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티 오브 엔젤>
뮤지컬 <시티 오브 엔젤>의 대본을 쓴 레리 겔바트는 또 다른 브로드웨이 히트작이 있다. 바로 스티븐 손드하임이 곡과 가사를 쓴 1962년 개막작인 <A Funny Thing Happened on the Way to the Forum>이다. 둘 다 말장난과 엎치락뒤치락 뒤죽박죽 상황극으로 유명했고 평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 때문인지 대중적으로 흥행하기보다 컬트한 팬들을 양산하며 전설의 작품으로 남았다. 전작의 특징이라면 철저하게 남성 위주의 작품이라는 사실. 그 안에서 여성 인물들은 그저 남성 주인공을 거들기만 하거나, 트로피거나, 너무 아름답거나 똑똑해서 제 복을 차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시티 오브 엔젤>은 조금 달랐다. 물론 여전히 여성들은 전형적인 인물로 존재하며 지나가는 남자만도 못한 목적의식을 지녔다. 하지만 전작과는 다른 점이 있다. 래리 갤바트는 여성 인물들이 어떤 방식으로 묘사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실존하는 여성과 그 여성들이 무대나 스크린으로 옮겨질 때 어떤 식으로 왜곡되는지를 셀프 디스와도 같은 두 명의 남성 주인공을 통해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성 인물들이 두 남성 주인공들처럼 명확한 인물로 떠오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티 오브 엔젤>을 통해 래리 갤바트는 영화보다는 마이너한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통해 자신이 영화 시나리오를 쓰며 겪었던 한을 풀었고, 약자라는 입장에 놓였을 때의 자신을 돌아본다.
<시티 오브 엔젤>에 등장하는 영화계의 거물 버디 피들러는 헐리우드 영화사 MGM사를 들었다 놨다 했던 새뮤얼 골드윈을 모델로 삼았다. 영화 시작 전 사자가 커다랗게 울부짖는 바로 그 영화사다. 물론 유머러스하게, 그러나 통렬하게.
문제라면 이 이중 삼중의 유머가 담긴 작품이 한국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중이고 삼중이고를 떠나 무대와 관객 사이의 먼 거리가 마치 뉴욕과 서울 사이의 비행시간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게 흠이다. 30년이나 지난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는 그 이유가 명확해야 한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흥미롭다든가,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전에는 평가절하 되었던 인물의 새로운 가치를 찾았다든가, 새로운 시각으로 작품을 보게 되었다든가. 하지만 어떻게 보면 지금 서울에서 초연 중인 <시티 오브 엔젤>은 장님 코끼리 더듬기처럼 번역된 대본 너머에서 더듬고 있을 뿐이다.
줄거리
이야기는 두 방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영화 시니리오 작가인 스타인의 실제 생활이고, 나머지는 스타인이 쓰고 있는 영화 시나리오 <시티 오브 엔젤> 의 내용이다. 스타인이 사는 세상은 컬러톤이고 영화 속 인물들이 사는 세상은 모노톤이다.
무대는 모노톤의 영화 시나리오 내용으로 시작된다. 탐정인 스톤이 총에 맞고 검시소에 들어와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무대는 바로 현실로 넘어가 작가인 스타인은 유명 감독이자 제작자인 버디와 통화를 하며 회상 장면은 물론 시나리오 곳곳을 지적받으며 수정을 강요당한다. 말로는 작가를 존경하다고 하지만 그러한 버디의 말이 증명해주는 것은 버디의 인내심이 아직 조금 남아있다는 것 뿐이다.
스타인이 쓰는 시나리오 <시티 오브 앤젤>의 주인공 스톤은 2차 대전에서 돌아온 경찰. 아름다운 클럽 가수 바비에게 청혼하지만 바비는 유명해지고 싶어 영화제작자와 밀회를 나누다 스톤에게 들킨다. 스톤은 총을 빼들고 엎치락 뒤치락 끝에 제작자는 죽는다. 스톤은 경찰을 떠나고 바비는 스톤을 떠난다. 그 트라우마를 안고 있지만 스톤은 여전히 금발의 미인만 보면 정신을 놓는다.
탐정사무소에 찾아온 오로라는 의붓 딸 맬러리를 찾아 달라며 거절할 수 없는 보수를 내놓고 떠난다. 그를 짝사랑하는 영리한 비서 울리는 그를 위해 온갖 어려운 일을 마다 않고 그를 위해 충고를 아끼지 않지만 그에게서 돌아가는 것은 빈 껍데기 같은 ‘사랑한다’는 말 뿐.
찜찜해 하면서도 금발의 미인과 돈이라는 두 가지에 모두 매혹당하는 스톤. 결국 오로라가 나이 많은 부자인 남편의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의붓아들, 딸, 치료사까지 모두 제거하기 위한 시나리오로 이용당했음을 깨닫고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다. 그 순간 아뿔싸, 오로라가 쥔 총이 세 번 불을 뿜고 그는 자신도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한편 현실 속의 스타인은 제작자이며 감독인 버디에게 휘둘린다. 그러면서 자신이 쓴 내용을 모두 뉴욕의 출판사 편집장인 여자친구 개비에게 보여주고 충고를 빙자한 첨삭을 받는 형편이다. 버디는 아름다운 배우와 결혼했지만 아내가 바람을 피울 수 있게 주선해서 편하게 오입질을 멈추지 않는 인물이다.
개비는 자신의 모든 충고보다 천박한 버디의 한 마디에 휘둘리는 스타인에 실망하던 참에 뉴욕에 일을 하러 떠난다. 개비가 사라진 빈 자리에 버디의 비서 도나가 스르륵 들어온다. 도나는 한 때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했지만 예쁘고 여자라는 이유로 비서 자리에 눌러앉은 신세. 이리저리 휘둘리는 스타인을 보며 자신의 야망이 치고 들어갈 자리를 본 도나는 스타인을 걱정해 주는 척하며 그와 잠자리를 갖고 함께 시나리오를 써준다.
하지만 그의 호텔방에 걸려온 개비의 전화를 도나가 받으면서 스타인은 개비를 설득하기 위한 갖은 거짓말을 편지로 쓰고 뉴욕으로 날아가고, 그가 사라진 일주일 동안 도나는 버디가 원하는 내용으로 대본을 완성해 시나리오 작가 크래딧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데 성공한다.
영화의 첫 촬영 날, 화가 나 어쩔 줄 모르는 스타인 앞에 스톤이 나타나 뭘 망설이냐며 이 모든 것은 네가 쓴 이야기가 아니냐고 격려하고, 스타인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스튜디오를 때려부수고 난리를 치며 작가의 꿈이 현실이 되는 세상을 꿈꾸며 이야기 속의 인물과 작가는 떨어질 수 없다며 즐거워한다.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여성을 소비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방법
우선 이 작품은 벡델 테스트를 명백하게 통과하지 못한다. 이름 있는 여성들이 꽤 많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서로 대화를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개비와 도나라는 꽤 진취적인 여성들이 등장한다. 개비는 원래 주인공 스타인의 아내로 설정되어 있지만, 웬일인지 한국 공연에서는 아내가 아니라 여자친구로 변경했다. 개비는 뉴욕의 출판사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는 여성이다.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남자친구의 시나리오를 거의 공동집필 정도로 봐주면서도 여전히 ‘남자는 여자를 너무 몰라’ 따위의 노래나 부른다.
하지만 개비는 스톤이 나중에 바람을 핀 뒤에 숫자까지 붙여가며 자신의 거짓말을 감추려 할 때, 그 거지 같은 시나리오 다시 써오라며 단번에 거짓말을 간파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둘은 뉴욕에서 만나 결혼했을 것이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뉴욕에서 인정받은 극작가들이 헐리우드에 스카웃되는 케이스를 충실히 따랐을 것이다.
동부의 끝과 서부의 끝에 놓인 이들의 관계는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다. 개비는 능력 출중한 편집자이자 일하는 여성이지만, 사랑 때문에 자신을 어느 정도는 희생한다. 그러면서도 사랑이 자신을 배신하자 가차없고 우아하게 스타인의 뼈를 때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반면 도나는 헐리우드에서 볼 꼴 못 볼 꼴을 다 본 인물로, 사랑이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스타인은 자신이 도나를 사로잡았다고 착각하지만, 사로잡힌 것은 오히려 그 자신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이용하려던 바로 그 방식으로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는 분노가 차올라 어쩔 줄을 모른다.
30년 전에 원작에서도 도나는 ‘나쁜 여자’가 아니라 야망 있는 여자로 그려졌지만, 현재 서울에서 공연중인 <시티 오브 엔젤>에서의 도나의 위치는 매우 어정쩡하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주인공을 등친 나쁜 여자의 포지션에 가깝다. 아니, 왜?
이 작품은 시나리오 작가 스타인의 말을 빌리면, 스타인이 쓰는 <시티 오브 엔젤> 등장인물들은 모두 실제 인물들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의 시나리오에는 탐정 스톤을 짝사랑하는 충실한 비서 울리가 등장한다. 도나는 코웃음을 친다.
당신이 내 진짜 모습을 안다면...
하지만 스타인도 스톤도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데. 극 중 인물과 극중극 인물이 서로 겹쳐지고, 어긋나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작품의 네 명 같은 두 명, 두 명 같은 네 명, 아니 한 명 같은 네 명의 인물인 개비, 바비, 도나, 울리를 계속 비교할 수밖에 없다. 본의 아니게 글이 조금 길어져 미리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No, but...
개비, 바비, 도나, 울리 모두 자신만의 운명을 지니지 못한다. 이 작품 속에서 개비는 주인공인 스타인을 좌절에 빠지게 하는 인물이고, 바비는 시나리오 속의 스톤에게 트라우마를 선사하는 인물이다. 울리는 그러한 스타인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돕는다.
도나 역시 자신만의 운명을 지니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마지막 순간에 도나는 어디론가 희미하게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도나가 마지막에 무엇을 해야 할 지 서울 프로덕션은 찾지 못했다. 사실을 말한다면 마지막 순간에 승리의 팡파레를 울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도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래리 갤바트의 대본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들만을 위해 준비된 운명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 중에서 그나마 가장 진취적인 인물이 도나다. 왜냐하면 도나는 욕망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0년대의 여성은 욕망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욕망하는 여성은 마녀고, 나쁜 여자였다.
1989년에 초연된 오리지널 프로덕션에서 스타인은 도나가 자신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 하나에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잠자리 까짓거'를 콧방귀 뀌며 말하는 도나 앞에서 스타인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와 잠자리를 갖는다’ 는 고전적인 공식에서 도나가 어긋나 있기에 도나는 스타인의 내면에서 ‘창녀’의 자리로 내려앉는다. 자신의 시나리오를 도와줄 때는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울리’였던 도나가 순식간에 추락한다.
자신이 한 행동은 눈꼽만큼도 돌아보지 않는 스타인의 모습이 30년 뒤 서울에서는 꽤 매력이 없기 때문인지, 그는 유부남이 아니라 여자친구가 있는 미혼남으로 변신한다. 도나는 남자 배역들이 진심으로 부러울 것 같다. 알아서 조금이라도 더 사랑받을 수 있게 손을 써주니 말이다.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Yes
일단 개비의 목표는 어느 정도 보인다. 개비는 스타인이 애원하고 매달려도 그를 두고 뉴욕으로 가버린다. 그리고 자신에게 대본을 보내 첨삭을 부탁하지 말라고 딱 부러지게 말한다. 개비는 너를 더 이상 도와주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는 되는 인물이다. 개비는 자신의 일로 성공하고 싶어하며 스타인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다. 사랑이 문제지 능력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스타인이 개비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면 몰라도.
도나를 보자. 도나의 목표는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 것이다. 여자친구의 조언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스타인은 도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입구와도 같다. 도나는 서슴없이 스타인을 이용한다. 스타인이 자신의 크레딧을 훔쳐갔다고 절규하자 그 앞에서 정말로 ‘너 혼자 대본을 썼다고 생각하냐’고 묻는 도나의 대사는 속이 다 시원할 지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사를 도나의 입을 통해 스타인에게 들려주는 원작자 래리 갤바트의 자기 반성에 살짝 감탄한다. 페미니즘이 미친듯이 역풍을 맞고 있던 1989년의 뉴욕에서 그는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가를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대사를 자신의 페르소나인 스타인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 스타인이 이렇게 제대로인 여성 인물들을 자신의 시나리오에서 어떻게 끌어내리는지를 보자.
스타인이 쓰던 시나리오 속 바비는 성공 밖에 모르는 속물이다. 현실 세계에서 개비가 스타인을 두고 뉴욕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속물인 바비에게 남은 것은 불행한 앞날뿐이다. 바비는 오로지 사랑하는 스톤, 즉 스타인의 분신하고만 섹스를 해야 하건만 헐리우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 못이겨 유명 감독과 섹스를 하다 자신에게 들킨다.
그리고 바비는 스톤이 뽑아든 총으로 감독을 쏘고, 스톤은 바비의 누명을 자신이 덮어쓰고 경찰에서 해고된다. 감독의 사인은 총사가 아니라 심장마비로 왜곡되고, 그 모습을 옆에서 본 동료 라티노 형사 므라즈는 백인 남자에게만 관대한 세상을 부르짖으며 어제까지의 동료를 인생의 적으로 삼는다. 여기서 스톤은 자신이 애인인 바비의 죄까지 뒤집어 썼으니 바비와 결혼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바비는 냉정하게 약혼반지를 빼버리고 그를 떠난다.
유명배우가 될 줄 알았던 바비는 사창가의 고급콜걸이 되어 조우한다. 이미 감독 앞에서 옷을 벗은 것으로 바비는 창녀의 위치로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스타인은 자신이 바쁠 때 도와주지 않고 일한다며 떠난 개비를 바비에 투영해 사창가의 콜걸로 추락시킨다. 그리고 스톤을 약혼자 대신 누명까지 덮어쓴 영웅으로 만들지만, 애당초 스톤이 총을 빼들지 않았다면 됐을 일이 아닌가.
느와르 장르 속의 남자들의 기만이 작품 안에 속속들이 배어 있고, 그 안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어이없는 벌을 받고 있는지를 이 작품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드물다. 대사 때문에 웃다가도 정신 차리면 등골이 서늘하다.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Yes, but...
사실 이 작품 속에서 가장 비이성적인 인물들은 모조리 남자들이다. 주인공인 스타인부터 보자. 그는 사랑하는 감정 하나 없이 도나를 유혹한다, 고 착각한다. 사실 유혹한 것은 도나다. 스타인은 도나의 유혹을 진심으로 착각하며 자신이 도나를 이용했다고 역시 착각한다. 남성은 여성을 이용할 수 있지만 ‘진짜’ 여성은 남성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케케묵은 편견 속에서 스타인은 자신을 이용한 도나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속았고, 이용당했고, 자신의 자리를 넘봤는데 심지어 성공했다! 그것도 고작 여성인 비서가! 이는 계속 반목했던 감독 버디에게 화가 나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다.
그리고 그가 쓴 시나리오 속 주인공 스톤을 보자. 스톤은 과거에 금발 미인 바비에게 혹독하게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금발의 미인만 보면 정신을 놓는다. 그리고 자신이 찾아내야 돈을 받을 수 있는 오로라의 의붓 딸 멜러리가 섹시한 속옷만 입고 자신의 침대 속에서 유혹을 하는데, 일단 즐기고 보자는 심정으로 멜러리의 유혹에 사정없이 넘어간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자. 어떤 여성도 낯선 남자가 자신의 침대에 누워서 유혹한다고 해서 넘어가지 않는다. 소리를 지르고 경찰을 부르지. 그 남자가 아무리 잘생겼다 해도 속옷만 입고 섹스를 노골적으로 의미하며 유혹해 온다면 그 남자는 미친 인간이다. 하지만 스톤의 생각은 다르다. 아름다운 여성이 유혹해 오면 넘어가고 본다. 감독인 버디는 뭐가 다른가. 그는 자신이 가진 지위와 부를 이용해 모든 사람들을 깔아뭉개며 살아가는 변태적인 인물이다.
이 안에서 오히려 개비, 바비, 도나, 울리는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렇다. 그들은 ‘정상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편으론 전형적인 인물이다. 특히나 스타인이 쓴 시나리오 속 인물인 울리가 그렇다. 도나 역의 배우가 같이 연기하는 울리는 주급을 제대로 못 받으면서도 스톤을 짝사랑해서 비서로 일해주는 인물이다. 그런데 극중극의 내용만 봐도 스톤이 해야 할 대부분의 일은 울리가 알아낸다. 오로라의 집 주소도, 오로라의 재정상태도, 오로라와 아들의 불륜도 모두 울리가 알아낸다. 스톤이 그동안 하는 일이라고는 오로라에게 유혹 당하고 멜러리와 뒹굴다 잡혀가고, 속절없이 사창가를 뒤지다 옛 애인 바비와 조우하는 정도다.
남자 주인공이 그러는 동안 전형적이지만 그렇기에 자기 캐릭터를 벗어나지 않는 여성 인물들은 착실하게 자기 자리를 지킨다. 그들은 플롯 안의 인물들이다. 하지만 역시나 여기서 구원해주는 인물도 도나 뿐이다. 거듭 말하지만 도나는 30년이 흐른 오늘날 <시티 오브 엔젤> 이라는 극에서 가장 제대로 대접 받아야 할 인물이기도 하다. 도나는 음모를 숨긴 인물이고, 자신의 꿈을 위해 스타인을 이용하는 인물이다. 마지막에 그렇게 흐지부지 무대 귀퉁이에서 타자기를 두들기며 흐지부지 될 인물은 아니지 않은가?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No, but...
개비, 바비, 울리 모두 사랑만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동인이다.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목표가 있는 도나와, 마지막에는 눈을 뜨는 개비 덕분에 이 항목은 반반이다.
연애를 하는 게 나쁜 일이 아니다. 연애 자체가 왜 나쁘겠는가. 이 작품 속의 남자 인물들인 스타인, 스톤, 버디를 보자. 그들은 만사를 여성들에게 휘둘리면서도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모든 의사결정을 하는 인물들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남자라서?
아니다. 남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큰 그림’을 본다는 그들의 환상이 이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보다 더 그 큰 그림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찌질하게 드러날 수가 있단 말인가. 때문에 이 작품은 코미디다. 그것도 지독하게 웃긴 코미디다. 이 코미디를 보며 웃고 싶은데, 현실의 참담함을 생각하면 반쪽만 웃을 수 있기 때문일까? 극장의 대부분의 관객들은 작가가 웃어주길 바란 장면에서 웃어주지 않는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No, but...
이 안에서 내면이 발전하는 인물은 스타인의 여자친구로 등장하는 개비이고 외적으로 자기 커리어의 성장을 이루어내는 인물은 도나다. 울리와 바비는 발전하기보다 머무는 인물이고, 시나리오 속 인물 바비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물이다.
실제 인물이 발전해 나갈 때 그들을 모델로 한 인물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덜떨어진 짝사랑꾼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작가인 스타인이 그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 뿐 만 아니라, 여성들은 연예계에서그런 존재였고 앞으로도 그런 존재일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이다.
여성 인물은 지고지순하게 사랑만을 바랄 것, 그렇다면 울리처럼 목숨을 건질 터이니. 스타인이 쓴 느와르 시나리오 <시티 오브 엔젤>의 가장 무서운 교훈이다. 그리고 주인공 스톤은 그러한 대본을 쓴 스타인을 희화화 한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너 없이는 나는 없다고 외치는 노래는 수많은 가수들과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커버하는 곡이다. 이 노래는 작가와 그의 인물이 결국은 같은 기반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코믹하게 보여주는 노래이자, 한 편으로는 남성들의 바닥도 없는 자기애의 상징이다.
이 놀라운 코미디는 극중극 느와르의 줄거리가 어디로 가는지에는 관심도 없다. 그랬다면 스톤이 드럼통에 묶였다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탈출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은 헐리우드라는 거대 자본 안에서 작가 따위는 그저 하나의 톱니처럼 갈려들어가는 존재임을, 그 안에서 작가가 요구하는 여성이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여성들은 항상 가장 잘게, 잔혹하게, 개성없이 갈려나와 인스턴트 커피처럼 소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삼십년이 흘렀지만 말이다. 그리고 거듭 생각하건대, 스타인이 쓴 대사보다 도나가 쓴 대사가 더 훌륭하다. 그렇고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