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열번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핑크 레이디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2019년 열번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핑크 레이디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뮤지컬 <그리스>

초연 1971 Chicago, Kingston Mines Theater
1972 Broadway, Eden Theatre
1973 West End, New London Theatre
1978 Film
한국 초연 2003
한국 공연 2019년 4월30일~8월11일 디큐브아트센터
대본 Jim Jacobs, Warren Casey
가사 Jim Jacobs, Warren Casey
작곡 Jim Jacobs, Warren Casey

 

영화 <그리스(1978)>의 핑크 레이디


배우가 만든 뮤지컬

뮤지컬 <그리스>는 1971년 시카고에서 초연된 이후 매우 열광적인 팬층을 형성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사랑받아 왔다. 하지만 이 작품이 페미니즘에 부합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논란도 ‘변방에서’ 함께 이어져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합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사실 이 시절의 작품들 대부분이 이런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거니와 현재 제작되고 있는 작품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도 않다. 

이 작품을 함께 쓴 짐 제이콥과 워런 케이시는 뮤지컬이든 연극이든 한 번도 써 본 적 없었던 현역 배우들이었다. 작품의 배경이 된 1950년대에 고등학생이었던 그들 자신의 경험을 담았다. 제목인 <그리스>는 짐 제이콥의 고교시절 친구들 모임의 이름이자 당시 좀 논다 싶은 십대들을 칭하는 단어였다. 

196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귀에 착착 감기는 멜로디와 단순한 가사가 주를 이루었던 1950년대 두왑 스타일의 락앤롤과는 완전히 다른 락 음악이 세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리틀 리차드의 시대가 가고 레드 제플린과 롤링 스톤즈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즐겼던 시대의 음악으로 누군가 뮤지컬을 써줬으면 좋겠다고 수다를 떨었지만 그들 자신이 당사자가 될 줄은 몰랐다. 

이들의 희망사항이 이루어진 것은 그들이 동시에 실업자가 되면서부터였다. 짐 제이콥과 워런 케이시는 같은 작품에 출연하다 그 작품이 갑자기 막을 내리자 ‘남는 시간’을 그들의 꿈에 쏟기 시작했다. 작업은 무려 2년 넘게 계속되었다. 창작 도중에도 이들은 이 작품이 시카고 밖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커녕 공연을 올릴 수 있을지 확신조차 없었다. 하지만 곡 위주로 하나씩 장면을 완성해 가면서 작품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스> 초연은 아마추어의 냄새를 다 빼지는 못했지만 소위 ‘진정성’이 충분했다. 의외로 많은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사연을 펼쳐 나가는 꽤 좋은 작품이었다. 십대들의 사랑 이야기보다 임신, 아르바이트, 십대 폭주족, 앞 날이 안보이는 진로 등 그 시절 그들을 힘들게 했던 이슈들을 빼곡히 담았다. 반면 이성애 지상주의와 커플링에서 해피엔딩을 찾으려는 기조는 아무리 리바이벌을 거친다 해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계다. 


뮤지컬 <그리스>에서 가장 히트한 넘버인 <Summer Night>

끊임없는 리바이벌

이 작품은 시카고에서만 8개월 동안 공연됐다. 뉴욕의 제작자들이 소문을 듣고 시카고를 찾아와 공연을 본 뒤, 뉴욕행을 바로 결정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뉴욕에서 공연하면서 시카고 오리지널 버전이 담고 있던 다소 사회적인 주제인 이민자 출신 백인 노동계급의 문제나 인종차별, 여권 문제 등이 꽤 희석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 초연 대본에는 오리지널의 향기가 꽤 많이 남아 있다. 

<그리스>는 오프브로드웨이 극장인 다운타운의 '에덴 극장'에서 개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 토니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에덴 극장이 천 석이 넘는 좌석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압도적인 인기 덕분이었다. (브로드웨이와 오프브로드웨이는 좌석수로 나뉜다. 500석 이상 규모에 브로드웨이 작품에 부합하는 세금과 개런티를 지급하는 극장은 브로드웨이, 499석까지의 극장은 오프브로드웨이로 분류한다. 이는 지역 개념이 아니라 상업 규모에 따른 분류로, 만약 2천석이 넘는 극장을 대관해 공연한다고 해도 브로드웨이에 관한 개런티를 지급하지 않는다면 브로드웨이 공연이 아니다.) 하지만 그 해 토니상은 흥행을 선도한 <그리스>가 아니라 스티븐 손드하임의 흥행 실패작 <Folles>가 휩쓸었다. 이후 그리스는 몇 번이나 리바이벌 됐지만 토니상은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그리스>의 첫 공연 대본은 생각보다 꽤 어두우며, 십대들의 인생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이 때문에 두 번째 리바이벌 공연부터는 1978년에 개봉해서 큰 성공을 거둔 올리비아 뉴튼 존과 존 트라볼타가 주연했던 영화 버전 <그리스>의 히트곡과 장면을 섞어서 공연해 왔다. 현재까지 리바이벌 된 모든 버전이 다 다른 것도 <그리스>의 특이한 점이다. FOX TV에서 2016년에 라이브로 방영했던 버전도 영화와 그간의 모든 버전을 섞은 결과물이다. 짐 제이콥이 미성년인 학생 배우들의 공연을 위해 전연령 관람가 버전으로 다시 쓴 스쿨 버전은 임신, 음주, 흡연, 자퇴 등의 내용을 삭제했다.

줄거리

<그리스> 오리지널 프로덕션은 1959년 라이델 고등학교 졸업생이 모여서 그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리바이벌 공연부터는 영화에서 사용된 베리 깁의 곡 “Grease"를 인트로로 시작하는 게 대세로 자리잡았다. 다른 고등학교를 다니던 샌디와 대니는 여름방학 때 휴가지의 해변가에서 만나 달콤한 시간을 보낸다. 샌디는 카톨릭 학교에 갈 예정이었지만 라이델 고등학교로 오게 되어 그 학교의 불량서클인 ‘티 버드’의 일원인 대니와 다시 만난다. 반가움도 잠시, 대니는 친구들에게 한껏 부풀려 놓은 허풍 때문에 한껏 불량미를 뽐내며 샌디를 무시하고 샌디는 대니의 무례함에 상처를 입는다. 

상처 입은 샌디를 파마자 파티에 초대해 술과 담배, 귀에 피어싱 뚫는 법을 가르쳐 주는 여학생 서클 '핑크 레이디'. 리더 격인 리조는 핑크보다는 펑크가 더 어울릴 인물이지만 50년대는 아직 펑크가 존재하기 이전. 샌디는 치어리더 팀에 들어가 대니와의 관계 때문에 끙끙 앓고, 대니는 대니대로 샌디와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해 끙끙 앓는 동안, 핑크 레이디 멤버들은 훨씬 심각한 이슈를 안고 있다. 리조는 임신을 걱정하고, 프렌치는 가망 없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미용학원을 갈 꿈을 꾸며, 마티는 군인과 결혼할 꿈을 꾼다. 

작은 소동 끝에 샌디와 대니는 데이트를 거듭하며 학교의 댄스 경연대회에도 같이 참여하지만, 샌디는 엄격한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고 참여한 터라 TV 카메라를 보자 당황해 경연장 밖으로 피한다. 대니는 대니대로 샌디가 왜 그러는지 몰라, 결국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차차와 춤을 추고 일등 트로피를 거머쥔다. 리조의 임신이 학교에 소문이 나서 학생들이 수근거리는 걸 본 샌디는 리조의 편을 들어주지만, 리조는 샌디가 그러는 게 더 가식적이라고 느껴 샌디에게 화를 낸다. 샌디는 리조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은 리조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며 사과를 하고, 리조는 그제야 샌디의 진심을 깨닫고 대니를 낚을 비법을 알려준다. 

졸업식 날, 대니는 샌디에게 잘보이려고 분홍색 가디건을 입고 나타나 두리번거리는데, 샌디는 검은 가죽 바지에 검은 탱크탑을 입고 나타나 대니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지나가는 선생님과 지나가는 학생들조차도 대사가 한 마디라도 있다면 모두 이름을 지니고 있다. 핑크 레이디의 리조, 프렌치, 마티와 샌디는 남자부터 외모, 진로, 서로에 대한 힐난까지 다양한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벡델 테스트는 무난하게 통과한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남자 이야기만 하는 마티 같은 인물도 있다. 하지만 심지어 마티조차 오리지널 작품으로부터 2016년 TV버전까지 시대와 함께 변화해 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전이라는 이유로 항상 오리지널 대본에만 매이지 않는 것도 뮤지컬 <그리스>의 큰 매력이자 장점 중의 하나다. 2019년 4월에 한국에서 재공연될 <그리스>는 아마도 짐 제이콥이 만든 스쿨 버전에 훨씬 가까우나 2016년의 FOX 티비 라이브를 참조할 것으로 보인다.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Yes

이 작품에 나오는 핑크 레이디들의 고민은 안쓰러울 정도다. 샌디야 전학을 온 ‘요조숙녀’로 시작한다 쳐도, 오랫동안 한 학교를 다니며 서로의 속옷 색깔까지 속속들이 아는 그들이지만 내면의 고민을 서로에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속으로 삭히며 끙끙 앓는다. 이런 모습은 그들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못마땅한 취급을 받는지 잘 보여준다. 

하지만 바로 그 덕분에 이 인물들은 모두 제각각의 운명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간다. 두 시간 반짜리 뮤지컬 안에서 여성 인물들이 이토록 개성적이면서도 자신의 고민을 스스로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샌디는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원하는 남자를 스스로의 손으로 고르고, 리조는 임신이라는 생각에 고통 받으면서도 남들의 시선에는 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리조의 이런 결심은 임신이 아니었다는 결론으로 ‘해피엔딩’을 맞지만, 이 시련을 통해 리조는 자신이 잘못 살아오지 않았다는 생각을 확인한다. 

프렌치는 학교가 자신에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과감하게 학교를 그만두는 인물이고, 마티는 연상의 취미 때문에 늘 나이 많은 남자를 쫓다가 결국은 자기 또래의 남자 아이와 연애를 시작한다. 이 인물들 중 누구도 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노동계급의 이민자 집안의 아이들에게 대학은 고려 사항에 들어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Yes but...

샌디의 꿈은 로맨틱한 연애를 하고 사랑받는 아내가 되는 것, 리조는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미 남들과는 좀 다르게 살고 있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고, 프렌치는 미용사가 되고 싶다. 하지만 미용학원에서조차 탈락하면서 꿈이 불투명해지자 학교로 돌아온다. 마티는 돈 많고 멋진 남자를 만나는 게 꿈이지만 결국은 동급생과 연애를 시작한다. 

이들의 꿈은 거창하지도 먼 미래를 향해 있지도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막상 졸업이 다가오자 이들에게는 골치 아픈 일들이 덮쳐오기 시작한다. 

샌디는 일단 현모양처라는 꿈을 버리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 되기로 결심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리조는 임신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데, 이 때 리조가 부르는 “There Are Worse Things I Could Do” 는 리조라는 인물을 잘 보여준다. 이웃들은 이미 자신을 쓰레기라고 부르고, 어쩌면 정말로 자신은 나쁜 아이일지도 모르지만, 집에 처박혀 자신을 구원해 줄 ‘바른생활맨’을 기다릴 생각은 결코 없다. 

난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지만
넌 절대 알 수 없을 그런 이유로 감정을 느끼고 울 수 있어.

하지만 내가 하지 않을 가장 나쁜 짓은 바로 네 앞에서 우는 일이지.

드라마 <글리>에서 리메이크 한 "There are worse things I could do" 

리조는 케니키 앞에서 울지 않는다. 프로덕션에 따라 다르지만 영화 속의 리조도, 2016년의 티비 속의 리조도, 2007년의 브로드웨이의 리조도 울지 않았다. 리조는 이 작품의 페미니즘 논쟁 한가운데 선 인물이다. 리조는 여성으로서, 한 명의 당당한 인간으로서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이 훨씬 중요한 인물이며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리조에게 ‘그 애가 내 애야?’하고 묻는 오리지널 공연의 케니키에게서는 어떻게 해도 찾을 수 없는 주체성과 자존감도 지녔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조는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캐니키가 자신을 책임지겠다고 호언장담 하자 웃으며 키스해 줌으로써 리조의 당당함을 응원해온 팬들의 가슴을 무너져 내리게 하기도 한다. 원작에서는 나이 많은 라디오 디제이 빈스를 꼬시러 갔다가 역으로 꼬심을 당한 후 버림 받고 훌쩍이던 마티는 2016년 버전에서는 빈스를 무시해 버리는 인물로 변했고, 사랑에 빠지기 보다는 남자를 객관화 해서 볼 줄 아는 인물이 되었다. 특히나 자신을 향한 캣콜링을 받아넘기는 솜씨는 핑크 레이디 중 단연 발군이다. 이들 중 누군가는 목표가 있고, 누군가는 그저 살아가지만, 그것마저도 사소하고, 사소한 것조차 너무나 현실적이다.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Yes

사실 오리지널 공연은 대본만 봐도 샌디와 대니가 서로 만났다 찢어졌다 거듭하면서 장면마다 행동이 널을 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도 <그리스>의 캐릭터에 일관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니는 친구들에게 급수 낮은 샌님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욕망 때문에 샌디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샌디를 만지려 든다. 샌디가 그렇게 이랬다 저랬다 널을 뛰는 대니에게 한결같이 매달리는 이유는 오로지 지난 여름의 낭만적인 추억 때문이다. 그 때의 다정하고 상냥했던 대니가 다시 돌아와 줄 거라는 기대로 몇 번이고 배반 당하면서도 매달린다. 

샌디는 전형적인 금발의 순수한 소녀를 대변하는 캐릭터이기에, 대니가 무슨 짓을 해도 결국은 대니를 사랑하는 자리로 돌아오게 만들어진 인물이다. 그래야 이 인물이 마지막 장면에서 대니를 검은 하이힐로 밟을 때 관객들이 희열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샌디는 원작자의 품을 떠나 훨씬 많이 성장한다. 샌디는 리조와 프렌치 등 핑크 레이디를 통해 조금씩 자신이 속해 있던 틀을 깨고 남에게 보이는 인생이 아니라 진짜 원하는 인생을 향해 나아간다. 리바이벌이 거듭될수록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2016년 TV 버전에서 샌디는 과거의 영화 버전과 비교해 거의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올리비아 뉴튼 존의 롤을 그대로 살려보겠다는 연출진의 강력한 의도 말고는 없다. 리바이벌이라는 것은 과거의 누군가를 그대로 흉내내는 것이 아닌데도.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No, but...

내면의 흐름이야 어떻든 샌디는 분명히 이 작품 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연애에만 집중하는 인물이다. 마지막에 가서야 리조에 의해서 친구의 존재이유와 자신의 욕망에 눈 뜰 뿐. 심지어 그것마저도 리조의 조언에 따라 대니를 낚기 위한 복장이었을 뿐이다. 샌디가 이렇게 연애만 할 동안 프렌치는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리조 역시 임신이라 해도 스스로 받아들이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마티 역시 빈스와 해병을 차버리고 제 발로 선다. 주인공이 연애에 눈이 먼 사이에 주변 인물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주체적인 결정을 내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밌지만, <그리스>가 그런 작품이 되기까지 걸린 세월이 더 가슴을 친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Yes 

심지어 연애에 목숨 건 샌디마저 나름대로 캐릭터로서 발전을 이루는 것이 바로 <그리스>다. 심지어 여성 캐릭터만이 아니라 남성 캐릭터인 대니도 눈부신 발전을 이룬다. 그는 자신이 속한 티 버드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꿈을 꾸고 그 일을 실행에 옮긴다. 그들이 가장 무시하는 운동 서클에 가입하려고 입단 심사를 보는가 하면, 쓰레기처럼 여겼던 모범생의 상징인 학교의 이니셜이 새겨진 가디건을 입기까지 한다. 이유는 단 하나, 샌디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다. 

종합 별점 ★★★★

대니가 티 버드에게 하는 마지막 선언인 "티 버드도 중요하지만 나에게는 샌디도 그만큼 중요해"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매우 놀랍다. 결국 페미니즘은 남자들도 원하는 인생을 살게 해준다는 말이 아닌가? 작가도 예기치 못했던 예언일까? 친구들 사이에서도 철저하게 위계를 정해야만 살아남는 정글 같은 나날이 그들이라고 편할 리는 없을 테니까. 

뮤지컬 <그리스>의 여성 캐릭터들은 애초에는 리조 하나를 빼고는 모두 생각 없는 인형 같은 존재들이었다. 아니 차라리 바보처럼 다루어졌다. 이 작품이 페미니즘과 오만 광년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의 시작이 바로 이 지점이다. 게다가 샌디가 대니와 '드라이브 인 무비'를 보는 장면은 거의 성폭력 직전이다. 샌디가 자신의 반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맘대로 해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대니의 모습은 소름이 돋는다. 이 장면은 어떤 공연에서도 단 한 번도 삭제된 적 없는, 샌디와 대니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장면이기는 하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원하지 않는 섹스를 했을 수많은 십대의 여학생들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리바이벌이 거듭될수록 이 장면에서 대니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는 쪽으로 움직여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가 수없이 많은 리바이벌을 거듭하면서 여성 캐릭터들도 성장해 나간다. 특히나 2016년의 TV 버전에서 바보의 상징처럼 그려졌던 프렌치와 마티는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로 발전했다. 이들이 제대로 평가받기까지 걸린 세월이 45년. 2019년 서울에서 리바이벌 되는 <그리스>는 얼마나 변해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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