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13. 노르마 데스몬드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13. 노르마 데스몬드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뮤지컬 <선셋 블러바드(Sunset Blvd.)>

초연 1993, Adelphi Theatre, West End, London.
작곡 Andrew Lloyd Webber
작사 Don Black, Christopher Hampton
대본 Don Black, Christopher Hampton
연출 Trevor Nunn
안무 Bob Avian
원작 <Sunset Blvd.(1950)> Filmed by Billy Wilder

 

뮤지컬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웨버의 최대 히트작인 <오페라의 유령>에는 악마 같은 인물이 나온다. 바로 주인공인 ‘유령’이다. 그는 괴물로 태어나 어머니에게도 버림 받고 망령처럼 떠돌다, 악마 같은 손재주와 천재 같은 머리를 이용해 사람을 잡는 덫을 ‘장난감’으로 주문하는 아랍의 왕으로부터 돈을 벌어 파리로 돌아와 오페라 극장의 숨은 소유주가 된다. ‘에릭’이라는 꽤 우아한 이름도 있었지만, 이제는 유령으로 불리는 그는 이제 갓 스물이 된 크리스틴에게 눈이 멀어 스토킹, 납치, 협박, 살인을 일삼다가 사랑의 편린이나마 품고 세상에서 사라진다. 

여기, <오페라의 유령>의 남녀를 뒤집은 듯한 작품이 있다. 역시 앤드류 로이드-웨버가 작곡한 뮤지컬 <선셋 블러바드>다. 1950년에 개봉한 빌리 와일더 감독의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만들어졌으며, 영화에서도 인상적이었던 거대한 노르마의 거실을 무대 위에서 구현하는 데 엄청난 돈을 들였다. 그러나 실제로 관객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노르마 그 자신, 아니 노르마 역을 맡았던 두 배우 페티 뤼폰과 글렌 클로즈였다. 런던 공연을 바탕으로 더 다듬고 더 화려한 무대로 올려진 브로드웨이 무대는 늘어난 제작비로 인해 적자를 못 견디고 2년만에 막을 내려 큰 아쉬움을 남겼다.

Image Courtesy of Dave Bova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은 악마?

영화는 죽은 남자 조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지만, 뮤지컬은 조가 영화사로부터 박대받고 차까지 차압당할 위기에 놓여 쫓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사실 이 장면부터 영화 장면처럼 스펙타클하게 무대로 옮겨놓을 필요까지는 없었겠지만, 뮤지컬 <캣츠>로 화려한 무대 연출의 상징처럼 떠오른 연출가 트레버 넌은 흑백영화를 무대 위에 옮긴 듯한 도입부의 연출과 화려한 금색으로 장식된 노르마의 거실을 대비시켜 그 화려함을 더욱 강조했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LA의 부자 동네 선셋 블러바드에 차를 숨긴 조는 아무도 안 사는 줄 알았던 빈집에서 누군가 자신에게 들어오라고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란다. 키우던 원숭이의 장례식을 위한 장의사로 오인받은 그는 자신을 부른 사람이 무성 영화 시대의 스타 노르마 데스몬드라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노르마는 조의 직업을 듣자 자신의 오해를 사과하기는 커녕 자신이 쓴 영화 시나리오를 봐달라고 부탁한다. 

시나리오는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각색한 것이었다. 50이 넘은 노르마가 십대의 살로메를 연기하겠다는 말에 조는 농담이나며 비웃지만, 한 푼이 아쉬운 탓에 노르마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조건은 반드시 노르마의 집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 노르마는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며 조를 조여오고, 조는 설날 파티에서 그런 노르마를 못 견디고 저택을 박차고 나와 친구들과 즐기다가 노르마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집사 맥스 말을 듣고 저택으로 돌아와 노르마의 애인이 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야망이 남아있었다. 조는 그의 옛 시나리오 중 하나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친구의 애인이자 영화사 직원인 베티와 함께 노르마 몰래 시나리오를 고치는 작업을 하다 들킨다. 가난하고 매력적이지만 친구의 약혼녀인 베티와, 돈 많고 변덕 심하고 나이 많은 노르마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결국 둘 모두에게 이별을 고하지만 노르마는 조가 자신을 떠난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누구도 스타를 떠날 수 없어!"를 외치며 그의 등에 총을 쏜다. 노르마는 살인사건에 몰려든 기자와 경찰들 앞에서 마지막 살로메 연기를 펼친다. 제정신이 아닌 노르마에게 집사인 맥스는 ’조명!‘, ’액션‘을 외치며 노르마의 마지막을 배웅한다.

남자를 지배하는 여자, 노르마

이 작품에서 조를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지골로(gigolo)다. 부유한 여자에게 몸을 파는 남자. 노르마는 자신의 재력으로 잘생기고 남자다운 외모를 지닌 조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든다. 젊은 남자를 소유함으로서 자신의 지나간 아름다움의 유효기간을 억지로 늘릴 수 있을 거라고 믿기라도 하는 듯이. 

뮤지컬 안에서 노르마의 지난 인생은 조와 맥스가 나누는 몇 줄의 대사로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17살에 영화계에 데뷔한 노르마의 첫 영화를 찍은 사람은 놀랍게도 충실한 집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맥스였다. 맥스는 노르마의 첫 남편이기도 했다. 자신이 첫 남편이었다고 맥스가 굳이 조에게 밝히는 것은 조가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나갈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는 지나가지 못하고 저택의 수영장에 빠진 시체가 되어 저택에 박제된다.

조는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매우 비상한 인물이지만 노르마 앞에서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 노르마는 첫 만남부터 조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자신을 한물 간 배우로 보는 조의 시선을 용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가 스스로 자신의 직업을 밝힐 때까지 변덕스럽게 화제를 돌린다. 조를 잡아 둘 핑계를 찾기 위해서다. 

조는 노르마가 자신의 턱없는 시나리오 각색비를 받아들이는 돈 많고 머리 나쁜 노인이라고만 여긴다. 하지만 노르마가 오래된 자동차에 자신을 태워 가장 비싼 옷가게에 들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갈아입히려 드는 순간부터 그는 이미 노르마의 노예로 전락한다. 자신의 돈이 아니기 때문에 저렴한 것을 사겠다는 그에게 의상점 주인은 귓속말로 "부인이 내는 거라면 가장 비싼 것을 입으라"고 속삭인다. 다음 장면에서 그는 바로 그 비싼 코트를 입고 나타난다. 

노르마는 조가 자신의 것이 되었음을 서슴없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조를 마치 키우는 강아지처럼 대함으로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 든다. 때문에 노르마의 가장 좋은 것들을 누리면서도 조는 끊임없이 노르마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 노르마는 감히 젊은 남자를 소유할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지배하려 드는 악마이기 때문이다.

50대 여배우에게 쏟아지는 조롱

노르마가 예전에 자신을 주인공으로 기용했던 세실 드 밀 감독의 연락을 받고 헐리우드의 스튜디오에 등장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오랜 기간 떠나 있었던 영화 현장으로 돌아온 노르마는 "As If We Never Said Goodbye" 를 부른다. 현장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유일한 사람은 나이 먹은 조명기사 뿐이지만, 그는 노르마에게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조명을 비춰준다. 조명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자 노르마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기쁨에 차올라 마치 한 번도 떠난 적 없었던 기분이라며, 이곳을 얼마나 그리워 했는지 모른다는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수많은 배우들이 오디션에서 자신의 연기력과 노래실력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하는 노래기도 하다. 

하지만 감독이 노르마에게 연락한 진짜 이유가 노르마가 타고 다니는 ‘우스꽝스러운 옛날 차’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 집사인 맥스는 이 사실을 능숙하게 노르마에게 숨긴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그제야 조는 노르마의 집에 매일 날아오는 팬레터와 꽃들이 사실은 모두 맥스가 한 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노르마는 맥스에 의해 은퇴하고도 여전히 스타처럼, 하늘의 별처럼 자존감을 유지하며 살아가지만, 그 자존감은 오래된 흑백영화처럼 생기가 없다.

노르마가 새해 첫 날 조에게서 거절을 당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은 관객에게 탄식을 자아낸다. 관객들은 조가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조가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돌아온 조를 잡아당겨 감싸 안는 노르마의 팔에 걸린 금박 무늬의 검은 가운은 마치 흑조가 날개를 펴서 흑마술을 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노르마의 승리는 거기까지다. 1950년이란 여배우가 스물 다섯이 되는 게 두려워 눈물 흘리던 시대였다. 나이 먹은 배우에게 돌아가는 것은 여주인공의 엄마, 할머니, 혹은 정신 나간 여자였다. 노르마에 주어진 역은 그 중 정신 나간 여자였다. 영화 속 나이는 오십대지만 영화에서도 뮤지컬에서도 노르마는 마치 칠십 먹은 노인네처럼 다루어진다. 출연도 하지 못할 영화를 위해 주름과의 사투를 벌이고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외모가 전부인 할리우드의 아름다움의 기준에 의해 시들어가는 노르마의 내면을 민낯으로 보여준다. 아름답지 못한, 늙어가는 여인이 여전히 젊음을 욕망한다는 것, 그것이 노르마의 죄다. 

왜 유령은 되고 노르마는 안 돼?

각본은 아름다움과 젊음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노르마를 조롱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노르마 역을 맡은 배우들이 그러한 조롱을 극복하고, 아름다움을 파는 산업의 피해자이되 마지막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는 여성으로서 두 발로 굳게 서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감동적인 경험이다. 원작 영화가 기괴할 정도로 글로리아 스완슨의 얼굴을 클로즈업 했다면 뮤지컬에는 노르마의 마지막 노래가 클로즈업을 대신한다.

여성이 팜므파탈로 등장할 때, 그 여성이 남성을 굴복시키는 도구는 언제나 아름다운 육체 뿐이다. 여성이 악마로 등장할 때는, 그 여성이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늙어 성적인 매력이 사라진 ‘주제’에 남성을 소유하려고 들 때다. 이 ‘아름다움’의 기준이 뭐길래. 오페라의 유령은 사람을 몇 명이나 죽이고도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고, 완숙한 남자로서의 마술을 마지막까지 부리며 이성의 끈을 놓지 않지만, 악마가 된 노르마는 '정줄'을 놓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다시 돌이켜 보면 노르마는 얼마나 능력 있는 여성인가. 은퇴하고도 재산을 잃지 않았고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부릴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심리전의 고수였다. 노르마가 되고 싶었던 시나리오 속의 살로메는 사랑하는 요한으로부터 거부당하자 요한의 목을 쳐 은쟁반에 담아서라도 입을 맞춘다. 살로메도 노르마도 정말로 가져서는 안되는 것을 탐했던 것일까? 단지 너무 어리거나 너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들의 욕망은 제거되거나 혹은 숨겨야만 하는 무엇인가가 된다. 유령도 노르마도 그저 꽤 젊은 누군가를 가지고 싶었을 뿐인데, 그들에게 주어진 결말은 왜 이토록 차이가 크게 난단 말인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유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은 미뤄두고, 그런 욕망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남녀는 왜 이리 유별해야 하나.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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