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23. 트레이시 턴블래드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23. 트레이시 턴블래드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뮤지컬 <헤어스프레이>

초연 Neil Simon Theatre, 2002
대본 Mark O'Donnell, Thomas Meehan
작사 Scott Wittman and Marc Shaiman
작곡 Marc Shaiman
원작 <Hairspray> 작, 감독 John Waters
연출 Jack O'Brien
안무 Jerry Mitchell
수상 2003년 토니상 작품상, 대본상, 스코어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의상디자인상, 연출상

 

뮤지컬은 흔히들 꿈과 희망과 사랑이 있는 장르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가끔 그 곳에는 <스위니 토드>같은 연쇄 식인 살인마도 있고, <엘리자벳>처럼 죽음이 하나의 캐릭터로 돌아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 진짜 꿈과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한 뮤지컬이 있다. 그저 자신의 꿈을 자신의 일상에서 조금씩 일구어 나갈 뿐인데, 그 꿈이 ‘현실’을 타파해 나간다. 뮤지컬 <헤어스프레이>의 발랄하고 긍정적인 주인공 트레이시다.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캐스트인 멜리사 제럿과 하비 피어스타인.


줄거리

뮤지컬 <헤어스프레이> 의 주인공 트레이시 턴블래드는 볼티모어에 사는 고등학생으로, 춤추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 학교에서 집으로 달려오는 이유는 <코니 콜린스 쇼>를 보기 위해서다. 지역 방송국 쇼다보니 지역 주민들의 관심을 사기 위해 항상 콘테스트를 벌인다. 이 쇼의 주인공들은 눈처럼 하얀 백인들이다. 흑인들은 일주일에 단 하루만 출연할 수 있을 뿐. <코니 콜린스 쇼>의 주인공인 엠버와 링크는 트레이시와 같은 교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트레이시는 이 쇼에서 댄싱퀸을 뽑는다는 말에 당연히 지원하겠다고 나서지만, 트레이시의 엄마 에드나는 댄스대회의 참가를 허락하지 않는다. 비만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시 당해 온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레이시가 아내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지지를 받아서 엄마 몰래 대회에 참가해 점점 더 좋은 성적을 올리며 인기를 끌자, 결국 엄마인 에드나도 합세한다. 두 귀여운 모녀는 후원까지 받으며 뚱뚱한 여성으로서의 트라우마를 벗어던지고 자신 있게 인생을 살아가기로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하지만 엠버의 엄마이자 쇼의 프로듀서인 벨마는 그 꼴을 보아 넘길 생각이 없다. 벨마는 일부러 트레이시를 밀어낼 궁리를 한다. 매일 매일 춤 생각 뿐인 트레이시는 흑인 친구들의 춤에 매료되고, 격의 없고 긍정적인 트레이시에게 쇼의 주인공인 링크도 반한다. 벨마가 일주일에 단 하루인 흑인들의 날을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폐지해 버리자, 트레이시는 흑인 친구들에게 가만 있지 말고 시위를 하자고 선동해 함께 시위를 하다 유치장에 갇힌다. 그 과정에서 링크와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결국 티비 앞에서 벨마의 음모가 까발려지고, 대회에서는 엠버도 트레이시도 아닌 흑인 친구 아이네즈가 댄싱퀸으로 뽑힌다. 악인은 벌을 받고 주인공들은 행복해지고 볼티모어는 인류애로 가득 차오른다.

원작 영화

이 작품의 시대와 배경은 영화 <쉐이프 오브 워터>와 거의 비슷하다. 같은 시대, 같은 도시에 살면서 <헤어스프레이>에서 트레이시가 편견과 혐오를 이기고 꿈과 사랑을 쟁취하는 동안, <쉐이프 오브 워터>의 일라이자는 편견과 혐오를 끌어안고 미지의 물속으로 향한다. 그러니 <헤어스프레이>가 결코 만만한 배경과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쉐이프 오브 워터>의 주인공 일라이자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대신 자신의 마음을 뮤지컬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You Will Never Know' 에 담아 표현하고 상대방은 그 마음을 알아듣는다. 둘의 처지는 너무나 달라보이지만 트레이시 역시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음악을 동원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꿈을 이룬다.

<헤어스프레이>는 존 워터스 감독의 영화가 원작이다. 작품들 가운데 <헤어스프레이>가 뮤지컬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라왔을 때는 놀랐다. 이십대 초반의 조니 뎁이 십대 갱단 두목인 ‘크라이 베이비’로 등장하는, 이미 반쯤은 뮤지컬의 형태를 갖춘 영화 <크라이 베이비>를 더 먼저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보다 존 워터스 감독의 작품이 보수적인 브로드웨이에 뮤지컬로 올라오는 게 가능한 이야기인가 하는 궁금증이 가장 컸다. 

존 워터스 감독의 원작 영화 <헤어스프레이>에서 엄마인 에드나 역할은 드랙퀸 디바인Divine이 맡았다.
디바인의 재현을 위해 에드나 역은 남자 배우가 맡아 왔다. 

정작 뚜껑을 열어보자 먼저 개막한 <헤어스프레이>는 남았고 그 후광으로 뒤이어 개막한 <크라이 베이비>는 사라졌다. <헤어스프레이>의 주인공인 트레이시와 같은 강력한 주인공의 역할을 ‘크라이 베이비’가 해내지 못한 탓이었다. 십대 갱이면서도 순정파고, 화가 나면 눈물을 똑 떨구는 신선한 캐릭터였지만 무대화에는 실패했다. 만화 주인공 같은 ‘크라이 베이비’와 이웃집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친근감을 안겨주는 트레이시 가운데 관객들이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주인공의 조건은 특대 사이즈

‘굿모닝 볼티모어’로 힘차게 무대를 여는 이 십대 주인공은 날씬하고 아름다운 여자배우가 안경을 끼고 머리를 헝클어서 평범한 척 하는 그런 배역이 아니다. 날씬한 배우가 몇 시간이 걸리는 뚱뚱한 분장을 하고 등장해 공연이 끝날 즈음에는 다른 사람처럼 변신하는 그런 배역도 아니다. 환골탈태 한 후에 사람은 외모보다 내면이라는 결론을 내는 인물도 아니다. 트레이시 역의 가장 큰 조건은 특대 사이즈고 공연 기간이 끝날 때까지 유지해야만 한다. 

뚱뚱한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이 <헤어 스프레이>가 처음은 아니다. 트레이시가 특별한 건 그 ‘뚱뚱함’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트레이시는 거울에 비치는 스스로의 모습에 큰 불만이 없다. 거울을 보며 꾸미기를 좋아하고, 라디오를 틀어놓고 정신없이 춤을 추며, 친구와 학교에서 수다를 떨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금지한 TV 프로그램을 몰래 보는, 넉넉하진 않지만 자존심은 지킬 수 있는 삶을 사는 여자아이다. 

하지만 이 평범한 아이의 일상에 일대 지진이 온다. 그것도 누구나 꿀 수 있는 ‘하찮은’ 꿈으로 인해서. 트레이시의 꿈은 ‘코니 콜린스쇼’에 나가서 ‘헤어스프레이 댄스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이 꿈의 첫 장애물은 놀랍게도 트레이시와 똑같은 몸매를 지닌 엄마 에드나다. 에드나는 어려서부터 뚱뚱한 몸매 때문에 놀림 받고 위축되었기에 딸인 트레이시가 남 앞에서 자신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험담을 듣게 될까봐 걱정한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에드나에게는 없는 아군들이 있다. 단짝 친구인 페니와, 댄스 경연대회에 나가기 위해 준비하면서 알게 된 흑인 친구인 시위드와 그의 친구들이다. 트레이시는 이 과정에서 소극적이었던 엄마도 변화시키고 아버지의 열렬한 지지를 얻어내며 흑인 친구들의 우상이 된다. "You Can't Stop the Beat" 는 트레이시의 주제가와도 같다. 그 길 위에서 링크를 만나 사랑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링크와의 관계는 ‘종착역’이 아니라 작품 안에 존재하는 트레이시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 중의 하나다. 트레이시는 링크와의 관계를 위해 자신의 생각을 바꾸거나 자신의 꿈을 수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십대의 트레이시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

트레이시의 약점은 소수자성이 아닌 특권이다

사람들이 나를 볼 땐 왜 내 말은 안 듣고
내 색깔을 먼저 볼까?
가끔 날 도와주려는 사람도 차별이 뭔지를 보여줄 뿐
색맹이 되란 게 아니잖아
노력을 하면 되잖아
새까만 포도가 더 달콤해
말하지 않아도 진실은 거기에
더 까만 초콜렛의 더 진한 맛, 그게 진실의 맛

시위드가 레코드샵에서 부르는 노래의 첫 부분이다. 트레이시는 시위드가 말하는 "차별이 뭔지를 보여주는" 백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트레이시. 그 앞을 가로막는 벨마와 그의 딸 엠버의 존재는 오히려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 뮤지컬에서 영웅이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목표를 향해 가기 위한 '장애'는 트레이시가 가진 금발의 백인이라는 '특권'이다.

트레이시의 캐릭터가 시험에 드는 것은 벨마가 고의로 ‘흑인의 날’을 폐지하자 흑인들과 함께 항의 시위에 나설 때다. 트레이시는 상심하고 화가 난 흑인 친구들에게 시위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유치장에 들어간다. 흑인들을 수렁에서 건져주는 ‘백인 우상’이 될 판이다. 만약 트레이시가 그저 '좋은 성품'과 순진한 믿음으로 이 시위를 조직했다면 이 뮤지컬과 트레이시는 그저 그런 작품 속의 그저 그런 인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이 세상에 차별과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뚱뚱한 여자'라는, 어떻게 보면 인종을 초월해 차별 받는 핸디캡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 에드나가 그 핸디캡을 끊임없이 지적해 온 덕에 트레이시는 약자의 감수성에 공감할 수 있다. 트레이시의 행동은 순진함이 아니라 긍정에서, 그리고 자신을 둘러 싼 편견을 깨듯이 인종에 대한 편견도 깰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작품의 마지막에 결국 미스 헤어스프레이로 뽑히는 것은 벨마의 딸인 엠버도 트레이시도 아닌 시위드의 여동생이다. 지극히 존 워터스다운 결말이자, 흑과 백이 나뉘지 않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과도 같은 결말이다. 어쩌면 트레이시라는 캐릭터는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온 캐릭터일지도 모르겠다. 마름에서 ‘초마름’으로 가는 길이 광고판에 붙어있는 오늘날이라면, 트레이시는 그 광고판을 찢고 나오는 영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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