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17. 로리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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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17. 로리 윌리엄스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뮤지컬 <오클라호마!(Oklahoma!)>

초연 1943년, St. James Theatre
작곡 Richard Rodgers
작사 Oscar Hammerstein II
대본 Oscar Hammerstein II
원작 <Green Grow the Lilacs> by Lynn Riggs
수상 1993 Special Tony Award (초연 50주년 기념)
1944 special Pulitzer Prize

 

브로드웨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첨예한 상업 극장가의 명칭이지만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지 사실상 백년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뮤지컬 <오클라호마!>는 현재 우리의 뇌리에 박혀 있는 춤과 노래가 있는 드라마라는 ‘뮤지컬’의 개념을 정립시킨 작품이다. 이전까지의 뮤지컬은 아예 드라마 자체가 없거나, 있더라도 엎치락뒤치락 우연에 우연이 겹치는 가벼운 뮤지컬 코미디였고, 어느 쪽이든 드라마보다는 히트를 목표로 하는 곡들이 우선이었다. 

1927년에 개막했던 뮤지컬 <쇼 보트>를 통해 복잡다단한 드라마를 무대 위에서 처음으로 구현해본 작가 오스카 해머스타인 쥬니어가 <오클라호마!>에 합류하면서 뮤지컬은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하기 시작했다. 진지한 원작 대본을 뮤지컬로 옮기려는 시도에 못지않게 음악적인 변화도 드라마틱했다. 그 전까지의 뮤지컬들은 대부분 재즈 음악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었다. 작곡가인 리차드 로저스 역시 다채로운 재즈 넘버를 내놨던 이십여 년 경력의 재즈 배테랑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한층 진지한 방향으로 이끌고 싶었던 작가 오스카 해머스타인 쥬니어는 음악 스타일도 클래시컬하길 바랐다. 

1943년 3월 개막했을 때부터 이 뮤지컬이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제작자들은 작품의 흥행을 위해 프리뷰 기간 중에 2차 대전에 참전하러 가기 전, 뉴욕에서 휴가를 즐기던 군인들에게 티켓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곧 작품은 엄청난 입소문을 타며 더 이상 무료 티켓을 구할 수 없는 가장 핫한 작품으로 떠올라 당시 가장 롱런한 뮤지컬에 등극했다. 이후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 작품을 모델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드라마의 개연성이 중요해지고, 곡보다 대본이 먼저 쓰이는 시대가 시작되었고, 브로드웨이는 진정한 황금기를 맞이했다. 그렇게나 중요한 이 작품의 주인공이 바로 로리다.

오클라호마, 새로운 미국

Josefina Gabrielle as Laurey in Oklahoma, Photograph: Michael Le Poer Trench

로리는 오클라호마의 작은 농장의 주인으로 쥬드라는 괴팍한 일꾼을 두고 있다. 다른 주인공은 떠돌이 카우보이 컬리다. 동료들과 마을에 머물면서 로리와 썸을 타는 중이지만 쥬드도 로리를 짝사랑 하던 차라 두 사람 간에는 긴장감이 흐른다.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에 누구와 함께 가느냐 하는 문제로 이리 저리 썸을 타는 마을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로리는 컬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컬리 앞에서 쥬드의 초청을 받아들인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미혼 여성들이 만든 피크닉 바구니 경매. 쥬드는 로리의 바구니에 자신의 재산을 몽땅 건다. 쥬드의 폭력적인 성향을 잘 알고 이를 우려한 마을 사람들은 로리의 바구니가 쥬드에게 팔려가지 않게 하려고 저마다 돈을 걸어보지만 쥬드처럼 전재산을 걸 수는 없다. 카우보이인 컬리가 자신의 말과 총, 안장까지 팔아 로리의 바구니를 사는데 성공하자 화가 난 쥬드는 컬리를 죽이려 들다가 마을 원로인 엘러 아주머니에게 들켜 실패하자 축제가 끝난 후 로리를 협박한다. 로리는 컬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컬리는 로리에게 청혼을 한다. 이 때 컬리는 자신이 농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로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컬리라는 사실에 확신을 가진다. 오클라호마가 미국의 주로 편입 승인이 나던 날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는데 술 취한 쥬드가 칼을 들고 난입해 컬리를 죽이려 들다가 사고로 스스로를 찔러 죽게 되자 순회판사가 컬리의 정당방위를 선고하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신혼여행을 떠난다.

로리와 컬리만 따라가면 매우 명료하고 간단한 줄거리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작품 안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여러 남자 사이에서 사랑 받기를 즐기는 로리의 친구인 애니, 마을의 원로이자 로리의 이모인 엘러 부인, 아랍인 행상인 하킴, 애니와 사랑에 빠진 윌, 컬리를 두고 로리와 경쟁하는 거티 등 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등장해서 작은 커뮤니티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린다. 이 작품이 75년 전인 1943년에 초연된 뮤지컬이고 원작이 1931년에 공연된 연극이었음을 감안하면 주인공이 로리가 홀로 씩씩하게 농장을 이끌어 가는 ‘여장부’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로리에게 주어진 불가능한 선택지

하지만 ‘여장부’는 거기서 끝이다. 로리는 서부시대가 끝나고 미국인들이 농장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과도기를 배경으로 ‘아메리카 드림’을 실현하는 캐릭터다. 그러나 남자라는 방어막도 없고, 부모가 세상을 떠난 독신 여성인 로리는 남성들에 의해 선택받는 여성이라는 지점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극 중에서 로리가 완벽하지 못한 이유는 그를 지켜줄 남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온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모와 함께 살고 있지만 여전히 독립하기에는 미온한 존재다. 남편이나 아버지나 아들이 없기 때문에. 과부로 추정되는 이모는 재혼시장에 진입할 거라는 기대조차 없는 중성의 인물이고, 농장을 꾸려가기 위해서라도 온 마을 사람들이 로리에게 결혼할 것을 종용하는 상황이다.

컬리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여성에게 관심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로리는 “Many a New Day"를 부르며 왜 멀쩡한 여자들이 남자 때문에 울고 웃는지 모르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그러나 정작 그 유명한 ‘드림 발레’ 즉, 한낮의 꿈속에서 최악의 상황을 맛본다. 꿈에서 컬리에게서 청혼을 받고 행복한 얼굴로 면사포를 올리고 보니 눈앞의 남편은 쥬드다. 자신을 구하려고 온 컬리가 쥬드의 칼에 찔려 죽는 걸 보고 엉엉 울면서도 쥬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해 몸부림치다가 악몽에서 깬다. 

마치 2막의 결말을 알려주는 스포일러와도 같은 이 드림 발레는 로리의 욕망의 대상인 컬리와 현실적인 선택의 대상인 쥬드 사이에서 누구도 선택하지 못하는 내적 갈등의 상징이다. 로리는 이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노처녀에서 벗어나 자신을 보호해줄 남편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 모두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건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쥬드는 포르노에 환장하는 변태지만 농장일에 능하고, 컬리는 다정하고 잘 생겼지만 농장일을 전혀 모르는데다 언제 훌쩍 떠나버릴지 알 수 없는 카우보이다.

1998년, 뮤지컬 <캣츠>와 <미스 사이공>등을 연출한 것으로 유명한 트레버 넌의 버전에서 로리는 다른 여성 등장인물과 다르게 혼자서만 치마 대신 오버롤 청바지와 붉은 체크 셔츠를 입어 억척스러운 농장주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반올림 머리를 흰 수건으로 묶어 여성스러움과 순수함을 강조했다. 비록 휴 잭맨이 컬리로 출연해서 모든 포스터와 티저를 그의 얼굴로 도배했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을 딱 한 명만 꼽으라고 한다면 컬리가 아니라 로리다.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이 가장 선호했던 여주인공의 시초인 로리는 ‘말괄량이’지만 순수한 여성 주인공의 시초이자 표상이다. 남자와 동등하게 얘기할 줄 알고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행색에 솔직하고 직설적이지만 내면은 한없이 여린 인물. 이러한 특징은 이후 디즈니의 여자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로맨틱 코미디를 비롯한 여성 주인공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내 농장, 내 집, 내 삶을 지키는 여자

<오클라호마!>를 7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볼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리라는 인물을 다시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여성에게 참정권조차 없었던 시절의 미국을 배경으로 로리가 주어진 수많은 한계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절반이라도 실현해 나가기 때문이다. 작품의 플롯 역시 로리의 의지를 따라 진행된다. 로리는 이후에 제작된 뮤지컬들이 '말괄량이지만 순수한' 외적인 정형성만을 가져와 사골처럼 우려먹으며 무한반복 할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이다. 

물론 결국은 여성을 남성에게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서 정의해 버리기 때문에 로리라는 캐릭터의 한계는 명확하다. 하지만 <오클라호마!>에서 로리를 통해 여성이 배우, 양가집 규수, 가정교사, 하녀, 창녀가 아니라 자신의 집과 직업과 지켜야 할 것을 가진 인물로서 자리매김한 이후, 다양한 직업의 여성들이 뮤지컬에 등장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 다양한 직업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연애를 한다는 플롯이지만. 

해머스타인의 대본 속의 여성들은 인종적 편견과 타문화에 대한 무지 속에서도 인간애를 지닌 마지막 보루 같은 캐릭터다. 또한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오늘날에 와서도 발전적인 해석이 가능하도록 문을 빼꼼 열어놓았다. 그 최초의 인물이 바로 로리 윌리엄스, 뮤지컬 <오클라호마!>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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