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서른세번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록산

알다뮤지컬여성 주인공

2019년 서른세번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록산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뮤지컬 <시라노>

초연 2009, Nissay Theatre, Tokyo
대본/가사 Leslie Bricusse
작곡 Frank Wildhorn
원작 Edmond Rostand

한국 초연 2017년 7월7일~10월8일, LG 아트센터
연출, 안무 Gustavo Zajac
한국 재연 2019년 8월10일~10월3일, 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출 김동연
안무 정도영

 

연극 <시라노 드 벨쥐락>은 벨레포크가 한창이던 1897년에 파리에서 개막했다. 지고지순한 사랑 따위 세기말의 퇴폐적 분위기 속에서 센강에 둥둥 떠내려가던 시절인지라, 작가인 에드몽 로스탕은 막을 올리기 전 오십여명의 배우들 앞에서 지레 흥행실패에 대한 사과를 했던 일화도 있다. 맘 약했던 그의 예상과 달리 이 작품은 끝나지 않는 박수를 받으며 크게 성공했고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로맨스 스토리 가운데 하나다. 

염세적이던 세기말의 파리지앵들조차 열렬하게 환영했던 시라노라는 인물이 주는 매력이 대체 뭘까. 시대 배경상 시라노는 루이 13세와 14세의 시대를 살았고 동시대, 동향 사람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뒤마의 소설 <삼총사>의 주인공 달타냥을 들 수 있다. 둘 다 가스코뉴 출신‘답게’ 성질이 급하고 검술에 능하다고 묘사되는 걸 보니, 현재의 프로방스 지역인 가스코뉴 사람들의 성격이 아래쪽 이탈리아인들의 성격과 좀 닮았던 모양이다. 

실제 시라노는 파리 출신이었고 그의 아버지가 가스콘에 영지를 조금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는 장남과 달리 차남부터는 웬만큼 부자가 아니고서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밖에 없었는데,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가스콘 출신의 ‘차남’들이 모여 만든 부대가 바로 뮤지컬에 등장하는 시라노의 부대다. 

삼총사의 달타냥 역시 같은 이유로 파리로 향했고 총사대에 입단한다. 두 사람 모두 실존인물이었기에 이들이 살았던 시기의 파리를 떠올려 보면 그야말로 뒤죽박죽 난리도 아니다. 파리 시를 관통하며 밀라디가 말을 달리고 삼총사와 그들의 종들이 그 뒤를 쫒으며, 밤이면 극장에서는 시라노가 난동을 피우고 뒷골목에서 백 명의 깡패와 칼싸움을 한다. 

운명적 사랑이
이토록 이기적일 수가

뒤마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이 결코 남성들에게 순종만 하던 인물들이 아니었던 시대답게 에드몽 로스탕이 그린 <시라노 드 벨쥐락>의 홍일점과도 같은 인물인 록산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다. 록산는 가장 중요한 남성 셋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인물이다. 부와 권력을 다 가진 남자 드 기슈, 시인이자 검술사였던 남자 시라노, 가장 아름다웠던 남자 크리스티앙 등 각자의 분야에서 꽤나 한다하는 남자들이 모두 록산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렇다면 록산은 그에 부합하는 무언가가 외모 말고도 더 있어야 한다. 록산은 영민하고 지혜롭다고 묘사되지만 실제 대본 속 록산의 대사들을 보면 그 당시 ‘숙녀’들의 한계를 고스란히 답보한다. 게다가 록산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결국은 ‘정숙함’이다. 

시라노 드 벨쥐락은 백년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영화, 오페라, 뮤지컬로 만들어져 왔고 누구보다도 남성 배우들이 선망하는 배역이었으며, 비록 공연이나 영화는 망해도 남자 주인공만은 꼭 아카데미상이나 토니상은 반드시 가져갈 정도로 매력 터지는 작품 속 인물이다. 그 옆의 록산은 2019년의 서울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지킬 것인가? 

작품 속의 남성들은 비록 사랑의 라이벌이면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우정을 키워나가며 함께 칼을 맞대고 적과 싸운다. 이런 뭉클한 남성들의 마초적 형제애 사이에서 록산이 발 붙일 곳은 바늘 끝처럼 좁고 아슬아슬하다. 심지어 록산은 본명인 마들렌 로빈은 단 한 번도 불리워지지 않으며 록산이라는 애칭으로만 존재한다. 남성 등장인물들이 출신지까지 알려주는 긴 이름과 중간 이름, 성을 자랑하는 동안 록산은 그저 록산일 뿐이다.

줄거리

시라노가 출연을 금지한 배우가 무대에 올라오던 날, 시라노는 배우에게 겁을 줘서 공연을 중단시키며 정적을 하나 더 늘린다. 그 사람은 바로 자신의 상사이기도 한 귀족인 드 기슈. 같은 날 극장을 찾았던 시라노의 먼 친척 록산은 소매치기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크리스티앙의 잘생긴 얼굴에 반하고 그가 시라노의 부대에 입대했음을 듣자 유모를 보내 다음날 일찍 시라노와의 약속을 잡는다. 시라노는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던 록산이 은밀한 만남을 제안하자 두근거리며 록산을 기다리는데 정작 록산은 미남인 크리스티앙에 대한 열정을 토로하며 그를 보살펴 줄 것을 당부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실연 먼저 당한 시라노는 자신의 길고 큰 코를 보며 사랑에 대한 꿈을 접는다. 

록산에게 한 약속 때문에 신입 크리스티앙을 벌주지 않고 록산에게 편지를 쓰라고 전해주는 시라노. 그러나 크리스티앙에게는 글재주도 말재주도 없다. 여자 앞에만 서면 입이 안 떨어지는 인물. 보다 못한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위해 편지를 대필해 주고 그 편지들을 받은 록산은 크리스티앙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록산에게 오랫동안 구애해 온 지체 높은 귀족 드 기슈가 추기경을 등에 업고 결혼을 강행하려 들자, 록산은 편지를 지어내서 읽는 재치를 부린다. 

시라노는 전쟁을 앞두고 록산과 결혼부터 하려고 찾아오는 드 기슈를 방해하고 그 사이에 크리스티앙과 록산은 신부 앞에서 혼인서약을 해버려서 드 기슈를 좌절시킨다. 그 대가로 최전선으로 배치되는 가스콘 무대. 신혼의 첫 키스만을 남긴 채 크리스티앙과 록산은 긴 이별을 맞이하지만 록산의 집에는 남편이 보낸 뜨거운 사랑의 편지가 차곡 차곡 쌓인다. 결국 록산은 음식을 가득 싣고 전장의 크리스티앙을 찾아오지만 크리스티앙은 자신이 보내지 않은 수많은 편지가 록산에게 갔다는 사실에 시라노의 사랑을 눈치챈다. 

설상가상 록산은 자신이 아무리 못생겨도 영혼만을 사랑한다고 열띠게 말하니 크리스티앙은 시라노에게 사랑을 고백하라고 떠민다. 하지만 시라노가 고백을 하기 전 크리스티앙은 전사하고 그의 품에서는 시라노가 대필한 마지막 편지가 나온다. 록산은 수녀원에 들어가서 수절을 하며 15년을 보내고 시라노는 비밀을 가슴에 묻은 채 토요일마다 록산을 방문하며 지내다 결국 정적의 칼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록산에게 이별을 고하며 비밀을 알려준다. 록산은 완벽한 사랑을 두 번 떠나보낸다며 목 놓아 운다.

일러스트 이민

수녀원에 갇힌 록산

우선 이 작품은 당연히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 자신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여성은 록산 하나 뿐이고 나머지 인물들은 록산의 쉐프론이거나 빵집 여주인일 뿐이다. 록산은 등장하는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오로지 연애에 자신의 인생이 휘둘리는 인물이다. 

시라노 드 벨쥐락의 이야기에는 역사적으로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열광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차고도 넘친다. <시라노>에 등장하는 남성인물들은 비록 록산의 사랑을 두고 치고 받고 싸울지라도, 전쟁 앞에서는 함께 칼을 맞대고 적과 싸운다. 자신의 라이벌이라도 인간으로서 존중할만한 모습을 보이면 그에 상응하는 예의를 갖춘다. 나이가 많거나 상사라고 해서 무조건 따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신념 앞에서는 추기경의 명령도 우습게 여기지만,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한없이 물러진다. 

반면 그런 남자들의 사랑을 받는 여인은 외모에 눈이 멀어 진정한 사랑이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하다가 종래에는 사랑을 두 번 잃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 남자의 과부로서의 여생이 살게 될 팔자가 된다. 시라노의 사랑은 죽음을 앞두고 마침내 응답을 받으면서 두고 두고 사람들의 칭송의 대상이 되지만, 록산이 그나마 자신의 명성이라도 지키려면 수녀원에서 한 발짝도 나가서는 안 된다. 재기발랄하고 삶을 사랑했던 록산은 그렇게 검은 옷 속의 감옥에 갇힌다. 2017년의 한국 초연 프로덕션도, 2019년의 프로덕션도 마찬가지다.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No

록산은 철저하게 남성 인물들의 운명에 의해 휘둘리는 인물이다. 그 자신만을 위한 운명은 없다. 록산의 존재 가치는 세 남자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할 만큼 매력적이라는 것까지다. 가장 남성적인 인물들로부터 사랑받기에 충분한 여성이라는 경계선을 확연하게 그어놓은 이상, 록산은 무엇을 해도 남성 인물들이 원하는 ‘정답’을 말하고 행동할 뿐이다. 

그 자신을 위한 운명도, 그 운명을 벗어나기 위한 어떠한 행동조차도 없다. 귀족인 드 기슈와 결혼하지 않기 위해 크리스티앙을 선택하지만, 대사에 나오듯이 크리스티안에 대한 사랑보다는 오히려 드 기슈를 피하기 위한 충동적 결정이나 마찬가지다. 마치 익숙한 동쪽 감옥이 싫어서 낯선 서쪽 감옥을 선택하는 식이다. 

록산은 남편을 전쟁통에 보내놓고 시라노가 대필한 편지를 매일 매일 받으면서 자신이 진짜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전의 사랑이 진짜가 아닌 이유는 크리스티앙의 잘생긴 얼굴에만 반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다. 과거와 다르게 이제는 크리스티앙의 영혼까지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록산이 사랑 받는 가장 큰 요인이 외모인 걸 생각하면 대체 왜 록산이 크리스티앙의 외모를 보고 사랑에 빠진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록산은 시라노가 보낸 열렬한 사랑의 편지들을 통해 자신이 선택한 남자가 외모와 영혼까지 완벽하다고 믿는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시라노가 전장을 찾아온 록산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순간,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이 서로 자신들 중 누군가 한 명을 선택하라고 강요한다면, 외모냐 영혼이냐, 둘 다는 가질 수 없다고 한다면? 

사실 록산에게는 세번째 선택지가 있다. 둘 다 외면하는 것. 두 남자는 록산이라는 한 명의 목표를 두고 그 여인을 사랑하는 각자의 마음에 도취되어 실제로는 그들이 하는 행동이 록산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크리스티앙은 실제 록산의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시라노는 불타는 자신의 마음을 발산할 기회를 얻는 대신 록산은 존재하지 않는 어느 누군가를 완벽한 인간이라 생각하며 사랑에 빠져버린다. 남편이 죽은 뒤 십 오년 동안이나 수도원에 자신을 가두고 수절할 만큼의 엄청난 사랑이다. 

그러나 만약 전장에서 시라노의 고백을 받았다면 등장하는 모든 남성 인물들로부터 ‘지적인 여자’라고 묘사된 이 여인은 자신을 기만한 두 남성을 용서하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했을까? 원작 이야기에서 시라노는 고백하기 전에 진짜 록산의 마음을 확인하려 든다. 정말로 편지를 쓴 그 영혼이 괴물 같고 흉칙한 외모라 해도 사랑하겠느냐고? 록산은 그 말을 크리스티앙이 부상을 당해 외모가 변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온 마음을 다 해 외모는 상관없다고 답한다. 

그 말에 시라노가 환희에 가득 차서 록산에게 사실은 자신이 편지를 썼다고 막 입을 여는데, 큰 부상을 입은 크리스티앙이 실려 온다. 시라노의 고백의 기회는 영원히 날아가 버렸음을 관객도 시라노도 함께 깨닫는 순간이다. 죽은 남자 앞에서 사실은 그 편지를 내가 썼다고 하는 것만큼 비열한 행위가 어디 있는가. 누구도 죽은 사람은 이길 수 없다. 진실은 그렇게 봉인되고 록산은 자신을 수녀원에 가둔다. 

시라노 없이는 록산은 이 작품 속에서 존재할 수가 없으며, 그 운명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어찌 보면 록산은 시라노에게 크리스티앙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그 순간부터 시라노가 짠 거미줄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그것을 사랑이라고 포장해도, 심지어 의도하지 않았어도 결국 기만은 기만이다.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No, but...

2019년 서울 공연 창작팀의 설명에 의하면, 록산은 2017년 버전보다 훨씬 주체적인 여성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목숨을 건 사랑을 받는 당사자로서의 당위성을 갖추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록산이 '남자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인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 뮤지컬의 실질적인 원작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이 아니라 그걸 바탕으로 만들어진 1990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다. 원작에는 없지만 창작진이 덧붙인 대사 따르면 록산은 검술을 배우고 <레드북>의 주인공 안나처럼 여성지를 출간하기도 한다. 그 말을 들은 시라노는 ‘굉장하군요!’ 하고 영혼이라고는 없는 감탄사를 내뱉는다. 영혼이 있을 수가 없는 게, 시라노가 듣고 싶은 말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에요.’ 이기 때문이다. 야심만만하게 추가한 록산의 대사는 떠내려간다. 사랑한다는 고백만 오매불망 기다리는 시라노 앞에서 록산의 뜬금없는 자기소개는 의미 없이 공중으로 휘발될 뿐이다. 

게다가 록산은 여기에 사랑스럽게 덧붙인다. 이 모든 것은 시라노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록산에게 자유의지라는 게 없는 듯이 보이지만 그럴 리가 있나. 비록 안타깝게도 록산이 배운 검술은 그가 가장 멀리 하고 싶은 드 기슈의 사랑에 불을 붙이는 기폭제가 되고, 여성지는 단 한 번의 대사로만 남겨졌을 뿐 어떠한 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해도. 사실 여성지까지 만들던 록산이 사랑에 빠져 이성을 놓고 물불도 안 가리고 전장으로 뛰어들다니 놀랍기는 하다. 

더 놀라운 것은 록산이 직접! 수레를 끌고 전장에 나타나는 장면이다. 전장이 파리에서 엄청나게 가까웠는지 초인적인 힘이 솟았는지, 록산은 빵집 주인과 함께 음식이 가득 든 수레를 끌고 노인 흉내를 내며 스페인군의 진지를 가로지른다. 원작에서 남장을 하고 직접 칼을 휘두르며 말을 몰아 전장을 지나온 록산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록산의 손에는 단 하나의 강력한 무기가 쥐어져 있는데,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남성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어떤 남자도 자신을 온전하게 록산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모습이 이 작품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지위도 높고 재산도 많지만 나이가 많은 게 콤플렉스인 드 기슈와, 머리도 좋고 시도 잘 쓰지만 어머니로부터마저 버림받은 지나치게 큰 코가 콤플렉스인 시라노, 여자 앞에만 서면 쑥맥으로 변하는 크리스티앙 등 완벽하지 않아서 고민인 그들의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어느 한 명에는 이입하게 만든다. 특히 시라노. 

록산의 목표는 사실 원작에서도 1990년에 개봉했던 영화에서도 이 뮤지컬에서도 진실한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것 하나 외에는 알 수가 없다. 그걸 나쁘다고 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록산은 그 진실함을 찾기는 찾았다. 크리스티앙의 잘생긴 얼굴에서. 이것 역시 결코 비난하고 싶지 않다. 굳이 록산에게서 잘못을 찾는다면 잘생긴 얼굴만으로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대부분의 남성 인물들이 여성에게서 아름다운 얼굴과 텅 빈 머리를 바라는 판국에 록산의 꿈이 야무지긴 했나보다.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Yes, but...

록산의 캐릭터는 플롯에 의해 붕괴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면 2019년, 재공연에서 캐릭터가 무너지는 것은 오히려 크리스티앙이다. 크리스티앙은 잘생긴 얼굴 하나를 빼면 아무것도 봐줄 게 없는 인물로 격하되어버렸다. 때문에 그의 록산에 대한 사랑마저 희석된다. 단지 말주변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귀족 출신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식함과 어리버리함, 전쟁에 나가서는 시라노가 뒤에 숨으라면 착실히 숨는, 검 실력마저도 믿을 수 없는 그런 인물로 전락해 버린다. 

반면 록산은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설정된 그대로의 인물로 대체로 끝까지 간다. 원작이나 영화에서는 록산이 크리스티앙의 소매치기 당하는 장면을 눈치채고 알려주지만 뮤지컬에서는 소매치기에게 도둑을 맞을 위기의 록산을 크리스티앙이 도와주는 것으로 변경되면서, 록산이 자신의 재치를 드러내는 첫 장면을 크리스티앙이 채가긴 하지만. 

단지 문제라면 원작에 쓰여진 사랑에 빠진 록산의 앞 뒤 안가리는 열정이 그대로 번역되면서 록산이라는 인물이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물로 변하는 데 있다. 아직 대화도 제대로 나누기 전부터 이미 크리스티앙과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한 록산은 시라노에게 가스콘 부대에 신입으로 들어간 크리스티앙을 봐달라고 부탁한다. 이후에도 전쟁터로 나가는 남편을 시라노에게 부탁하면서 그의 방패가 되어달라고 매달린다. 시라노는 자신의 위신을 망쳐가면서까지 록산과의 약속을 지킨다. 덕분에 크리스티앙의 신고식은 매우 재미있는 장면으로 완성된다. 

록산의 발랄함과 지혜는 고전적인 범위 안에 머무른다. 그 범위는 남성들의 ‘바람’으로 완성된다. 못생겼지만 내면은 아름다운 나를 제발 사랑해 달라는 바람. 여성들은 어째서 외모를 뚫고 심장에 쓰인 아름다운 진심까지 읽어낼 텔레파시 능력까지 지녀야 한단 말인가.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No

이 작품 속의 네 명의 주요인물 가운데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 시라노든 크리스티앙이든 록산이든 드 기슈든 이 작품 속에서 그들의 결정은 거의 대부분 연애 때문에 내리는 결정이다. 하다못해 시라노의 백대 일 결투마저도 록산과의 만남을 앞두고 설렘을 못 이겨 스스로 칼싸움에 뛰어드는 형국이다. 시라노의 마지막 날 역시 록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칼 같이 나오다가 칼에 찔렸기 때문이다. 

같은 날 그보다 먼저 록산을 찾은 드 기슈는 시라노를 노리는 세력이 있음을 알려줄 겸, 록산을 볼 겸 찾아온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드 기슈와 시라노는 한 여인을 동시에 사랑했다는 이유로 멀찍이서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로 발전하는데, 그 역시 록산이 이유다. <시라노>가 사랑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는, 사랑으로 가득 찬 작품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사랑받는지도 모르겠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Yes, but...

록산은 발전을 이루기는 한다. 하지만 그 발전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남성들의 바람을 충실히 따르는 발전이다. 처음에는 외모만 보다가, 영혼에 매혹되고, 하나뿐인 사랑이 세상을 떠나자 충실하게 정절을 지킨다. 이러한 삶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결정을 지고지순하게 지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전형적이기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다. 록산은 극 중의 남성들이 꿈에 그리는 여성으로서, 아름답고 지혜롭지만 자신을 향했던 기만을 눈치 챌 만큼은 아니어야 하며, 진실한 사랑 고백 앞에서는 마음을 여는 여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라노가 모든 편지를 썼던 당사자였음을 깨닫는 그 순간은 록산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인데, 그 순간 시라노의 편에 선 관객들은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마치 자신들의 진심이 보답이라도 받듯이. 그 뒤에 남겨진 록산의 삶은 지옥 뿐인데도.

이 모든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단 2년 만에 록산이 시대를 따라가려고 노력하며 변해가는 모습은 비록 그 변화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 해도 반갑다. 차근차근 성장해 가면서 제 발로 성큼 성큼 걷는 록산을 조만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시라노라는 인물은 성별을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남길 수밖에 없다. 자신의 얼굴에 백 퍼센트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에게 그 사랑을 돌려주기를 바라지만,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연애편지를 대필해서라도 자신의 애정을 상대방에게 알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시라노의 마음에 누가 감히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브로드웨이에서는 1973년에 뮤지컬 <시라노>가 올라와 단 49회 만에 막을 내렸어도 주연인 시라노 역의 크리스토퍼 플럼(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본 트랩 대령 역으로 유명하다)은 토니상을 거머쥐었다. 프랑스어로 된 1990년 작 영화에서 시라노 역을 맡은 제라르 드 빠르디유는 오스카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토록 시라노가 모두에게 사랑 받고 남성 배우들이 한 번은 꼭 연기해 보고 싶어 하는 배역인 것처럼, 록산 역시 여성 배우들로부터 그만큼 사랑받을 수 있는 배역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마음일 수 밖에. 

대사 한 마디 변하지 않아도 새로운 해석이 가미된 연출과 변화된 관점을 통해 시대와 함께 배역들은 변화해 간다. 한국의 록산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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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S

뮤지컬 속 여성

01

2019년 첫째 주, 마리 퀴리

02

2019년 둘째 주, 엘리자벳 폰 비텔스바흐

03

2019년 셋째 주, 오목

04

2019년 넷째 주, 클레어

05

2019년 다섯째 주, 알렉산드라 오웬스

06

2019년 일곱째 주, 그레첸

07

2019년 여덟째 주, 제루샤 '주디' 애봇

08

2019년 아홉째 주, 메리 포핀스

09

2019년 열번째 주, 핑크 레이디

10

2019년 열한번째 주,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11

2019년 열두번째 주, 아랑

12

2019년 열세번째 주, 샬롯 드 베르니에

13

2019년 열네번째 주, 나팔, 혜란, 이은숙

14

2019년 열다섯번째 주, 에바 호프

15

2019년 열여섯번째 주, 1976 할란카운티의 여성들

16

2019년 열일곱번째 주, 앤 보니, 메리 리드

17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1) 마법에 걸린 사랑

18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2) 바그다드 카페

19

2019년 스물한번째 주, 빨래

20

2019년 스물두번째 주, 자스민

21

2019년 스물세번째 주, 심청

22

2019년 스물네번째 주 안나 아르카지예브나 카레니나

23

2019년 스물다섯번째 주, 조왕, 덕춘

24

2019년 스물여섯번째 주, 테레즈 라캥

25

2019년 스물일곱번째 주, 음악극 <섬>

26

2019년 스물여덟번째 주, 기네비어와 모르가나

27

2019년 스물아홉번째 주, 허초희

28

2019년 서른번째 주, 강향란, 차순화

29

2019년 서른한번째 주, 진

30

2019년 서른두번째 주, 개비, 바비, 도나, 울리

31

2019년 서른세번째 주, 록산

현재 글
32

2019년 서른네번째 주, 옹녀

33

2019년 서른다섯번째 주, 엠마 커루

34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3) 갓 헬프 더 걸

35

2019년 서른여섯번째 주, 마리 앙투와네트

36

2019년 서른일곱번째 주, 베스

37

2019년 서른여덟번째 주, 그 여자

38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4) 호커스 포커스

39

2019년 마흔세번째 주, 루미 헌터

40

2019년 마흔다섯번째 주, 아드리아나와 엘로이즈

41

2019년 마흔여섯번째 주, 레베카 드 윈터스

42

2019년 마흔일곱번째 주, 아이다

43

2019년 마지막 주, 암네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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