 점, 그리고 한없이 약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협박과 공갈을 일삼는다는 점이다.
아가사 해니건이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이유는 명료하다. 특히나 실업자가 넘쳐나는 대공황기의 뉴욕에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일자리는 소중하기 그지 없다. 공황 때문에 '돈줄'인 아이들이 부족해질 염려도 없다. 고아원장의 업무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라는 점만 빼면. 해니건이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딱 두 가지, 자신을 사랑할 것과 거짓말을 하지 말 것이다. 뮤지컬 속에서 아이들은 해니건의 고아원에 갇혀 고아원을 반들반들 빛이 나게 닦고, 쓸고,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한다. 하지만 그들이 해니건에게 복종하는 건 갈 데가 없어서일 뿐, 아이들은 해니건을 진심으로 무서워 하기보다는 경멸한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해니건을 괴롭히고 모욕한다.
미스 해니건은 자신이 얻지 못한 것을 고아들이 ‘감히’ 얻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고아인 애니가 억만장자의 집으로 갈 수 있게 되자 단박에 반대하지만, 애니와 억만장자의 비서인 그레이스는 마치 마틸다와 허니 선생님이 첫눈에 서로에게 반했던 것처럼 이미 사랑에 빠진 후라 말릴 재간이 없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애니를 워벅스의 집으로 보낸 후 해니건은 다시 술독에 빠져 애니를 저주하는 치졸함을 보여준다.
해니건은 자신의 고아원에 있으면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애니가 번번히 탈출을 시도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러한 미스 해니건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단 한 번 뿐이다. 탈옥한 남동생 루스터가 돈 빌리러 와서 애교를 떨 때다. 그 외의 경우는 대부분 ‘미스 해니건’이다. 특히나 고아원 원생들은 영혼 없는 목소리로 "사랑해요, 미스 해니건"을 외친다. 미스 해니건이 강제로 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니건은 그 말을 들으면서 딱히 기뻐하거나 만족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사랑은 그저 아이들을 괴롭히기 위한 또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미혼, 알콜 중독, 직업 여성
해니건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직업을 얻기 힘든 시절에 미혼인 여성이 한 기관의 관리인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해니건과 비슷한 만큼 유명한 고아원장이라면 <키다리 아저씨>에 등장하는 고아원 원장인 리펫과, 그 속편에 등장하는 샐리 맥브라이드일 것이다. 이 세 명의 고아원 원장들의 공통점은 모두 미혼이라는 것이다(샐리는 나중에 의사 선생과 결혼하기는 하지만). 왜 고아원 원장이 수녀처럼 독신을 유지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고아원 원장들은 그 당시에도 꽤 배운 여성이다.
해니건은 심각한 알콜중독자에 어린 여자아이들을 증오하지만 자신의 직업은 사랑한다. 애니가 "이 일을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하고 말하자 "아니, 이 일은 사랑해! 여자애들이 싫을 뿐이야!" 하고 외친다. 애니가 해니건을 화나게 하려고 깐족대는 말에 의하면, 해니건은 십년 전 남자에게 차인 이후 내내 싱글이다. 해니건은 마치 현진건의 소설 <B사감과 러브레터>의 B사감처럼 라디오 멜로 드라마를 들으며 여주인공에 이입하는 그런 인물이다.
해니건이 부르는 "Little Girls"는 마치 고아원의 아이들을 저주하는 노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노래다. 고아원에 갇힌 것은 고아들 뿐 만이 아니다. 자신도 역시 고아원에 갇힌 신세라는 사실을 해니건은 잘 알고 있다. 외로움에 치를 떠는 그는 고아원의 문을 두드리는 모든 남자들과 사랑에 빠진다. 해니건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이 거느리는 고아들에게조차 놀림감으로 전락하면서 관객들의 동정까지 사게 만드는 인물이다.
해니건이 가장 극악하게 보이는 장면은 애니가 해니건의 동생 커플을 진짜 부모님이라 생각하고 차에 오르자마자 애니를 덮칠 때다. 이 때의 해니건은 평소보다도 더 술에 취한 듯이 보인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해니건의 동생 루스터는 자신들의 사기 행각의 증인인 애니를 살려둘 생각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애니가 거액의 수표를 들고 도망가자 루스터는 진심으로 애니를 죽일 생각으로 뒤쫓는다.
솔직한 악당
해니건이 정신을 차리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단지 돈만이 아니라 애니의 불행을 떠올리며 신나서 계획에 동참했던 해니건이지만 그 순간 열 살짜리 애니가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동생을 말리기 위해 쫓아가면서 외치는 말은 마치 그 자신의 과거에게 외치는 말처럼 들린다. 그리고 이 때 해니건은 처음으로 고아원의 원장다운 대사를 외친다. “아직 어린애일 뿐이야, 나쁜 짓 하지마!”
하지만 작품 속 악당의 팔자가 그렇듯이 해니건의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경찰에 잡힌 해니건은 마지막으로 애니에게 빌어본다. 자신이 얼마나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었는지를 증명해 달라는 미스 해니건에게 애니는 대답한다. "그러고 싶은데요,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해니건은 외친다. "난 네가 싫었어! 내내 싫었어!"
악랄한 해니건에게 단 하나 미덕이 있다면 이것이다. 솔직함. 그 어떤 악당도 미스 해니건만큼 솔직하지 않다. 심지어 해니건은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조차 솔직하다. 홀로 있을 때는 더욱 더. 세상 솔직한 미스 해니건은 뮤지컬 <애니>가 그토록 여러 번 공연되고 영화도 몇 번이나 리메이크 될 만큼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미스 해니건은 애니와 함께 뮤지컬 <애니>를 이끄는 쌍두마차다. 애니는 희망을 잃지 않지만 마냥 착하고 순해빠진 아이가 아니고, 미스 해니건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코믹하게 그려내 악당이지만 애잔하다. 그리하여 이 뮤지컬의 명곡 "Tomorrow"는 애니와 해니건 둘 다를 위한 노래이자 모두를 위한 희망이 된다.
뮤지컬 <애니>는 오는 12월15일부터 세종문화회관에 돌아온다. 미스 해니건은 변정옥 배우와 뮤지컬 무대에 처음으로 도전하는 변정수 배우가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