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스물여섯번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테레즈 라캥

알다뮤지컬여성 주인공

2019년 스물여섯번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테레즈 라캥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뮤지컬 <테레즈 라캥>

초연 2019년 6월18일 ~ 9월1일, 예스24스테이지 2관
대본 정찬수
작사 정찬수, 이수연
작곡 한혜신
무대디자인 김미경
의상디자인 안현주

 

1867년에 발간된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은 150년 넘는 세월 동안 '욕망의 교과서'였다. 애정을 갈구했으나 결코 채우지 못했던 인간들. 성인이 되어 터져 나오는 욕망이 갈피를 잡지 못하다, 결국 욕망의 대상을 파괴함으로서 자기 자신마저 파괴해 버리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 모든 파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주인공 테레즈 라캥이다. 테레즈의 모든 것이었던 아버지는 손에 잡히지 않는 존재였다가 그나마도 먼 곳에서 죽었다. 자신의 주변에 남은 유일한 존재는 아버지의 누이, 라캥 부인이다. 테레즈는 라캥 부인에게서 애정을 갈구할 수 밖에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라캥 부인의 애정은 초지일관 아들인 까미유를 향해 있을 뿐이다. 생기를 잃은 까미유의 앞에 바깥 공기가 흘러들어온다. 바로 로랑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로랑도 라캥 부인도 아닌, 매주 목요일마다 라캥 부인의 집으로 도미노 게임을 하러 오는 그리베와 미쇼, 쉬잔이다. 이들은 외부 세계의 시각이자 테레즈에게는 사회 전체를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뮤지컬 <테레즈 라캥>은 이들을 지워버린다. 남은 주인공 네 사람의 감정과 욕망에 더욱 집중되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결과를 보자면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주인공 네 명만 남긴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정도다. 

특히 테레즈를 다루는 방식은 처참할 정도다. 150년 전에 이미 누구보다도 자기 욕망에 충실했던 테레즈는 뮤지컬 <테레즈 라캥>에는 없다. 여기에 있는 것은 그저 넋 나간 여자 한 명이다. 그리고 그 여자를 이용해 집을 차지할 욕심이 드글드글한 로랑이 있다. 나머지 두 명은 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일까? 

에밀 졸라는 이미 1873년에 자신의 소설을 직접 각색한 대본으로 무대에 올렸다. 뮤지컬 버전은 이 졸라의 각색본을 완전히 무시한 것일까? 그렇게 무시하고 남은 게 뭘까? 무언가가 있긴 하겠지만 거기에 테레즈는 없다. 

뮤지컬 <테레즈 라캥>에 테레즈는 없다. 여성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우고, 여성을 지우거나 그 여성을 단죄하거나, 그 여성에 모든 죄를 덮어씌우는 것, 이 모든 일이 뮤지컬 <테레즈 라캥>에서 테레즈에게 일어난 일이다.

줄거리

생각 없는 자동인형처럼 사촌이자 남편인 카미유의 간병인과도 같은 삶을 살던 테레즈는 남편의 친구인 화가 지망생 로랑과 사랑에 빠진다. 카미유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갈 기회도 없는 테레즈와 로랑은 밀회조차 자주 하지 못하는 현실에 불만을 느끼면서 카미유를 장애물로 여기게 된다. 

센 강으로 소풍을 나간 날, 로랑과 테레즈는 카미유를 배 밖으로 밀어 죽이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들의 죽음 앞에 실신한 라캥 부인은 중풍에 걸려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한다. 테레즈와 로랑은 카미유를 죽인 죄책감에 시달려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다, 결국 서로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울음을 터트린다. 두 사람은 이내 독을 나눠 마시고 세상을 떠나고 라캥 부인만 살아남는다.

19세기 말에는 한국도 프랑스도 여성의 성욕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만 쓰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21세기가 된 2019년에도 역시 여성의 성욕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백오십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여성은 욕망해서는 안되는 존재다. 

그리고 이 뮤지컬은 그 방식을 철저하게 보여준다. 욕망하는 여성으로서 단죄 당할 운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손을 떠나 자유를 추구했던 안나 카레니나, 애당초 욕망의 해부대상으로 설정되었던 테레즈 라캥. 이 두 여성 주인공은 보수적인 뮤지컬 서사 안에서 잔인하게 단죄의 대상이 된다. 백오십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재판받고 있다. 

에밀 졸라가 써냈던 수많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욕망에 충실했고,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었다. <목로주점>, <나나>,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등의 갖은 여성 주인공 가운데 테레즈는 그야말로 '검은 눈동자가 욕망으로 번쩍인다'고까지 묘사되었다. 그런데 뮤지컬에서 테레즈는 왜 또 단죄의 대상으로 전락했나? 그게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Yes, but...

누가 테레즈보다 더 강렬한 운명의 소유자일까. 파리의 퐁네프 다리 근처 좁고 작은 집에 갇혀 살지라도 테레즈의 삶은 마치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강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그 운명은 순전히 테레즈 그 자신이 지닌 욕망 때문이다. 

그 욕망은 표면적으로는 성적인 불만으로 터져 나오지만, 실제로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송두리째 부인당하는 현실에 순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현실을 견디기 위해 테레즈는 처음에는 무반응으로, 그 다음에는 로랑을 손에 넣는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방해 요소인 카미유를 제거하는 것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그 방해 요소가 사라진 순간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없앤 것이 의자나, 약병이나, 시든 꽃다발과 같은 물건이 아니라, 숨 쉬고 걸어 다니던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죄책감이 테레즈를 휘감는다.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 <고발하는 심장> 이 그의 가슴 속에서도 뛰고 있다. 그 고발하는 심장은 테레즈가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는 증거다. 

소설이나 에밀 졸라의 희곡 속의 테레즈는 그 두려움을 견디려고 애쓴다. 원작에서 유령을 보는 것은 테레즈가 아니라 로랑이다. 방문자들의 비서인 쉬잔이, 로랑이 그리는 모든 그림의 인물들이 카미유의 창백한 얼굴을 닮았다고 속삭인다. 쉬잔조차도 가서 볼 수 있는 로랑의 아뜰리에에 테레즈는 가 볼 수 없다.

뮤지컬 <테레즈 라캥> 무대. 한다프로덕션

 카미유가 없어도 테레즈는 집에 묶인 존재다. 과거 집 안에는 카미유가 이기적으로 손길을 갈구했고, 이제 그 카미유의 엄마인 라캥 부인이 불구가 된 몸으로 휠체어에 앉아 테레즈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카미유를 죽였어도 테레즈는 어디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원작이나 희곡 속에서 테레즈와 로랑을 결혼하라고 밀어부치고, 카미유가 죽은 뒤 일 년이나 같이 애도해준 외부인들이 뮤지컬 속에는 없다. 그래서 뮤지컬 속의 인물들은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고 음침하고 좁은 무대 위를 부유한다. 테레즈 역시 무대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둥둥 뜬 채로 앞의 대사를 다음 대사가 부인하는 희한한 인물이 되어버린다. 

원작에 따르면 테레즈와 로랑은 카미유를 죽인 이후 일 년간 착실하게 라캥 부인을 받들면서 속으로는 썩어간다. 어쨌든 그들은 살아가는데 성공하고, 마침내 그들이 바라마지 않던 결혼에도 골인하지만, 카미유의 침대에서는 잠들 수 없다는 사실을 바로 깨닫는다. 아니, 이들은 훨씬 더 많은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갈구하지조차 않으면서 그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한다. 

마침내 결혼한 날 밤 이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싸우다가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와본 라캥 부인에게 들킨다. “너희가 내 아들을 죽였어!” 뒷목을 잡고 쓰러진 라캥 부인은 눈만 부리부리하게 뜬 산 송장 같은 인물이 된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위로해 주려고 목요일 밤마다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테레즈와 로랑을 고발하려고 시도한다. 자신들의 이름을 테이블 위에 물로 쓰는 라켕 부인을 보면서 하얗게 질린 테레즈와 로랑은 말리지조차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졸라가 쓴 대본의 하이라이트는 휠체어에서 라캥 부인이 일어서서 테레즈를 가리키며 너희를 소유하여 복수하겠다고 외치는 장면이다.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이렇게 라캥 부인과 테레즈, 로랑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인 외부인들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해 그저 테레즈와 로랑이 독이 든 청산가리를 나눠 마시고 죽는 결론으로 건너 뛰어간다. 

그 사이에 등장하는 로랑의 ‘밥 줘’는 그야말로 한국적 각색의 백미라고나 할까. 원작의 테레즈에게 주어진 욕망의 주인으로서의 운명이 뮤지컬 속에서는 그저 산산히 흩어져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 지경이다.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Yes, but...

테레즈에게는 목표가 있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 갖고 싶은 것을 가지는 것. 누군가를 돌보는 존재로 살지 않는 것. 마치 <알라딘>의 지니처럼 테레즈도 자신을 위해 살 자유를 꿈꾼다. 

지니의 자유는 알라딘에 의해 주어진다. 물론 지니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지만 그토록 헌신했던 지니조차도 자신에게 자유라는 ‘선물’이 정말로 주어질 거라고 꿈꾸지 않는다. 하지만 테레즈에게는 자유를 선물해줄 그런 사람이 없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로랑이라고 여긴다. 

자유가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경우는 없다. 특히나 테레즈와 같은 처지의 여성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테레즈는 자유라는 목표를 위해서 로랑을 유혹하고, 로랑과의 인생에서 자신의 삶을 찾기를 원한다. 문제는 그 제거 대상의 어머니인 라캥 부인이 여전히 한 집에서 눈에 불을 켜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뮤지컬에서는 로랑이 집의 주인이 카미유가 아니라 라캥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라캥 부인의 살해를 입에 담는다. 어렵게 살아온 로랑의 목표가 그저 재산이라는 사실을 안 테레즈가 로랑을 죽이기 위해 칼을 든다는 설정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애당초 카미유의 죽음은 테레즈의 욕망과 상관없는, 로랑의 재산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간다. 

그렇다. 뮤지컬 <테레즈 라캥>은 로랑의 욕망에 휘둘린다. 테레즈는 전반은 카미유의 소유욕에, 후반은 로랑의 소유욕에 허수아비처럼 휘둘린다. 원작에서 카미유의 유령에 시달리는 사람은 로랑이지만, 뮤지컬에서는 테레즈다. 테레즈는 헛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는 신경쇠약 직전의 모습으로 로랑의 꿈을 허물어트리고, 로랑의 목표를 방해하는 넋 나간 여자로서 존재한다. 원작에서 로랑에게 정신 차리라고 하던 테레즈는 없다. 뮤지컬에서는 로랑이 테레즈에게 제발 정신 차리라고 애원하고 소리 지르고 화를 낸다. 테레즈는 마치 로랑을 악몽으로 끌어들이고 자신은 도망치는 연약한 신경쇠약 환자처럼 보인다. 

원작의 나쁜 역할을 모두 떠맡은 테레즈는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넋이 나간 모습으로 그저 무대 위를 떠돌며 무대 위의 남자들에게 못할 짓만 하다 죽는다. 이런 테레즈에게서 애당초 원작의 강렬한 목표의식을 보려면, 간신히 원작을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다른 장면을 새로 써야만 가능하다. 조금 많이 슬픈 일이다.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No

원작 속의 테레즈, 희곡 속의 테레즈는 붕괴되지 않는다. 심지어 라캥 부인이 집어들려다 떨어트린 칼을 집어들고 그 칼로 로랑을 찌르겠다고 결심하는 순간까지도, 테레즈는 자신 하나를 위해 살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한 인물이다. 카미유의 그림지가 짙게 드리운 그 집 안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고 살아갈 길을 찾는 인물이다. 

테레즈가 무너지는 순간은 전신이 마비된 줄 알았던 라캥 부인이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서는 순간이다. 이미 라캥 부인의 아들을 죽인 일로 심신이 쇠약해진 테레즈는 차마 그의 어머니까지 죽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둑어둑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신경 쓰이는 존재이자 끊임없이 카미유를 연상케 하던 라캥 부인이 자신들의 죄를 낱낱이 알아채고 두 다리로 우뚝 서서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때, 테레즈와 로랑이 할 수 있는 일은 라캥 부인을 죽이든가 그들 스스로를 죽이는 것 뿐이다. 이들은 후자를 택한다. 자신들을 스스로 단죄하고 라캥 부인을 혼자 남겨놓고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이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밀어부치는 요인이 그저 까미유의 유령 뿐이다. 그것마저도 테레즈만 괴롭힌다. 뮤지컬 속의 테레즈는 라캥 부인을 혐오했다가, 바로 이어서 라캥 부인에게 용서와 애정을 바라며 무릎을 꿇는다. 이러한 장면은 그 이전부터 테레즈가 라캥 부인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애증의 단서가 충분할 때만 가능한 변덕이다. 

뮤지컬 속에서 테레즈는 초지일관 메마른 대사만을 칠뿐이라 후반부의 몰아치는 심경의 변화는 그저 변덕이라는 말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왜 테레즈가 변명해야 하나. 테레즈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죄를 지었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심지어 그 죄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 죄를 씻기 위해 라캥 부인에게 헌신하면서도 괴로워한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보이는 것은 귀신을 본 테레즈, 넋이 나간 테레즈뿐이다. 테레즈를 돌려달라.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Yes, but...

테레즈는 어쩌면 한 번도 누구도 사랑하지 않은 인물이다. 로랑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한 때는. 하지만 그것은 로랑의 탈을 쓴 자기 자신에게서 생기를 찾고 싶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의 열기가 카미유를 살해하며 사라지자, 로랑에 대한 카미유의 사랑도 사라진다. 장애물인 카미유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손도 함께 잡지 않는다. 장애물이 사라지자, 애정의 대상이 비로소 보인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저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테레즈의 상황이다. 

하지만 뮤지컬 안에서의 테레즈는 로랑에 한없이 매달리고 또 매달린다. 원작 속에서 로랑이 매달리던 것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로랑에게 유령에 시달린다고 질책하던 테레즈는 무대 위에는 없다. 테레즈 그 자신도 죄책감에 시들어 가면서도, 로랑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노력하던 그 테레즈는 없다. 

테레즈가 이 작품 속에서 전적으로 자신의 의사로 결정한 것은 로랑을 죽이려고 칼을 들었을 때 뿐이다. 로랑의 말처럼 테레즈는 카미유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게끔 로랑을 몰아붙였지만, 그것을 자신의 결정이 아닌 것처럼 숨겼다. 그렇게 영리했던 테레즈지만, 하다 못해 카미유의 대체물조차 되지 못하는 로랑에게는 단순히 분노로 칼을 치켜든다. 동시에 로랑은 테레즈의 와인에 청산가리를 타고, 이 모습을 바라보는 라캥 부인은 소리 없이 회심의 웃음을 웃는다. 

하지만 뮤지컬 속의 카미유는 사실 로랑에 대한 사랑으로 카미유를 죽이는데 공모하고, 로랑에 대한 사랑이 식어, 로랑에게 칼을 겨눈다.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 로랑과 독약 든 포도주를 나눠 마시는 장면은 관객을 설득하지 못한 채 멍한 비극이 되어 막을 내린다. 원작에서는 테레즈의 마지막 결정이었던 자살조차 뮤지컬에서는 떠밀린 죽음으로 끝나버린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Yes, but...

둘 다 에밀 졸라가 썼지만, 원작 소설과 희곡 속의 테레즈는 다르다. 원작이 테레즈의 속마음을 현란하게 풀어 헤친다면, 에밀 졸라가 쓴 희곡 속의 테레즈는 그보다 좀 더 의뭉스럽다. 속마음을 입 밖으로 좀처럼 내놓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레즈는 성인이 되어가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축적해 간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 삶을 꿈꾼다. 카미유의 약을 먹지 않는 삶, 종이 울리면 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게로 내려가지 않아도 되는 삶, 누군가 자신을 부르면 무조건 달려가지 않아도 되는 삶. 그러나 그런 삶을 테레즈는 결국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다. 

좋은 인물들은 여정을 거쳐 다른 인물이 되어 마친다. 테레즈의 여정이 결코 긍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죄의 댓가를 과감하게 자신의 목숨으로 치른다. 희곡에서 라캥 부인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죄를 밝히겠다고 하자 희미한 웃음까지 띄며 대꾸한다. 스스로 단죄하고 스스로를 재판하겠노라고. 그리고 테레즈는 청산가리가 든 물을 스스로의 손으로 마시고 세상을 떠난다.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생각도, 다른 누구에 의해 재판받을 생각도 없다. 

카미유와 라캥 부인에게 휘둘리던 테레즈는 카미유를 죽임으로서 자신의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죽인 사람이 살던 바로 그 집에서 악몽을 꾸며 죄책감에 시달릴지언정, 거기 맞서면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하지만 뮤지컬 속의 테레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친 여자'로 존재한다. 넋이 나간 채로, 처음에는 멍하니, 마지막에는 비명으로. 테레즈의 결단력과 인지력은 드러나지 않는다. 테레즈 없는 테레즈 라캥. 그렇다고 다른 인물들의 서사가 빈 자리를 채워주는 것도 아니라서, 대체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게 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종합 별점 ★★

답답한 공간,
답답한 테레즈

원작 속에서는 라캥 부인의 집 구조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좁은 계단과 계단참에 난 문 속의 좁은 방. 계단참에서 테레즈와 로랑은 밀회를 나누고 뒷문에서 키스를 나눈다. 좁고 어두운 이 집은 아래층부터 위층까지 온전하게 한 층을 차지하며 독립된 공간이 없는 참과 참 사이의 집으로 묘사된다. 

때문에 뮤지컬의 무대를 처음 보았을 때는 가게 공간과 위층까지 알뜰하게 네 구역으로 나뉜 모습을 보며 그 사이에서 긴장감을 찾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가게 공간은 아예 의미가 없었고, 이들의 생업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위층은 이들이 몰래 밀회를 나누는 장면으로 사용됐는데, 원작에서는 일주일 또는 한 달을 기다려 밀회를 나누던 이들과 다르게 ‘아무도 듣지 못해!’ 라는 전제 조건 하에 시도 때도 없이 밀회를 나눈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그래서 이들이 대체 무엇에 목이 마른지 이유가 모호해지고 만다. 

무대는 등장인물이 네 명 뿐인 무대를 더욱 비좁게만 만들 뿐, 벽과 벽 사이, 계단 사이의 긴장감을 전혀 살리지 못한 내용으로 인해 거대한 장애물처럼 무대 위에 버티고 있다. 의상은 섬세한 고증을 거친 듯, 당대의 디자인을 살린 버슬 스타일다. 하지만 좁아진 무대 위 소품 사이를 간신히 지나칠 정도라 아슬아슬할 지경이다. 게다가 인형의 집처럼 지어진 무대 탓에 가려진 조명으로 인해 의상의 가치를 드러내지도 못해 답답함만 더했다. 

하지만 이 모든 답답함이 주인공인 테레즈의 묘사만 할까. 욕망하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전면에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성이 소설 속에서도 원작자의 희곡 속에서도 미친듯이 자신의 욕망과 삶의 열망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 남은 것은 ‘미친’ 설정 뿐이라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없애버린 인물들로 인해 날아가버린 디테일을 고스란히 테레즈에게 죄를 돌리고, 죄책감을 극대화하고, 로랑에 의지하게 만들어서 해결할 생각이었다면 대체 왜 이 작품을 무대화하기로 선택했는지 궁금해진다. 앞 대사가 뒷 대사를 배신하는 이 일관성 없는 작품 속에서 간신히 길을 잃지 않고 스스로를 찾아가는 배우들에게 연민 어린 격려까지 건네고 싶을 정도다. 테레즈 라캥은 이렇게 다루어질 인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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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S

뮤지컬 속 여성

01

2019년 첫째 주, 마리 퀴리

02

2019년 둘째 주, 엘리자벳 폰 비텔스바흐

03

2019년 셋째 주, 오목

04

2019년 넷째 주, 클레어

05

2019년 다섯째 주, 알렉산드라 오웬스

06

2019년 일곱째 주, 그레첸

07

2019년 여덟째 주, 제루샤 '주디' 애봇

08

2019년 아홉째 주, 메리 포핀스

09

2019년 열번째 주, 핑크 레이디

10

2019년 열한번째 주,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11

2019년 열두번째 주, 아랑

12

2019년 열세번째 주, 샬롯 드 베르니에

13

2019년 열네번째 주, 나팔, 혜란, 이은숙

14

2019년 열다섯번째 주, 에바 호프

15

2019년 열여섯번째 주, 1976 할란카운티의 여성들

16

2019년 열일곱번째 주, 앤 보니, 메리 리드

17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1) 마법에 걸린 사랑

18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2) 바그다드 카페

19

2019년 스물한번째 주, 빨래

20

2019년 스물두번째 주, 자스민

21

2019년 스물세번째 주, 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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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스물네번째 주 안나 아르카지예브나 카레니나

23

2019년 스물다섯번째 주, 조왕, 덕춘

24

2019년 스물여섯번째 주, 테레즈 라캥

현재 글
25

2019년 스물일곱번째 주, 음악극 <섬>

26

2019년 스물여덟번째 주, 기네비어와 모르가나

27

2019년 스물아홉번째 주, 허초희

28

2019년 서른번째 주, 강향란, 차순화

29

2019년 서른한번째 주, 진

30

2019년 서른두번째 주, 개비, 바비, 도나, 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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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서른세번째 주, 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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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서른네번째 주, 옹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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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서른다섯번째 주, 엠마 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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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3) 갓 헬프 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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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서른여섯번째 주, 마리 앙투와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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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서른일곱번째 주, 베스

37

2019년 서른여덟번째 주, 그 여자

38

2019년 특별편 - 무대에서 보고 싶은 뮤지컬 영화 (4) 호커스 포커스

39

2019년 마흔세번째 주, 루미 헌터

40

2019년 마흔다섯번째 주, 아드리아나와 엘로이즈

41

2019년 마흔여섯번째 주, 레베카 드 윈터스

42

2019년 마흔일곱번째 주, 아이다

43

2019년 마지막 주, 암네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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