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헬렌 앤 미>
최근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 제작이 붐을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장애를 지닌 여성,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 액티비스트였으며 자신의 욕망에도 충실했던 것으로 알려진 헬렌 켈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올라온다는 소식은 꽤 기대감을 주었다. CJ아지트 대관 지원작으로 선정되어 나름 선전했던 뮤지컬 <앤ANNE> 을 만들었던 극단 ‘걸판’의 작품이기도 하다. 게다가 앤 설리번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헬렌 켈러가 만난 모든 인물들이 “미(me)” 라고 하니, 제목에서부터 헬렌 켈러를 입체적으로 그리려는 시도라고 짐작할 수 있다.
줄거리
뮤지컬 <헬렌 앤 미> 의 전반부는 그의 인생을 다룬 작품들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작품일 영화 <미라클 워커>와 크게 다르지 않다. 헬렌이 태어나고 19개월만에 크게 앓으면서 청력과 시력을 동시에 잃는다. 어머니는 영국 작가인 찰스 디킨스가 미국 여행을 하다 본 교육 받은 장애인에 대한 글을 떠올리고, 퍼킨스 시각장애인 학교에 전화해 헬렌을 가르쳐줄 가정교사를 요청한다.
학교에서는 이제 막 졸업한 스무살의 유능한 선생님이라며 앤 설리번을 추천한다. 앤은 디킨스가 쓴 로라의 교육과정을 샅샅이 읽은 후 헬렌의 집에 도착한다. 제멋대로인 헬렌과 실랑이 끝에 헬렌은 마당의 펌프에서 손에 물을 맞으며 단어를 깨우치고 맹렬히 공부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 소식을 들은 퍼킨스 학교 측은 앤 설리번을 초청해 기자 회견을 열고, 앤과 헬렌의 독특한 소통방식은 신문에 크게 나며 두 사람은 유명인이 된다.
마침내 퍼킨스 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의 부속대학인 레드클리프 학교로 진학한 헬렌은 앤 설리번과 함께 자서전 출판 계약을 맺지만,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지 못하게 하는 앤과 마찰을 빚으며 된통 싸운다. 게다가 헬렌이 스스로 사회주의자라 선언하자, 언론들은 장애인인 헬렌이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아냐며 모든 것은 설리번의 조종이라고 헐뜯는다.
설리번이 헬렌을 독점하려고 한다는 루머까지 돌자, 헬렌은 설리번에게 이별을 고한다. 알고 보니 설리번에게는 장애를 지닌 동생을 잃은 슬픈 과거가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화해하고 헬렌은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설리번을 보고 싶다는 노래를 부른다.
앤 설리번과 헬렌 켈러가 주인공이고 장애를 극복해 가는 내용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남녀간의 긴장감이나 사랑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헬렌 켈러의 스승인 앤 설리번의 결혼조차 한 마디 설명도 없고, 다음 장면에서 느닷없이 남자 배우가 헬렌 켈러의 남편 역을 하고 있을 정도로 애정사에 아무 관심을 두지 않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근본적으로 아직 미완의 상태에 놓여있다. 두 번의 워크샵을 거쳤다고 하지만, 여전히 헬렌 그 자신의 생각이나 인생관이 잘 보이지 않는다. 헬렌 켈러의 생애가 타인에 의해 어떻게 보였는가를 짚어갈 뿐이다. 학예회를 연상케 하는 조악한 완성도 속에서 헬렌과 설리번의 캐릭터를 찾아내야 하는 것은 난감한 일이 되었다.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Yes, but...
뮤지컬 <헬렌 앤 미> 속의 설리번이나 헬렌이 아닌 실제 인생 속의 설리번과 헬렌은 그러하다. 헬렌은 후천적인 장애로 어둠과 고요 속에 갇혔다가, 앤 설리번을 만나 모든 사물에는 그 사물을 지칭하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을 글자로 쓰며 사람들은 목의 울림을 통해 소리를 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갇혀있던 만큼 예민하고 배움에 목말랐던 헬렌은 수많은 지식을 미친듯이 흡수했고, 마침내 자신만의 지향점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
앤 설리번 역시 눈이 멀어가는 중에도 첫 제자인 헬렌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 둘 모두 매우 고집이 세고 주장이 강했다. 특히 헬렌은 비록 보이지 않지만 붉은 구두를 선호했고, 성적인 욕망도 매우 강해서 한 때는 젊은 남성과 야반도주를 불사하려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뮤지컬 안에서 드러나는 헬렌에게서 자신만의 운명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처음 헬렌이 소리 지르지 않으면 아무도 와주지 않아서 소리를 질렀다는 넘버를 부를 때만 해도 헬렌의 성장이 기대됐다. 하지만 그 이후 헬렌의 목소리는 내내 들리지 않고,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친구들과 자연과 설리번을 보고 싶다는 마지막 노래로 돌아오기까지 내내 불행하기만 할 뿐이다. 그 불행의 이유는 물론 장애다. 그렇다면 이 작품 속의 헬렌은 장애를 극복하기는 한 것일까?
앤 설리번 역시 헬렌에게 전적으로 묶인 인생을 보여준다. 헬렌으로 인해 유명인이 되지만 그런 헬렌을 가두려 하며 헬렌에게 집착한다. 이런 앤의 모습을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극이 끝나버린다. 이 둘은 서로에게 묶이고, 그 묶인 상태에서 화해하며 끝난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그 자신만의 운명이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 이 작품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Yes but...
앤 설리번은 처음 등장했을 때 매우 자유로운 여성처럼 등장해 헬렌을 가르칠 수 없다고 단언하지만, 그런 설리번을 움직인 것은 높은 가정교사비였다. 그걸 받고 가난을 탈출하겠다고 신이 나서 출발한다. 설리번은 극중에서 돈이 걸린 문제마다 예민하게 반응한다. 돈을 벌기 위해 보더빌 쇼에 출연하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즉, 설리번은 돈을 많이 버는 게 목표인 인물처럼 보인다. 앤 설리번에게서 헬렌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목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헬렌의 목표는 알 수가 없다. 헬렌은 이 작품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성장해야 하는 인물이지만, 보는 사람이나 연기하는 사람이나 이미 헬렌이 무지의 암흑에서 벗어나 지식의 세상으로 들어가리란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이다보니, 헬렌의 성장은 어느 정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이 성장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헬렌은 늘 누군가에게 끌려 다니며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인물처럼 그려진다.
실제 헬렌 켈러를 만났던 현실 속의 수많은 인물들은 헬렌 켈러가 식탁에서 얼마나 당당하게 양해를 구하고 그릇들을 손으로 만져 점검한 후 빵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않고 놀랄 만큼 아름답게 식사를 했던지, 그 광경에서 감탄을 금하지 못하곤 했다. 그러나 뮤지컬 속에서는 그런 헬렌의 자립한 모습은 볼 수가 없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일깨운 뒤에도 이 둘의 목표가 무엇이 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헬렌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노래로 극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실존 인물인 설리번과 헬렌은 함께 장애인을 위한 학교를 세웠지만, 뮤지컬 속에는 그런 내용도 없다. 이들의 목표는 뭘까? 극중에서는 모호할 뿐이다. 헬렌 켈러는 설리번 선생 이후에도 두 명의 동반자와 훌륭한 동지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작품 속의 헬렌 켈러와 설리번에서는 그러한 모습은 기대하기 어렵다.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No
뮤지컬 <헬렌 앤 미>의 헬렌과 설리번에게는 주어진 플롯이 있다. 헬렌은 각성하고 앤 설리번은 그런 헬렌을 통해 구원받는다. 이건 너무나 명확하게 주어진 길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이 둘의 캐릭터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다뤄진다. 특히나 이 작품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개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심각한 내용을 가볍게 보여주려는 의도인지는 모르겠다.
작품 속에서 앤 설리번은 처음에는 장난스러운 인물로 등장했다가, 헬렌에게는 매정한 인물이 된다. 헬렌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장례식에 가지 못하게 할 때는 그 이유조차 모호하다. 자신이 헬렌을 독점하기 위해서인지, 정말로 헬렌의 건강을 걱정해서인지 관객은 끝까지 알 수가 없다. 반면 헬렌은 처음에는 야수처럼 날뛰다가 이내 ‘얌전’해진 이후로는 머리에 리본을 묶고 설리번이 이끄는 대로 맹렬히 수업을 받는 모습을 보인다.
생리통을 못참아 수업시간에 설리번과 실랑이 벌이는 장면을 보자. 언론은 설리번이 헬렌을 무시하고 마구 다뤘다고 보도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며 실제 상황을 보여주는데, 실제 상황 역시 언론이 보여준 것과 똑같아서 관객 입장에서는 당황스럽다. 헬렌의 공부를 위해 늘 헬렌 옆에서 수화로 통역해 주어야 했던 설리번은 헬렌을 극단적으로 몰아부치는 인물로 그려진다. 헬렌이 생리통으로 고통을 호소하자 참으라고 짜증을 내던 설리번은, 헬렌이 육성으로 아프다고 소리 지르자 독일어 선생에게 ‘생리통’ 때문이라고 아무 일 아닌 듯 말해버린다. 선생은 난잡한 단어를 입에 올린다고 화를 내고, 설리번은 생리통이 왜 난잡한 단어냐고 항의한다. 하지만 헬렌 입장에서 보면 생리통을 참으라고 다그치는 설리번이나 생리통을 난잡한 단어라고 말하는 독일어 선생이나 도움이 안 된다는 점에서 그다지 차이점은 없다.
주어진 상황은 있으나, 그에 대응하는 두 사람의 행태는 그저 단편적으로 그려질 뿐이다. 이 작품은 플롯상 가야 할 길은 있으나 캐릭터는 보이지 않는 상황으로 그저 두 시간을 끌어갈 뿐이다.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Yes, but...
이 뮤지컬에는 연애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헬렌이 대학을 들어가는 장면 이후 갑자기 출판사와 계약을 맺는 남성이 등장하고, 그 남성이 헬렌의 남편으로 불린다. 연애에 구애받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인과조차 설명되지 않는 인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장면마다 등장한다. 그 인물들이 아무리 현실에서 실재했던 인물들이라 해도 극중에서는 최소한의 소개라도 필요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추가되고 나열만 되는 새로운 인물들은 다음 장면을 위해 필요할 뿐이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했다는 이유로. 헬렌과 설리번 선생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연애에 구애받지는 않되, 정해진 플롯에 철저하게 매인 인물들로 전락한다.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No
실제 헬렌 켈러의 인생에서 이 둘은 갈등과 화해를 거듭하며 착실하게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인 서사에서부터 실패하기 때문에 사실 그 발전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둘은 싸우다 말다, 싸우다 말다를 계속하는데 그 이유가 캐릭터 자체의 성격 때문인지 주어진 상황 때문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단편적으로 그려진 인물들의 한계를 이보다 잘 볼 수 있는 무대도 드물 듯하다. 예를 들어 앤 설리번의 동생은 실제로는 어려서 결핵으로 죽었는데, 극중에서는 목발을 짚고 나타나 이유도 모르게 갑자기 죽는다. 정말로 이 작품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지나치게 많다. 그리고 가장 알 수 없는 이유는 왜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실제 헬렌 켈러의 삶이 주는 울림은 매우 크다. 영문학 시간에 교제로도 사용되는 헬렌 켈러의 에세이인 ‘내가 사흘만 눈이 보인다면’을 마지막 노래로 만든 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 앞의 전개가 엉망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눈이 잘 보이는 관객들의 연민에 기댄 신파 이상의 효과를 보지 못한다.
종합 별점 ★☆
헬렌도 없고 나도 없는
뮤지컬 <헬렌 앤 미>는 미완성이다. 헬렌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조차 결정하지 못한 듯 어지럽게 널려 있는 모습이다. 극단 걸판의 말에 따르면 그저 장애인이 아닌 사회운동가로서의 헬렌까지 모조리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극중에서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는 헬렌은 그저 철이 없어 보인다.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게 된 이유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눈이 멀어도 냄새 맡고 느낄 수 있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저 '장님인 내 말을 들어주지 않다니 이상한 사람들이야!'하고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한 헬렌 켈러의 모습을 무대 위에서 내내 보는 것은 힘들다. 실제 헬렌 켈러가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놀랍지만 그가 여성주의자로서, 사회주의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자립을 위해 내딛기 시작했을 때 언론은 그러한 모습은 없었던 일처럼 지워버리려 시도한다. 그 모습이 헬렌에게서 기대했던 얌전하게 누군가의 아내로 들어앉는 인생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사회주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는 극중에 등장하지 않는다. 마크 트웨인처럼 이 둘을 열렬히 응원했던 사람들과의 일화 역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헬렌이 공연 내내 우는 얼굴로 불행해 하다가, 설리번과 싸운 뒤에는 느닷없이 영화 <미라클 워커>처럼 설리번의 죽은 동생의 이야기를 내세워 갑자기 화해하는 모습도 납득하기 어렵다. 실재했던 인물을 다룰 때는 왜 그 인물을 다루려 하는지, 그 목표와 의도를 위한 에피소드를 취사선택하는 것부터 대본 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 작품은 이미 그 단계에서부터 삐걱인다. 그렇기에 이 작품 속에서는 헬렌도, 미(me)도 없다. 이 작품은 1962년에 개봉했던 <미라클 워커>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영화가 주었던 감동마저도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