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초연 2006년, Lincoln Center's Mitzi E. Newhouse Theate(Off Broadway)
작사/작곡/대본 Michael John LaChiusa
안무/연출 Graciela Daniele
출연 Phylicia Rashad, Daphne Rubin-Vega 등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하지 않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38살에 살해 당해 세상을 떠난 스페인 작가 가르시아 로르까의 마지막 작품이다. <피의 결혼식>, <예르마>와 함께 ‘시골 비극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된다(생전 그가 이 작품을 3부작에 넣겠다는 언급을 직접 하지는 않았다). 세 작품 모두 도시가 아닌 스페인의 먼지투성이 시골을 배경으로 숨막히는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들을 다루며, 주요 등장인물들이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 결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작품들 이전에 로르까가 썼던 희곡이나 인형극 대본은 대체로 나이 많은 남자와 젊은 여자 사이의 어느 일방의 진실한 사랑, 혹은 욕심을 다룬 설화 같은 이야기였다. '시골 비극 3부작'은 이전의 작품들과 확연하게 다른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시골 비극 삼부작'은 사실은 시골 여성 비극 삼부작이다. <예르마>는 애정 없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 유일한 자기 편이 아이라고 생각해 인생의 마지막 기쁨으로서 아이를 원하지만, 결국 남편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남편을 목 졸라 죽인다. <피의 결혼식>에서 주인공은 결혼식 날 부모의 반대로 헤어졌던 유부남인 옛 애인과 도망을 가는데, 신랑과 옛 애인이 결투하다 둘 다 죽어 시체로 돌아오고 주인공 역시 죽음 혹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맞는다. 둘 다 만만찮은 비극이다. 이 두 작품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은 남성 캐릭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희생의 '끝판왕'은 결국 여성이다. 하지만 <베르나르다 알바>에는 남성 캐릭터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하지 않는 비극이다. 그리고 모든 일이 집 안에서 일어난다. 그야말로 제목대로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성씨를 물려준 남성인 '알바'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다.
줄거리
베르나르다는 집안의 독재자다. 재혼한 남편 안토니오는 잘생겼지만 부자는 아니었고 베르나르다를 창녀 취급했던 남자였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남편의 장례식 날, 베르나르다의 집은 술렁인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스페인의 전통에 의하면 과부가 검은 베일을 쓰고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이 무려 8년이라고 한다. 베르나르다가 다섯 딸들에게 앞으로 8년간 창문도 닫아걸고 왕래도 없이 애도를 계속할 거라고 선언하자 딸들은 경악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팠던 기간 동안 베르나르다의 다섯 딸에 대한 장악력은 이미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고, 아버지의 죽음은 둑을 무너뜨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마흔을 앞두고 있는 전 남편과의 큰 딸 앙구스티아스는 아버지의 유산이 딸려 있어 결혼에 가장 유리하다. 어머니의 반대와 새 아버지의 병으로 인해 결혼과 멀어졌다가 이제 막 젊고 잘생긴 로마노의 구애를 받기 시작했다. 둘째인 막달레나는 현실 순응적인 듯 보이지만 매우 냉소적이고 셋째인 아멜리아는 가장 내성적이다. 넷째인 마르티리오는 한 번 청혼을 받은 적이 있지만 역시 어머니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등이 굽은 장애 때문에 자신이 영원히 이 집에 갇힐 거라 생각하면서도 큰언니의 약혼자인 로마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다. 막내인 아델라는 스무살로 가장 아름다운 딸이자 어머니에게 가장 많이 대드는 딸이다. 언니들 몰래 로마노와 밀회하며 함께 도망갈 꿈을 꾼다.
스페인 영화 중 비슷한 소재를 다룬 <아름다운 시절(1992)>이라는 영화가 있다. 비슷한 시대인 1931년을 배경으로, 딸만 넷인 남자의 집에 한 탈영병이 숨어 들어와서 모두와 돌아가며 연애를 하다 막내딸과 결혼해 미국으로 떠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나 마이클 존 라키우사의 뮤지컬 속 베르나르다의 집은 더욱 더 그러하다.
뮤지컬은 베르나르다의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집안일을 돌보는 폰시아와 하녀들의 노래로 막을 연다. 무서울 정도로 엄한 베르나르다가 들어와 다섯 딸과 하녀들에게 8년상을 선언한 뒤 죽은 남편을 회상한다. 연극에서는 암시적으로 등장하던 ‘창녀’라는 단어가 서슴없이 노래 가사로 등장한다. 가장 무서운 건 자신을 창녀 취급 하던 남편을 극진히 애도함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으려 하는 베르나르다의 고집이 드러날 때다.
남자, 자유, 들끓는 욕망
이후 노래는 딸들을 하나 하나 호명하며 그들의 속마음과 처한 상황, 성격, 바람을 하나 하나 드러낸다. 로마노의 구애를 받으면서도 마음으로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앙구스티아스, 소문을 두려워 하는 아멜리아, 욕망을 숨길 수 없는 마르티리오가 각자의 성격을 담은 선율로 노래하다가 막내인 아델라의 노래에 모두가 가담한다. 그것은 바로 남자, 젊고 잘생긴 로마노다.
이 집안의 모든 여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은 남자든, 산 남자든, 입만 열면 남자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치매인지 정신병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가장 멀쩡한 말을 하는 할머니 호세파부터 가장 어린 하녀까지, 모두가 입만 열면 남성에 대한 끓어오르는 욕망을 뱉어낸다. 하지만 그 누구 한 명도 남자를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 이들이 욕망하는 남자는 집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남자다. 남자는 곧 자유다.
여기서 가장 독특한 인물은 마르티리오다. 마르티리오는 자신이 사랑하는 로마노가 큰언니와 결혼하는 것은 참을 수 있다. 왜냐하면 로마노는 큰언니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하지만 막내인 아델라가 로마노와 도망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로마노가 정말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델라이기 때문에. 하지만 다섯 딸 누구도 로마노가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진짜 적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막내딸 아델라의 말처럼 집이 아니라 감옥과도 같다. 모두가 감옥의 죄수들이다. 그리고 이들을 가두는 진짜 감옥의 주인, 보이지 않는 진짜 적은 폭군 같은 어머니 베르나르다 알바가 아니라 지독한 가부장제 그 자체다. 딸들은 가부장제를 욕하면서도 어머니나 폰시아처럼 ‘바깥’의 난잡한 여성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듣고 자신들의 미래를 떠올리며 전율한다.
마이클 존 라키우사는 원작 소설을 뮤지컬로 만들면서 여러 부분을 바꾸었고, 결정적으로 결말 부분을 바꿔버렸다. 이 결말은 꽤 논쟁이 될 만한 부분이다. 마이클 존 라키우사는 초연에서 로마노가 총에 맞아 죽은 것처럼 말하는 인물을 마르티리오로 설정했다. 원작에서 그 인물은 베르나르다다. 로마노와 달아나려던 아델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로마노가 죽었다는 암시를 한다. 그런데 뮤지컬에서는 그 역할에 마르티리오가 나섰다.
이런 수정 때문에 원작에서 딸들이 가부장제의 감옥의 희생양으로 조명되는 부분이 희석되고, 스스로 머리 끄댕이 잡고 싸우다 자멸하는 인물들처럼 보인다는 비판을 받았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주제가 사랑의 지독함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 등장인물들 중 누구도 진심으로 남자를 믿거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아함을 남기는 결말이다. 지독한 봉건제도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1936년 스페인의 작가 로르까가 썼던 결말보다 과연 얼마나 앞으로 전진한 것일까? 1936년에는 (여성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유의 상징으로 쓰일 수 있었던 남성이라는 존재가 2018년에도 여전히 같은 상징으로 쓰일 수 있을 것인가?
호세파와 폰시아
이 작품을 볼 때 관객들이 가장 집중하는 인물은 크게 세 명이다. 어머니인 베르나르다, 그리고 남자를 사이에 두고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넷째 마르티리오와 막내딸 아델라다. 한 편 실제로 작품 속에서 원작자인 로르까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인물은 정신 나간 할머니인 호세파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는 냉소적인 인물은 가정부인 폰시아다.
호세파는 치매 혹은 정신병에 걸린 인물이지만 가장 행복하게 살며 딸과 손녀들의 복잡다단한 심정을 한 마디로 콕 찝어낸다. 그것이 광인의 직관인지, 그녀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인지, 그렇게 살지 못한 괴로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호세파는 뮤지컬 안에서 관객의 긴장을 풀어주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자, 가장 속시원하게 정신이 제대로 박힌 대사를 내뱉고 노래하는 인물이다. 그래서일까. 마치 외눈박이의 세상에 던져진 두눈박이처럼 호세파는 방에 갇힌다. '자유의 가루'를 자꾸 흩날리면 안되기 때문이다.
호세파가 상징적인 인물이라면 폰시아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다. 연극에서는 매우 복잡한 인물로 등장하여 결과적으로 베르나르다 집안의 모든 비밀들을 수면으로 띄워 올리는 역할을 한다. 뮤지컬 속에서도 폰시아는 해설자와 같은 역할을 하되 연극만큼 파괴적인 인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뮤지컬인 만큼 인물 소개 대부분에 개입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복잡한 인물인지 멜로디로 드러낸다.
베르나르다와 다섯 딸은 한 문장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폰시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세 문장 이상이 필요하다. 권력을 가진 자인 베르나르다의 하수인이자, 베르나르다를 전복하고자 하는 하위 계층이며, 나이 순으로 결혼 시키는 전통을 무시하면서까지 비극을 말리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베르나르다보다 더 보수적인 내면으로 딸들을 욕한다. 결국 이 작품을 다 보고 나면 좁은 우리에 갇힌 쥐들처럼 서로를 물어뜯는 베르나르다와 딸들의 모습만큼이나 이들의 갈등을 키우고 조장하는 폰시아라는 캐릭터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폰시아는 마치 <예르마>나 <피의 결혼>의 코러스들을 한데 뭉쳐 만든 듯한 인물이다. 만약 전회 매진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티켓을 운 좋게 거머쥐었다면 베르나르다와 딸들만큼 이 두 인물도 흥미진진하게 주목할 만하다.
무엇이 이들을 돌아버리게 했을까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로르까의 원작만큼 친절하지는 않다. 대사량이 원작에 비해 현저하게 적다. 하지만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원작보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더 깊이 다가설 수도 있다. 마이클 존 라키우사는 한 때 브로드웨이의 ‘상업 뮤지컬’들은 진짜가 아니라며 (구체적으로 <헤어스프레이>의 작곡가인 마크 샤이먼과 뮤지컬계 전체를) 대놓고 저격할 정도로 자신의 음악에 자신만만한 인물이다. 이 저격 탓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이후 그의 공연은 10년이 넘도록 브로드웨이에 올라오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는 <See What I Wanna See> 이후 두번째로 공연되는 작품이다.
분명한 건 <베르나르다 알바>는 단지 성욕에 미친 일곱 여자를 다룬 내용이 아니다. 무엇이 이들을 돌아버리게 했을까? 그 '보이지 않는 진짜 적'이야말로 2018년 한국에서 이 작품을 순식간에 매진시킨 장본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