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공연 2019년 2월22일~3월17일 대구 봉산문화회관 가온홀
진 웹스터가 1912년에 내놓은 소설 <키다리 아저씨>가 세상에 나온 지 백 년이 지났다. 키다리 아저씨라는 말 자체가 익명의 후원자를 뜻할 정도로 유명하고 친근해진 작품이다. 하지만 큰 틀 안에서 보면 서구적 로맨스의 가장 오래된 형태인 ‘키워서 잡아먹기’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다. 이런 형태의 로맨스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은 전형적이다.
남성은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다. 그는 이야기 속에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온갖 세상 경험을 다 하며 나이를 먹어 가고 인간으로서 무르익어 가치를 완성해 간다. 반면 여성의 가치는 아름다움이 기본이고, 젊고 때 묻지 않아야 한다. 그게 전부다. 그 여성의 성격이 순응적이지 않을 때 흔히 말괄량이라거나 반항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곤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곧 사랑에 빠져 세상 정숙한 부인의 길을 걷는다.
다행히도 <키다리 아저씨>를 쓴 진 웹스터는 미국인이었다. 신대륙에는 귀족이 없는 대신 금권으로 나뉘는 계층이 있었다. 그리고 주인공 제루샤 '주디' 애봇은 그 계층을 뛰어넘는데, 단지 돈 많은 후원자의 후원금 덕분이라고는 할 수 없다.
원작 소설 <키다리 아저씨>는 <작은 아씨들>, <빨강머리 앤> 등과 더불어 여성 중심적 서사, 특히 성공한 말괄량이 서사로 큰 사랑을 받았다. 물론 <키다리 아저씨>는 언뜻 보면 신데렐라 스토리의 새로운 구현 방식이라 비난 받을 만도 하다. 작품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고아인 여성에게 대학교육을 받게 해 준 익명의 후원자가 그 여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누가 봐도 무산계급 여성의 부잣집 마나님 되기다.
하지만 이런 단순화는 원작자인 진 웹스터 뿐만이 아니라 주인공인 주디에게도 다분히 모욕적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제루샤다. 뮤지컬에서도 제루샤라고 불린다. 그러나 원작에서 주인공은 존 그리어 고아원의 원장이 전화번호부에서 맨 처음 본 이름을 붙여버린 '제루샤 애봇'이 아니라, 가족이 있었다면 불러 주었을 법한 애칭인 ‘주디’로 불리길 원한다. 그 바람을 따라 이 글에서는 주디로 부른다.)
줄거리
주디는 존 그리어 고아원의 가장 나이 많은 고아이자 고등학교 졸업반이다. 어느 날 고아원 생활을 까는 ‘우울한 일요일’이란 에세이를 쓴 게 후원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면서 주디에게는 진학의 기회가 주어진다. 조건은 후원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말 것, 한 달에 한 번씩 학업 진척상황을 간단하게 편지로 알릴 것. 주디는 허둥지둥 뛰어나가 후원자가 어떤 사람인지 엿보려 하지만, 조명을 따라 입구에 길게 늘어진 그 분의 그림자가 보일 뿐이다.
이후 주디는 그 익명의 후원자를 ‘키다리 아저씨’라 부르며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던 가족이라 여기고 대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을 미주알 고주알 편지로 써서 보내기 시작한다. 이 편지를 받아본 후원자는 뉴욕의 유명한 부자인 펜들턴 집안의 이단아인 제르비스 펜들턴. 그가 이단아인 이유는 부자인데도 사회주의자이며 자선사업에 서슴없이 돈을 쓰기 때문이다.
주디의 편지를 받으면서 점점 주디가 궁금해진 그는 자신의 조카를 방문한다는 핑계로 학교에 나타난다. 주디가 그에게 처음 보낸 편지는 온통 그의 생김새를 궁금해 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대머리일지, 뚱뚱할지, 나이가 많을지 등등. 하지만 주디가 그에게 발탁됐던 에세이의 내용을 떠올려 보면 주디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에 마냥 기뻐하기만 할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우울한 일요일'은 고급 차를 타고 도착하는 화려한 복장의 부자 후원자들을 위해 고아원을 쓸고 닦으며 일요일에도 쉴 수 없는 고아 처지를 시니컬한 유머감각으로 써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에세이로 발탁된 이후, 한 번도 본 적 없는 후원자에게 답장 없는 편지를 계속 써야 하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주디를 지탱해 주는 것은 바로 그 자존감과 유머감각, 그리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이다.
그 남자가 사랑만 할 때 그 여자는 쑥쑥 자랐다
다른 유복한 가정의 학생들에 비해 아무런 상식도 교양도 없었던 주디는 대학에서 무서울 정도로 지식을 흡수해 나가며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돈으로 생활하고 교육받는다는 사실과 자신의 신념 사이의 괴리감을 뼈저리게 느낀다. 제르비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주디만의 신념이 여기서 발생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주디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받은 돈을 빚이라 여기며 갚을 궁리를 시작하고, 제르비스는 그렇게 될 경우 자신과 주디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주디의 자립을 막으려 애쓴다.
원작 소설은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일방적인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 샐리나 샐리의 오빠 지미, 돈 많고 이기적인 펜들턴 집안의 아가씨인 줄리아 등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뮤지컬에서는 주디와 제르비스 단 두 명만이 등장하고, 주디의 편지 속에 담긴 제르비스의 일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뿐만 아니라, 주디의 편지를 받은 제르비스의 반응이 드러난다는 게 특징이다.
뮤지컬 속 제르비스는 주디의 단어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주디가 비슷한 나이대인 샐리의 오빠 지미를 사랑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고통 속에서 주디와의 관계를 일년이나 단절하면서까지 자신의 감정을 끊어내려 몸부림 치면서도 주디를 자신에게 옭아맬 궁리 뿐이다. 하지만 주디는 밀당을 하면서 주디를 조종하려는 제르비스와 달리 묵직한 돌직구로 직진을 해나가며 독립할 수 있는 여성이자 작가로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마침내 주디는 제르비스에게 자신의 첫 소설을 판 대금을 보내며 돈을 갚기 시작한다. 소설에서도, 대부분의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제르비스의 오열 장면을 뮤지컬의 이 장면에서 볼 수 있다. 그 순간 제르비스는 자신이 아무리 곁에 묶어 놓으려 해도, 아무리 물량 공세를 해도 그 때마다 더 강한 반발을 일으키며 스스로 일어서려 하는 주디라는 인물에게 무릎을 꿇는다. 씩씩하게 자신을 앞질러 나가는 주디 앞에서 제르비스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하는데, 그 때마저도 어찌나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는지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하지만 어쨌든 주디는 그 사랑을 받아들인다.
벡델테스트를 무대 위에 등장인물로만 적용한다면, 이 작품은 벡델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본 전제가 성립되지 못한다. 여성 한 명, 남성 한 명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간문을 고려하여 극 중에 언급된 내용까지 포함한다면 주디는 벡텔 테스트를 거뜬히 통과한다. 그가 친구들인 샐리나 줄리아 등과 나누는 대화들은 제르비스와 상관없는 그들만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주디를 좌지우지 하고 싶은 제르비스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끊임없이 주디의 동급생들에게 질투를 느낀다.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Yes
주디에게는 주디의 운명이 있다. 그것은 결코 제르비스의 현숙한 아내가 되는 길은 아니다. 주디는 제르비스와 결혼하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작가가 되고 자립을 했을 인물이다. 첫 여름방학 때 기숙사에서 더 머무를 수 없게 된 주디는 울며 겨자먹기로 고아원으로 돌아가 일을 도울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그 때 주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키다리 아저씨에게 하소연 하는 일 뿐이었다. 키다리 아저씨는 주디를 불쌍히 여겨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락윌로우 농장에서 여름을 보내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정체를 숨기고 그 농장을 방문해 여름의 휴가를 즐긴다.
인맥이라고는 고아원 원장과 키다리 아저씨 뿐이었던 주디의 인생은 대학을 통해 확장되고 마침내 자립의 길을 찾기에 이른다. 그것은 키다리 아저씨, 아니 제르비스가 가장 원하지 않는 길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는 주디가 자신이 편지를 보내는 대상이 제르비스라는 사실을 모르면서 키다리 아저씨에게 그와의 일에 대해 수다를 떤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주디의 경악과 부끄러움이 큰 재미를 준다.
하지만 이 ‘사태’를 만들어내는 주체는 주디이다. 제르비스가 아니다. 왜냐하면 제르비스는 이미 이야기 중반에 주디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주디가 제발 내 돈 받고 내가 하라는 것만 하라는 후원자의 이기심을 거부하고, 제 손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순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역전한다. 후원자에게 주디의 운명이 매달린 게 아니라, 제르비스의 운명이 주디에게 대롱대롱 매달리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 이야기의 키는 주디의 손에 있다.
제르비스가 주디에게 자신의 조카딸인 줄리아의 것과 같은 화려한 의상들을 보냈을 때 주디가 그 옷을 받고 싶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자. 이 많은 돈을 언제 내가 다 갚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주디에게는 응석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Yes
고아원에 있을 때 주디의 일차적 목표는 고아원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고아원을 벗어난 것도, 작가가 되라는 압박도 제르비스 때문이었지만, 주디는 처음에는 작가가 되길 바란다는 키다리 아저씨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에 무언가를 진짜 써서 세상에 내고 싶다는 욕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평생을 굶은 사람처럼 지식을 허겁지겁 채워 넣으며 주디의 꿈은 진심으로 작가가 된다. 주디의 꿈은 타인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면서 구체화되어 가고 실현되어 가는 것이다.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Yes
주디의 성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명랑하고 유머러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앞에는 ‘고아원 출신이지만’이 주로 붙는다. 주디가 고아원 밖의 평범한 가정의 식탁을 상상할 수 없었듯이, 그 평범한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고아원의 삶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주디는 고아원에서 자란 사람들은 우울하다는 편견을 깬다. 주디는 마침내 그 편견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소재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세상에 발표하기에 이른다.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Yes
주디의 결정은 항상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았다. 제르비스는 그런 주디를 휘두르기 위해 후원인의 명령이라는 고압적인 전략을 몇 번이나 써보지만, 그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그보다 더 격렬한 반발이었다. 주디는 ‘우울한 일요일’이라는 글을 썼을 때부터 이미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글을 누가 읽을지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일요일을 우울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향해 글을 썼던 인물이다.
주디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주디는 항상 키다리 아저씨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항상 ‘스미스씨는 ...’으로 시작하는 명령문이었다. 주디가 내린 결정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결정은 자신의 첫 소설의 원고료를 전부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낸 것이었다. 당신이 준 돈을 이제는 갚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그 편지와 수표는 제르비스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온전한 인간으로서 주디라는 인물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결정이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Yes
주디는 발전한다. 그것도 놀라운 속도로 쑥쑥 발전해 나간다. 처음에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려 들지만, 이내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마다 희열을 느끼며 나아간다. 주디가 발전해 가는 속도는 따라잡을 수가 없을 정도다. 주디 자신의 말처럼 보통의 가정에서 자랐다면 응당 알았어야 했을 것을 알지 못한 탓에, 주디는 그 모든 걸 따라잡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결국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주디는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차선을 선택하지 않으며, 자신이 가난하다는 걸 알면서도 앞날에 희망이 있다고 믿고 전업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농장으로 들어가 최소한의 소비로 살아갈 계획을 세운다. 결혼이 모든 여성의 무덤이 아니라면, 제르비스가 확실히 주디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주디는 결혼하고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을 인물이다. 이 작품의 중심은 주디의 성장에 있다
종합 별점 ★★★★★
이 작품이 완전무결한 작품은 아니다. 먼저 어느 로맨스 작품이나 그렇듯이 제르비스와의 이해할 수 없는 '꽁냥거림'이 있다. 제르비스와의 사건 위주로 흘러가는 뮤지컬 의 특성상 주디가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고학년 시기의 많은 사건들은 생략되고, 주로 둘 사이의 그리움으로 채워진 것이다. 이 시기의 이해하기 어려운 원거리 로맨스는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인 걸 생각하면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특히나 한국 프로덕션으로 옮겨지면서 제르비스가 더 강압적인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한국 프로덕션의 제르비스는 주디와 소통하기보다는 주디를 리드하려는 태도가 더 강하게 드러난다. 분명히 제르비스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줄리아 펜들턴은 그를 사회주의자이자 집안의 이단아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주디와 사랑에 빠지자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행동들, 즉 자신이 가진 자본과 후원자의 권위를 통해 주디를 좌지우지 하려는 의지를 서슴없이 보여준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제르비스는 자신의 그런 행동을 부끄러워 하는가? 뉴욕과 한국, 그리고 배우들마다 캐릭터 해석과 태도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도 한국 프로덕션의 제르비스는 대체로 그 권력을 매력의 일부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 주디에게 청혼하고 입 맞추는 장면의 해석도 한국 프로덕션에서는 배우에게 맡겨져 있다. 제르비스를 맡은 배우에 따라 손목을 잡아 기습 키스를 하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허락을 받고 키스를 하기도 한다. 결국 해당 연출은 제르비스를 맡은 배우가 생각하는 '로맨틱'이 무엇인지에 맡겨져 있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장면의 결정권이 주디가 아닌 제르비스에 주어지는 것이다. 부디 한국의 주디가 원작을 뛰어넘어 무럭무럭 자라기를.
1919년 무성영화 <키다리 아저씨>. 원작의 시대 배경과 의상 등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무성영화 시대 최대의 순수함의 상징이었던 메리 픽포드가 주연을 맡았다. 주디의 고아원 시절과 후반부의 제르비스와의 연애시절을 대비시키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고아원 시절을 부각시켰고 로맨스에 있어서도 제르비스를 한없는 순정남으로 변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