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27. 에포닌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27. 에포닌

이응

뮤지컬 <레 미제라블>

초연
1985년 Barbican Arts Centre, London.
작곡
Claude-Michel Schönberg
가사 Alain Boublil, Jean-Marc Natel/Herbert Kretzmer (영어 번역)
대본 Alain Boublil, Claude-Michel Schönberg/(영어 대본)
원작 Les Misérables by Victor Hugo
연출 Trevor Nunn, John Caird
무대 John Napier
의상 Andreane Neofitou
조명 lighting by David Hersey
수상 1985 올리비에상 여우조연상(패티 뤼폰, 팡틴역)
2012, 2014 올리비에상 관객인기상
1987 토니상 작품상, 대본상, 스코어상, 여우조연상, 남우조연상, 연출상, 무대디자인 상, 조명상

 

빅토르 위고의 주인공 가운데 가장 불쌍한 인물이 누구인지 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뮤지컬로 만들어진 세 개의 대표작 주인공만 나열해도 그렇다. 제목부터 불쌍한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 <노틀담 드 파리>의 곱추이자 추남인 콰지모도, <웃는 남자>의 유아인신매매단에게 납치되어 얼굴을 찢긴 그윈플렌. 그 중에선 그나마 인생의 꽤 긴 시간을 정상적인 ‘시민’으로 보내며 존경과 사랑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이다. 

한 때 뮤지컬 <레 미제라블>이 너무 좋아서 장 발장이 ‘Who Am I" 를 부르며 ’나는 24601!‘을 외친 덕에 한동안 모든 아이디의 패스워드가 ’24601‘이었던 때도 있었다. 듣고 듣고 또 듣고, 보고 보고 또 본 이후, 좋아하는 캐릭터가 장발장에서 떼나르디에 부인까지 골고루 돌고 돈 이후 종착역은 의외로 에포닌이었다. 초등학교 때 어린이용으로 요약된 장발장을 읽을 때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에포닌이라는 인물은 주인공인 장발장에 못지 않는 엄청난 내적 외적 변화를 겪는다. 뮤지컬에서도 에포닌은 살아남았다.

에포닌은 코젯트가 어린 시절 위탁되어 자랐던 떼나르디에 부부의 다섯 아이들 중 장녀다. 뮤지컬에서 다른 자식들은 언급되지 않는다. 심지어 장남인 가브로쉬가 에포닌의 동생이라는 사실도 언급되지 않는다. 소설 속 떼나르디에의 다섯 자식들 중에서 에포닌만이 중요한 인물로 살아남은 이유는 코젯트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그녀의 처지 때문이다. 

에포닌

에포닌은 한 때 친구였지만 하녀로 전락한 코제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녀로 취급한다. 뮤지컬에는 없는 장면이지만,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코제트가 추운 구석에 앉아 에포닌이 가지고 놀다가 지겨워져서 던져두었던 인형을 살그머니 끌어당겨 안고 있는 장면이 있다. 코제트는 그 인형 때문에 밖으로 쫓겨난다. 장발장이 코제트를 데리고 갈 때, 떼나르디에 부부와 에포닌의 마음을 가장 씁쓸하게 만들었던 장면은 고급 상복을 입은 코제트가 가장 비싼 인형을 안고 행복한 웃음을 짓는 모습이었다. 

이들이 다시 만났을 때 먼저 알아본 쪽은 에포닌이었다. 코제트는 은거하는 장발장의 딸로 살아가며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부녀로 유명해졌다. 한 때는 하녀였던 코제트는 부자집의 숙녀로 자라났고, 에포닌의 부모는 거리의 부랑자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소매치기 신세로 몰락했다. 무엇보다 에포닌이 그토록 짝사랑했던 마리우스는 코제트에게 한 눈에 반해 에포닌에게 코제트의 집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마리우스의 사랑이 자신에게서 영영 멀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포닌은 마리우스에게 코제트의 집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코제트의 집을 털러 간 아버지 일당을 방해하기도 한다. 

에포닌이 이렇게 변한 이유는 순전히 마리우스에 대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다. 호사스러웠던 어린 시절 이후 급격히 변한 거리의 환경 속에서 에포닌은 인생에 빨리 눈 떴다. 에포닌은 마리우스와 혁명군이 바리케이트를 치자 함께 그 속으로 들어가는데, 마리우스와 함께 죽겠다는 혹은 함께 죽고 싶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결국 에포닌은 마리우스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고, 에포닌의 마지막 부탁을 따라 마리우스는 죽은 에포닌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천사도 악마도 아닌 그저 시민

에포닌은 <노트르담 드 파리>의 집시 에스메랄다, <웃는 남자>의 장님 데아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에스메랄다처럼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성적인 희롱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데아처럼 별 같은 순수함의 상징도 아닌다. 에포닌은 남자들과 대등하게 얘기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라 해도 골탕 먹일 만한 재기를 갖고 있으며, 주변의 불한당들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맞설 수 있다. 에포닌을 조금이라도 웃게 만들고 수줍게 하는 것은 단 한 사람, 마리우스 뿐이다. 

코제트가 어린 시절의 악몽을 떨치고 시종일관 천사 같고 선한 인물로 묘사되는 동안, 에포닌의 캐릭터는 주어진 상황으로 인해 완전히 변한다. 에포닌은 악의 결정체 같은 떼나르디에 부부가 세상에 내놓은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측면을 지닌 존재다. 부모의 예쁜 인형 같았던 에포닌이 거리에서 무엇을 배웠든 간에, 뮤지컬 속의 에포닌은 십대부터 이미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스스로 내리고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물론 자식을 그저 이용하는 대상으로 생각했던 부모 탓이기는 하지만. 

에포닌은 자라면서 과묵하면서도 행동하는 인물로 성장했다. 에포닌은 강도이자 소매치기이자 사기꾼인 부모의 성향을 너무나 잘 알기에 마리우스에 대한 자신의 짝사랑도, 아버지가 도둑질하려는 집이 코제트의 집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도 숨긴다. 에포닌은 마치 스토커처럼 마리우스의 모든 동선을 속속들이 다 꿰고 있지만 마리우스에게 한 번도 들키지 않을 정도로 용의주도하다. 마리우스는 도움이 필요할 때 주저 않고 에포닌을 찾아간다. 험한 인생을 살고 있는 에포닌의 ‘전문성’과 에포닌의 선량함을 믿기 때문이다. 

내 사랑은 오직 나의 것

에포닌은 코제트의 집을 찾아 달라는 마리우스의 부탁을 들어준 뒤, 사랑 노래를 부르는 둘을 두고 쓸쓸하게 발길을 돌린다. 자신이 더 먼저, 더 오래, 더 많이 마리우스를 사랑하고 있지만 그 사랑은 오로지 에포닌 자신 만의 것이다. 에포닌의 노래 ‘On My Own'은 짝사랑 노래의 대명사로 유명하다. 이 노래가 정말로 대단한 이유는 에포닌이 자신의 기억 속 과거의 코제트를 소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과거에 코제트가 얼마나 더러운 하녀였는지, 에포닌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혼자인 자신과 마리우스에 대한 마음을 노래한다. 그저 마리우스와 함께 하는 상상을 할 뿐이다. 그 상상도 에포닌 만의 것이다.

그를 사랑해. 하지만 밤이 사라지면 그도 사라져
그가 없다면 강물은 그저 강물
세상도 변해
나무는 앙상하고
길에는 낯선 사람들 뿐

에포닌은 결국 꿈을 이룬다. 마리우스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는 것. 마리우스의 품에 안기는 것. 에포닌은 자신의 인생에 큰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인생이 나아질 수 있다는 유일한 희망을 마리우스에 걸었던 탓에, 에포닌은 삶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에포닌은 사랑에 목숨을 건 여성이 아니다. 인생의 유일한 기쁨에 목숨을 걸었던 인물이다. 그 사랑을 얻기 위해 상대의 미래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넣지도 않는다. 세상에 이렇게 완벽한 짝사랑이 있었던가. 에포닌은 코제트 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는 인간상을 그리는 동전의 다른 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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