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맘마미아!>
영화 <맘마미아! 2>가 개봉했다. 팬덤 사이에서는 맘마미아 1편을 대관해서 함께 보며 싱얼롱을 계획할 정도로 열풍이 거세다. <맘마미아!>는 런던과 뉴욕의 뮤지컬씬에서도 정말로 독특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도나 역시 독보적인 캐릭터이기에 뮤지컬 여성 캐릭터를 생각할 때 누구라도 가장 먼저 언급하거나 아끼지 않을 수 없다. 맘마미아(Mamma Mia)는 이탈리아어로 엄마야! 정도의 감탄사라고 하는데, 제목부터가 관용적으로 '아버지'라 불리는 신(Oh My God)을 주워섬기는 대신 내게 육신을 준 엄마를 부르는 감탄사다. 이 뮤지컬은 여성이 이끈다는 점에서만큼은 무대 버전이고 영화 버전이고 벡델 테스트를 들이밀 필요도 없을 만큼 완벽하다. 특히나 주인공인 도나가 완벽하지 않기에 더욱 완벽하다.
지중해의 작은 섬, 칼로카이리. 그 섬의 작은 호텔 주인 도나의 딸 소피가 결혼을 한다. 결혼식에 초대받은 중년의 세 여자, 세 남자가 도착하는데 세 여자가 도나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는 것에 비해 세 남자의 도착은 어딘가 비밀스럽다. 아버지 없이 큰 소피가 엄마의 옛 일기장에 쓰여 있던 남자들 가운데 아버지로 추정되는 세 사람을 엄마 몰래 섬으로 초대한 것. 소피의 아버지 찾기는 난항을 겪고 도나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과거의 세 남자를 보며 다시 가슴이 설렘과 동시에 과거 이별의 고통이 새삼스레 아파오는데, 결혼식 전날 밤의 파티에서 세 남자는 동시에 자신이 '아버지 후보'라는 사실을 깨닫고 소피를 에스코트 하겠다고 나선다. 마침내 결혼식 날 소피는 자신을 키워준 엄마에게 에스코트를 부탁한다. 평생 자신의 결핍이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소피는 어머니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채워주었나를 깨닫는다.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소피는 결혼을 취소하고 섬 밖의 인생을 찾아 떠나고 도나는 세 남자 중 샘과 결혼한다.
평단의 외면, 관객의 사랑을 받은 여성 창작진과 배우들
이 작품이 처음부터 모두에게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도 작품의 코어인 초연 창작진은 제작자도 여자, 연출가도 여자, 작가도 여자, 주인공도 여자, 연출가도 여자였다. 그러나 초연 당시 ‘쥬크박스 뮤지컬’이라는 깔아보는 명칭으로 불렸고, 작품성은 없고 상업적기만 하다며 평단의 외면을 받았다. 런던 공연계인 웨스트앤드의 연극과 뮤지컬을 대상으로 하는 올리비에 어워즈에서 로지 역의 제니 갈로웨이가 간신히 여우 조연상을 수상했을 뿐이고, 2001년 10월 뉴욕에서 개막해 엄청난 흥행 성공을 거두었지만 2002년 토니 어워즈에서는 단 한 분야도 수상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 시즌 최대 히트작이자 화제작이었고 <라이언 킹>에 맞먹는 사전예매율을 기록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에 가까운 악평을 들어야만 했다.
덕분에 뮤지컬 <맘마이아!>는 뉴욕과 런던의 공연계를 쥐락펴락 했던 <뉴욕 타임즈>나 <더 가디언> 등 유력지 비평가들이 관객에게 더 이상 이전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례로 등극했다. 비평가들이 악평을 퍼붓고 상 하나 주지 않아도 <맘마미아!>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저조한 예매율로 허덕일 때조차 극장을 꽉꽉 메웠다. 지금까지도 런던에서 가장 오랫동안 공연된 작품 7위, 뉴욕에서 가장 오래 공연된 작품 9위에 랭크되어 있다.
<맘마미아!> 가 개막했을 당시 뉴욕은 9.11 사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였고 개막예정이었던 대부분의 작품이 취소되거나 조기 폐막할 정도로 사람들이 한 데 모이기를 두려워하던 시기였다. 배우 메릴 스트립은 뮤지컬 <맘마미아!>가 사람들의 두려움을 없애고 웃음을 되찾아주었다며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후 메릴 스트립은 2008년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 버전의 주인공 도나 역을 맡아 그 인연을 이어갔다.
도나
이 뮤지컬이 처음 개막했을 때, 철없어 보이면서도 도무지 미워할 구석을 찾을 수 없는 소피라는 캐릭터도 발랄했지만, 혼자서 딸을 키우며 호텔을 운영해온 도나가 뿜어내는 매력이 무시무시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도나는 미혼모다. 그것도 비슷한 시기에 세 남자와 섹스를 나눈 발칙한 인물이다. 도나가 임신을 하자 도나의 엄마는 딸을 내친다.
도나는 자신이 아이를 낳은 섬에서 호텔을 운영하며 딸을 키운다. 말이 호텔이지 변기가 고장 나면 그저 덮어두고 기다려야 하고, 덧창이 떨어지는 낡고 작은 여관 같은 곳이다. 그럼에도 딸인 소피와 도나는 지중해의 햇살만큼이나 구김살 없이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나가 딸인 소피에게 아버지‘들’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은 이유는 아버지 후보자가 셋이어서가 아니라, 누가 아버지인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와도 도나는 아이를 이유로 생을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여성이 임신을 하면 책임을 지기 위해 결혼을 선언 하는 남자들이 칭송받는 세상에서 도나는 홀로 소피를 키우기를 선택한다.
도나의 친구들
도나의 눈 앞에 과거의 세 남자가 한꺼번에 나타났을 때 도나의 반응은 그보다 더 인간적일 수가 없다. 당황하고 설레고 화나고 두근거린다. 사실 아바의 노래 중에 이렇게나 복잡한 내용이 담긴 가사는 많지 않지만, 이들은 딱 맞는 노래를 장면마다 찾아냈다. 아바 노래의 모든 가사를 다 카드에 써서 등장인물과 스토리와 가사를 매치시키는 작업을 통해, 히트곡보다 드라마에 맞는 노래를 매칭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짠 대본작가 캐서린 존슨과 연출가 필리다 로이드 덕분이다.
이 작품의 초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피와 소피의 친구들이다. 그리고 곧 그들의 이십년 후 모습인 듯한 도나와 도나의 친구들이 도착해 나이가 적거나 많거나 똑같이 발을 구르고 어깨를 두르고 노래를 부르고 머리카락을 펄럭이며 선창가를 달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피와 친구들에게 앞으로 써나가야 할 일들이 더 많다면, 도나와 친구들에게는 회상할 일들 투성이다.
사실 도나와 친구들은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일 수도 있다. 카리스마 있는 주인공과 외면을 지향하는 친구와 내면을 지향하는 친구. 여성스런 키다리와 여성성과 담을 쌓은 듯한 땅딸막한 친구. 그러나 이들이 전형성을 벗어나는 것은 그들이 도나의 연애를 도와주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니라, 오로지 도나와의 관계 그 자체에 집중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고 중년이 되었어도 이들 역시 소피와 친구들처럼 호기심 천국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친구가 말려도 친구의 옛 남친들을 보기 위해 한 달음에 달려가는 개구쟁이들이다.
운명보다 인생을 택한 도나
뮤지컬 <맘마미아!>의 도나에게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래 전 샘이나 해리, 빌 등을 만났던 시절에는 도나도 운명을 믿었다. 소피를 낳은 이후 운명이란 일상보다 못한 말이 되었고, 오히려 그 운명이 도나를 찾아 온 순간에도 도나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자신의 일상의 연속에 우위를 둔다. 도나의 일차적인 인생 목표는 분명히 소피를 키우는 것이었지만, 거기에 더해 자신의 일을 통해 도나는 섬 안에서 사랑받는 인물이다.
도나의 인생관은 명료하다. "날 닮았으면 스물에 결혼하지는 않겠지!" 하는 말에는, 소피가 자신처럼 너무 일찍 어딘가에 정착하기보다 더 넓은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더 뒤져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세 번 결혼하고 이혼한 타냐, 결혼 생각이 없는 로지, 아이만 있는 도나는 마치 결혼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는 집합체 같다.
뮤지컬 <맘마미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 하나 타인의 깨달음을 위해 희생되지도 피 흘리지도 않으며,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변덕스럽게 성격이 변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처음 등장하던 모습 그대로의 인물로 앤딩 크레딧을 맞이하며 그 안에서 조금씩 알에서 깨어나듯 성장하고 변화한다. 독립적인 도나, 세 번의 결혼을 경험한 타냐, 진취적인 로지, 호기심 많은 소피 등, 각 인물들은 외모와 나이가 아닌 그들의 성격이나 주어진 상황으로 정의된다.
게다가 모든 인물들은 인간적인 약점 또한 적절하게 지니고 있다. 높은 자존심,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 덜렁거림, 일을 저지르고 봄. 이토록 명확한 인물들이 결혼식을 중심으로 모여 소피의 아버지를 찾고 있는데, 이 여성들은 연애상담이 아니라 그들의 인생을 이야기하느라 바쁘다. 사랑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 깨달음은 그 뒤에 이어서 오는 것이다.
사소하고 신나는 이야기
이 작품 안에서 도나의 클라이맥스는 샘에게 청혼을 받을 때가 아니다. 20년 동안 키워 온 딸이 결혼식에 함께 들어가자고 할 때다. 딸의 머리를 빗기고 꽃을 꽂고 옷을 입히고 화장을 해주며 손 안에서 날아가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을 두 사람이 나누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노래 “Slipping Through My Fingers”는 이 뮤지컬을 통해 발표된 지 20년 만에 새 생명을 얻었다.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시간을 잡아보고 싶은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이 노래처럼 이 장면에 어울리는 노래가 있을까?
뮤지컬 <맘마미아!>는 소위 ‘빅 픽처’가 아닌 ‘신변잡기’의 관계들을 다룬다. 이들 중 누구도 어떤 전쟁에도 나서지 않고 성공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다. 이틀 간의 이야기 속에서 이들은 과거를 회상하고 결혼식을 치르고 집을 장식하고 파티를 하고 결혼식을 치른다. 이런 소소함 없이 누가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까. 여성들은 꼭 뜨개질 같은 이야기만 한다며, 큰 세상보다 집안에 어울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비하에도 여성 관객들은 이 뮤지컬을 선택했다. 마치 영화 속의 그리스 여인들처럼. 앞치마와 국자와 등에 짊어진 땔감을 내팽개치고 "오 예!"을 외치며 "Dancing Queen"을 부르며 달려가던 여인들처럼.
그리스는 유럽 안에서도 가장 여권이 낮은 국가로 손꼽힌다. 그런 그리스의 조그만 섬에서 여인들이 도나와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은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심지어 뮤지컬 안에서 가장 큰 꿈을 지닌 인물인 스카이조차 소피에게 끌려 ‘신변잡기’ 안의 세계로 들어온다. 여성들이 여성의 이야기를 쓸 때, 여성적 글쓰기가 구현될 때, 그들이 만들어낸 신변잡기는 헤라클레스의 여정에 맞먹는 힘을 지닌다.
물론 이 작품이 기존의 뮤지컬의 특징을 모두 지우지는 않는다. 뮤지컬 특유의 짝 맞추기가 여기서도 큰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인물들이 교과서처럼 말하고 행동하지 않기에, 이 작품은 더욱 재미있다. 관객들은 자신과 닮은 누군가를, 약점 많고 망설이고 결단 내리지 못하는 누군가를 작품 안에서 찾고 공감한다. 그들이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에 위안을 받는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다면 책을 쓰고 연구를 하고 웅변을 할테지만, 뮤지컬에는 큰 즐거움과 즉각적인 깨달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