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24. 엘 우즈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24. 엘 우즈

이응

뮤지컬 <Legally Blonde>

초연 Palace Theatre, 2007
대본 Heather Hach
원작 Amanda Brown(2001년 영화)
가사 Laurence O'Keefe and Nell Benjamin
작곡 Laurence O'Keefe and Nell Benjamin
연출/안무 Jerry Mitchell

 

금발이 뭐가 너무해?

2001년에 개봉한 영화 <Legally Blonde>의 한국 번역 제목은 <금발이 너무해>다. 원제를 직역하면 ‘법적인 금발’ 로, 주인공인 엘 우즈의 정체성과 영화의 방향이 이중적인 유머 감각으로 압축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 제목에서는 그저 금발 만이 강조되고 심지어 '너무하기까지' 하다. 대체 금발의 엘 우즈가 뭐가 그리 너무한지 보기 위해 관객들은 극장을 찾는다. 2001년에 ‘너무’는 부정적인 의미의 형용사로만 쓰였다. 2018년의 ‘너무’는 부정과 긍정 양쪽 모두에 쓸 수 있는 형용사가 되었지만 동사형으로 쓰일 때는 여전히 '부정적인 과함'을 의미한다. 엘 우즈의 무엇이 그렇게 너무 과했을까?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아름다운데 심지어 똑똑해서? 영화가 개봉한지 17년, 뮤지컬이 개막한지 11년이 지났지만 엘 우즈는 여전히 인상적이다. 

브로드웨이 초연 포스터

줄거리

주인공 엘 우즈는 캘리포니아의 부유한 부모님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금발’의 패션 전공자. 오랫동안 사귀었던 남친 워너가 하버드 법대에 진학하면서 벼락부자인 엘과는 격이 맞지 않아 결혼할 수 없다며 뻥 차고 떠나자, 엘은 자신도 같은 곳으로 진학해 사랑을 되찾기로 결심한다. 기상천외한 자기소개서는 물론 시험 점수까지 채운 엘은 캘리포니아 스타일의 행동거지 때문에 하버드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다. 그러나 이미 워너는 좋은 집안의 수재 비비안과 약혼한 상태. 

자신을 무시하는 워너 때문에 공부를 시작한 엘은 조교이자 선배인 에밋의 도움으로 점차 수업을 따라가기 시작하고 마침내 무섭기로 소문난 칼라한 교수의 인턴으로까지 선정되어 대학 시절의 클럽인 델타누 선배인 에어로빅 강사 브룩의 살인사건 변호팀에 참여한다. 칼라한은 브룩과의 불륜을 주장하던 직원이 게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엘 덕분에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칼라한은 엘에게 추근거리고, 엘은 모두가 자신의 외모와 금발만을 보는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하지만, 작별인사를 하러 갔던 폴렛의 미용실에서 자신을 지지해주는 비비안과 조우하면서 다시 법정으로 돌아와 브룩의 변호를 맡는다. 칼라한은 쫓겨나고 엘은 첫 승소를 얻어낸다. 분홍 드레스를 입고서.

오랜 금발 후려치기

금발에 관한 편견을 나열해 보자. 머리가 나쁘다, 가슴이 크다, 공주병이 심하다, 외모를 믿고 노력하지 않는다 등. 주인공인 엘은 ‘금발’에 관한 모든 편견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여성을 머리카락 색으로 분류해서 고집스런 붉은 머리, 지적이지만 지루한 갈색머리, 악마적인 검은 머리, 섹시하지만 텅 빈 머리의 금발로 분류하는 농담은 서구 사회에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사실은 이건 농담이 아니다. 여성을 오직 성적인 대상으로 분류하고, 그 중 가장 가치가 높다고 여기는 ‘금발’에 백치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한 것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남자가 '금발의 미녀'를 손에 넣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그래서 남성들의 손에 닿지 못할 금발 미녀들은 '백치'가 된다. 높이 매달린 포도는 모두 신포도가 되는 마법이 벌어진다. 

엘 우즈는 편견과 달리 백치가 아니라 머리가 비상하게 잘 돌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캐릭터는 첫 장면에서 워너의 청혼을 기대하며 쇼핑에 나섰을 때 이미 드러난다. ‘돈 많은 금발 바보를 어떻게 등쳐먹는지 보여주지!’ 하고 신나서 다가온 점원을 단 두 개의 질문으로 물리쳐버리고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드레스를 획득한다. 물론 분홍색이다.

핑크색 주인공

뮤지컬 <리걸리 블론드>는 개막하기 전부터 온통 분홍색 일색인 마켓팅을 시도했다.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들은 이 작품이 전형적인 금발미녀가 아주 조금 머리를 쓰고 대부분은 금발 머리카락과 섹시한 몸매를 사용해 남성의 사랑을 획득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의 마켓팅은 영화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미인이 하버드 법대에 진학해 변호사가 되다니 말도 안 돼! 

하지만 엘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를 보여준다. 처음 시작할 때 엘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친구인 워너에게 청혼을 받을 생각 뿐이다. 워너에게 차인 이후 엘은 급속도로 변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엘이 차이고 난 후 부르는 노래인 '긍정적으로'를 뜯어보면, 엘은 변한 게 아니라 원래 지니고 있던 것을 끄집어낸 것 뿐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엘은 학부에서 이미 패션 전공으로 4.0의 평점을 획득한 수재다. 

학생들을 쥐어짜기로 유명한 하버드 법대에서도 엘의 개성은 지워지지 않는다. 밝은 캘리포니아의 태양이 늘 엘의 머리 위를 비추는 것만 같다. 영화가 개봉했던 2001년이나 뮤지컬이 개막했던 2007년은 페미니즘이 사회적인 큰 이슈로 회자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페미니스트에 관한 편견은 극중 레즈비언 캐릭터로 등장하는 이니드를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자의식 과잉에 검은 테의 안경을 쓰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야상을 입는 거친 말투의 채식주의자. 과거 ‘운동권’의 여성들에게 요구되었던 모습 그대로다. 금발에 대한 편견만큼이나 '전형적'이다. 하지만 엘은 달랐다. 사랑의 라이벌인 비비안이 '분홍으로 빼입는 거 합법이긴 해?’ 하고 비아냥 거려도 ‘분홍은 내 상징이거든!’ 하고 대답한다. 변호사란 모름지기 블랙 앤 화이트의 무채색의 옷을 입는 직업이라는 고정관념도 엘 앞에서는 소용없다. 

엘도 처음에는 하버드의 전통을 따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엔 엘의 스타일로 재해석된 형태를 띈다.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엘은 결국 입학시험 공부를 하던 시절의 스웨트 셔츠를 다시 입는데, 그 셔츠의 색도 물론 분홍색이다. 엘은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분홍이든 폼폼이든 반짝이는 큐빅 핀이든 매니큐어든,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 자신의 취향을 버리면서까지 다른 무엇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변호사'가 되기 위해 일정한 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는다.

전형적인 장면 뒤집기

영화에서는 엘과 사랑에 빠지는 에밋이 그저 보조적인 역할에 그칠 뿐이지만 뮤지컬에서는 다르다. 둘 사이의 로맨스를 강조하기 위해 에밋이 엘의 공부를 도와주고, 그는 폴렛의 강아지를 찾아가는 장면에서도 동행하여 가장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영화 속에서 엘이 순전히 혼자의 힘으로 해낸 것들이 뮤지컬 안에서는 에밋의 도움을 통해 이루어진다. 

대신 영화에는 없는 장면이 등장한다. 에밋에게 새 옷을 사주는 장면인데, 전형적인 로맨스의 남녀의 역할이 뒤바뀐다. ‘남자 옷 골라주는 거 너무 좋아!’라고 외치는 엘은 자신의 카드로 에밋의 양복값을 낸다. 똑같은 장면이 뮤지컬 <선셋 블러바드> 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선셋 블러바드>의 조는 노르마가 사주는 비싼 옷을 입으면서 자존심에 큰 손상을 입는다. 노르마는 ‘슈가 대디’를 여성으로 바꾼 것일 뿐이고 조는 자신을 창녀와 다름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리걸리 블론드>의 에밋은 자신을 위해 엘이 신경을 쓰고 돈을 쓰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이 즈음, 에밋은 이미 엘과 사랑에 빠진 후다. 부자인 남자가 여성을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펑펑 돈을 쓰는 장면들은 오랫동안 로맨스의 중요한 장면이었다. 이번 시즌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한 뮤지컬 <프리티 우먼>에서도 창녀인 비비안이 남자 주인공의 한도 없는 카드를 들고 로데오 거리에서 원없이 돈을 쓰며 변신하는 장면이 하이라이트 가운데 하나다. 여성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여성에게 이 옷 저 옷을 입혀보고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옷으로 결제해버리는 돈 많은 남자들의 모습이 그려지곤 했다. 하지만 엘이 에밋에게 옷을 사줄 때, 엘은 그 옷이 에밋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안의 나는 변하지 않아.’ 하고 말하는 에밋에게 엘은 ‘나도 그래’ 하고 답한다. 에밋이 이 대사로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면, 엘의 자존심은 이미 변명할 필요도 없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로맨스보다 강력한 여성 동료들

분명히 로맨틱 코미디로 분류되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에서 엘을 변화시키는 것은 새로운 사랑인 에밋도 지나간 사랑인 워너도 아니다. 엘로 하여금 법이 인간을 위해 작동하는 방식을 처음으로 알려주는 폴렛이나, 자신의 편에 서서 싸워주는 어제의 사랑의 라이벌 비비안,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살인 누명을 쓴 의뢰인이자 델타 누 클럽의 선배인 브룩 등 온통 여성들 뿐이다. 

처음에는 마치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전형적인 남성들의 틀 안에서 잘난 남자 하나를 두고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이 여성들은 남성이라는 그다지 입맛 땡기지 않는 상품을 뒤로 밀어두고 진정한 상대방의 가치를 알아보게 된다. 엘이 칼라한 교수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하는 걸 본 워너는 ‘그런 식으로 법정의 파트너를 얻으면 참 쉽겠구나!’ 하고 빈정거리지만 비비안은 그런 워너에게 ‘입 닥쳐 워너!’라고 일갈한다. 이 일로 하버드 법대를 떠나려는 엘의 발길을 잡은 것도 에밋이 아니라 비비안과 폴렛이다. 에밋은 심지어 사랑하고 있다고 솔로 송을 부르지만 엘을 잡지 못한다. 그가 엘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법정에서 칼라한 교수를 대신해 엘의 변호할 권리를 인정해주는 법안을 찾아올 때다.

오르페(폴렛, 왼쪽), 로라 벨 번디(오른쪽, 엘 우즈) ⓒPaul Kolnik

엘에게 주어진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2001년이라는 시대가 주는 한계일 것이다. 작품 속에는 흑인이나 동양인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뮤지컬 무대에서만 다인종 캐스팅 권유에 의해 흑인이 간신히 두어 명 등장할 뿐이다. 엘이 모든 걸 다 가진 인물로서 일방적으로 주변에게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계몽적인 역할을 한다는 비난도 물론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엘의 존재는 유효하다. 엠마 왓슨이 속옷을 입지 않고 찍었던 화보에 쏟아졌던 비난과 찬사의 두 갈래는 뮤지컬 <리걸리 블론드>의 엘과 비슷한 양상을 띈다. 여성이 원한다면, 하게 하라. 엘은, 그 방식이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고, 그것이 매우 재밌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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