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무식자의 <캡틴 마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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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무식자의 <캡틴 마블> 리뷰

신한슬

일러스트레이터: 이민

대한민국을 점령한 대유행 트렌드가 내 취향에는 영 아니라 ‘홀아비’가 된 기분을 느껴본 적 있는가? 옷장에 스키니진이 없다든지, 롱패딩을 입느니 ‘얼어 죽어도 코트파’가 된다든지, 허니버터칩을 한 번도 맛있다고 생각한 적 없다든지. 최근 나는 전세계적 유행에 발맞추기 힘들다고 느낀 적이 있으니, 바로 히어로 영화 때문이다.

2000년대부터 현재까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계보는 곧 히어로 영화와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트맨, 슈퍼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앤트맨 등 디씨코믹스와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CU)를 기반으로 하는 온갖 ‘맨’들과 ‘우먼’의 이야기가 전세계 박스오피스를 지배하고 있다.

나도 히어로 영화를 아예 안 본 건 아니다.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가 전체 영화관의 97%를 차지하는 독과점 구조의 한국 영화 시장에서는 솔직히 말해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지금까지 극장에서 본 히어로 영화는 <아이언맨>, <어벤져스>, <토르3>, <블랙팬서>다. 약 6시간을 바쳐 내가 히어로 영화와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히어로 영화가 싫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히어로 영화가 가진 장르적 문법을 지루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주인공부터 공감하기 어렵다. 영웅은 언제나 특별한 운명을 타고났거나, 우연히 초인적인 힘을 갖게 된 소수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작게는 미국 뉴욕부터 크게는 지구라는 행성 전체의 운명이 좌우된다. 영웅이 아닌 사람들의 목숨은 영웅들의 힘과 선함, 용기, 정의로움에 달려있다. 나는 도통 영웅들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열심히 살아가는데도 목숨이 남에게 좌우되게 생긴 ‘배경’ 속 지구인들에게 이입해 억울한 기분마저 든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히어로 영화에는 가부장적인 클리셰들도 많다. 영웅 중 대부분이 백인 남성인 건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희한하게 인종을 떠나 부계 혈통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토르3>에서도 <블랙팬서>에서도 영웅의 여자 형제들은 조역이나 악역에 그쳤다. 자신들의 전쟁을 하느라 평범한 사람들의 일터와 삶터를 때려부수면서도 사과 한 마디 없고 오히려 감사 인사를 듣는 결말도 마뜩찮다.

이렇다 보니 당연히 나는 MCU나 디씨코믹스가 가진 방대한 평행우주 서사들이나, 영화와 만화를 넘나드는 영웅들의 변주와 진화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 복잡성과 확장성에 사람들이 매료된다는 건 알겠다. 그저 내가 히어로 영화의 기본 컨셉에 감응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캡틴 마블>은 보러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캡틴 마블>을 관람하기로 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첫째, ‘페미니즘 영화’라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주연인 브리 라슨은 공개적으로 “이 영화는 위대한 페미니즘 영화”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악에 맞서 싸우는 남성 영웅을 중심으로 전 우주가 돌아가는 히어로 영화가 단지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페미니즘 영화가 될 수 있을까? 흥미가 생겼다.

둘째, 고양이가 단독 포스터를 가질 정도로 중요한 조연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캡틴 마블>은 내가 영화관에서 제일 만족스럽게 관람한 히어로 영화가 되었다. 아마 당분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히어로 영화로 군림할 것이다. 개봉 첫 주 폭발적인 예매율을 자랑했던 만큼, 이제 <캡틴 마블>에 대한 스포일러가 큰 죄는 아니리라 생각하고, 히어로 영화를 싫어하는 ‘마블무식자’가 <캡틴 마블>에게 반한 이유를 설명해보려 한다. 혹시 마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탓에 관람을 주저하고 있는 과거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 이하 영화 <캡틴 마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캡틴 마블>은 여성 해방 서사다

주인공인 ‘비어스’(브리 라슨)는 자신이 우주종족 중 하나인 ‘크리’족 전사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기억을 잃고 크리 행성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그의 스승인 ‘욘-로그’(주드 로)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비어스에게는 두 주먹에서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능력이 있는데, 욘로그는 비어스에게 그 능력에 의지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래야 진정 강해질 수 있다고, 넌 아직 충분히 강하지 않다고, 과거를 잊고, 감정을 죽이고, 분노하지 말고, 집중하라고 끊임없이 말한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동양물 잘못 먹고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하라는 소리인가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욘-로그는 오리엔탈리즘에 빠진 게 아니라 비어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비어스는 사실 지구인 캐롤 댄버스였고, 어떤 계기로 강력한 에너지원을 온 몸으로 흡수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욘-로그가 캐롤의 능력을 두 주먹으로만 제한하는 어떤 장치를 해 놓고 기억을 조작한 뒤 과거를 잊으라고 ‘가스라이팅’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을 깨닫는 순간, 캐롤은 더 이상 욘-로그가 통제할 수 없는 영웅이 된다. 캐롤은 자신을 속박하는 남성 스승의 거짓말과 주박을 깨고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 능력을 유감없이, 마음껏, 온 우주에 발휘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캐롤 댄버스가 영웅이 되는 과정은 여성 해방의 역사를 그대로 은유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여자는 투표권을 갖기엔 충분히 이성적이지 않다.’ ‘여자에게는 글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여자가 고등교육을 받는 것은 낭비다.’ ‘여자는 의사, 변호사, 판사, 문학가, 경찰, 군인이 될 수 없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그 모든 거짓말을 믿지 않았고, 스스로 자신들의 능력을 깨닫고, 온 세상에 그것을 떨칠 수 있도록 싸웠다.

한편으로는 아주 미시적인 은유도 가능하다. 나는 로맨틱한 관계에 있는 상대로부터 정신적으로 속박을 당한 경험이 있는 여성 친구들을 많이 알고 있다. 정신적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은 하나 같이 ‘너는 나 없이 살 수 없는 연약하고 결핍된 존재’라며 욘-로그의 대사와 흡사한 언어로 가스라이팅을 시도했다. ‘정말 그런가?’라는 자기 의심이 싹트는 순간, 지적이며 능력 있는 여성들이 빛을 잃어갔다. 마침내 그들의 거짓말을 깨닫고 빠져나왔을 때, 그들은 모두 각자의 인생에서 주인공 자리를 되찾았다.

<캡틴 마블>의 서사는 이처럼 그 뼈대 자체가 거대한 역사의 흐름부터 단 한 사람의 인생까지, 모든 여성 해방 서사에 대입할 수 있는 구조다. 과연 주연 배우가 페미니즘 영화라고 소리 높여 홍보할 만하다.

<캡틴 마블>은 감정 이입이 가능한 영웅이다

캐롤 댄버스는 초능력을 얻기 전에도 이미 영웅이었다. 미 공군에서 소수의 여성 파일럿으로 편견을 부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차별의 전쟁에서도 최전선에서 날고 있었다.

영화는 이러한 캐롤의 전사(前史)를 구구절절하게 다루지 않는다. 다만 약 1분 가량 점프컷 시퀀스 속에서 캐롤 댄버스가 인생에서 끝없이 성차별과 편견에 내동댕이쳐지면서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편집 측면에서 다소 나이키 광고 같은 키치한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구성되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이것이 캐롤 댄버스와 다른 영웅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캐롤은 위대한 영웅이 되기 전에도 이미 ‘평범한 영웅’이었다. 여자로서 성차별적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치러야 하는 정말 치사하고 사소하고 짜증나는 일상 속 전투들. 오빠와 달리 카트를 타고 너무 빨리 달리면 안 된다든가, 똑같이 실패해도 역시 여자는 안 된다는 소리를 듣는다든가. 캐롤은 그런 흔한 좌절과 싸워왔고, 이겨왔다.

난생 처음으로 히어로 영화를 보면서 이런 영웅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초능력을 얻어 우주를 구하고 싶은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사소한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아주 작은 영웅이 되고 싶다고. 물론 가끔씩은 그냥 넘어져 있을 수도 있고, 끝내 일어나지 못할 때도 있겠지만, 때로는 캐롤 댄버스처럼 무표정하게, 조용히, 그저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고.

<캡틴 마블>의 목표는 전쟁에서 이기는 게 아니다

캐롤 댄버스는 영웅으로 각성한 이후 미국을 구하거나 지구 전체를 구하지 않는다. 그는 ‘테러리스트들’로 착각해 죽일 뻔했던 우주 난민들을 구한다.

이것 역시 다른 영웅들과 다른 점이다. 불특정 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위기에 처했다가 구원을 당하는 게 아니다. 소외되고 오해 받고 도움이 필요한 소수의 집단이 영웅에게 직접 대화를 청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영웅은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 전, 진심으로 사과한다. 미안하다고. 이 또한 캐롤 댄버스의 특별한 점이다. 대부분의 남성 영웅들은 실수를 하거나 오해를 해도 딱히 사과하지 않는다. 그저 구원으로 모든 것을 대충 용서받는 일이 흔하다.

난민들을 무사히 구출한 뒤, 캐롤 댄버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쟁을 끝내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은하계에서 벌어지는 비슷한 일을 막기 위해 우주전쟁 한 가운데로 날아간다. 한 번의 위기를 막는 게 아닌 영원한 평화를 소명으로 한다는 것도 인상적인 지점이다.

<캡틴 마블>은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

지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캡틴 마블>의 액션 씬에서는 민간인이 다치지 않는다. 다소 놀라게 할 순 있어도.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또한 아무 죄 없는 선량한 개인의 재산이나 공공장소를 마구 파괴하는 장면도 없다. 일반인들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는 비밀보안기관의 천장 겸 바닥이 몇 번 뚫리는 정도에서 그친다. 나처럼 무분별한 도시 파괴 장면을 대단히 싫어하는 사람도 마음 놓고 볼 수 있다.

<캡틴 마블>은 90년대 감성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 속 배경은 구체적으로 1995년이다. 배경음악으로 삽입된 90년대 히트곡들은 이를 대체로 정확히 반영한다. 데즈리(Des’ree)의 “You Gotta Be”(1994), 너바나의 “Come as You Are”(1992), R.E.M의 “Man on the Moon”(1992), TLC의 “Waterfalls”(1995) 등이 대표적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캐롤 댄버스가 각성한 뒤 자신의 힘을 발휘할 때, 배경음악으로 노다웃(No Doubt)의 “Just a Girl”(1995)이 흐른다. 이 노래는 좀 더 각별하다. 싱글 발표 당시에도 성차별적 현실을 풍자하는 반어적인 가사로 주목을 받았다. 노다웃 보컬이자 싱어송라이터인 그웬 스테파니가 직접 쓴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내 위치가 정확히 어딘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
온 세상이 네 손을 잡아야 한다고
나에게 강요하고 있잖아

왜냐면 난 겨우 여자애니까
네 시야를 벗어나게 두지 마
난 겨우 여자애야, 예쁘고 조그맣지
내게 어떤 권리도 허락하지 마
오, 난 참을 만큼 참았어!
Don’t you think I know
exactly where I stand?
This world is forcing me
to hold your hand

‘Cause I’m just a girl, little ol’ me
Don’t let me out of your sight
I’m just a girl, all pretty and petite
So don’t let me have any rights
Oh, I’ve had it up to here!

<캡틴 마블>에는 고양이가 나온다

제작진에 따르면 ‘구스’(레지, 아치, 리조, 곤조)라는 이름의 이 고양이도 암컷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구스 역시 영화 속에서 인간 남성에 의해 귀엽고 연약한 존재로 오해를 받지만, 실은 아주 강력한 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를 주저없이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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