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 움 3. 로마

알다영화여성 주인공

블록버스터 움 3. 로마

느티

일러스트레이터: 이민

편집자 주 :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흥행에 크게 성공한 대작 영화를 '블록버스터'라 부른다. <핀치> 사전의 '블록버스터'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막대한 제작비는 들이지 않았을지라도, 흥행에 크게 성공한 적은 없을지라도, 여성이 주인공인,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의 숨겨진 대작 영화를 소개한다. '움'은 <이갈리아의 딸들>에 나오는 여성 및 일반 사람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다(남성은 맨움이라고 부른다). 언젠가 움의 영화가 블록버스터를 지배하는 그 날까지.

 

<로마>, 2018, 알폰소 쿠아론

<로마>는 <그래비티(Gravity, 2013)>에 이어 알폰소 쿠아론에게 두 번째 아카데미 감독상을 안긴 영화다. 그래비티가 산드라 블록과 조지 클루니를 내세워 우주를 무대로 한 조난극을 체험하게 하는 할리우드 영화였다면,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의 자전적이고 내밀한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1970년대 초반의 멕시코를 세밀히 그려낸다. <로마>는 넷플릭스로 전세계에 배포되었으며 2019년 4월 현재 한국 넷플릭스에서도 시청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제목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이 나고 자란 멕시코시티의 한 동네, ‘콜로니아 로마’(Colonia Roma)를 가리킨다. 이곳은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구도심 외곽에 형성한 거주지이다. 영화는 이곳 로마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일하는 가사 노동자 클레오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알폰소 쿠아론의 가족을 모델로 했을 영화 속 가족은 의사인 아버지, 화학자인 어머니, 할머니와 네 명의 아이들로 이루어졌으며, 백인들이다. 클레오를 포함한 두 명의 입주 가사노동자는 멕시코 원주민 중 하나인 믹스텍족(族) 여성이다. 1821년까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멕시코에서 백인은 특권층을 구성했다. 1945~1970년대의 멕시코는 빠른 경제성장을 기록하면서 1968년에 올림픽을, 1970년에는 월드컵을 치러낸다. 중산층 백인의 삶은 풍요로웠지만, 원주민들의 삶은 풍요와는 거리가 멀었다. 백인들의 도시 바깥의 원주민 거주지는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판자촌이고 수도시설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원주민들에게 멕시코의 경제성장은 빈부격차의 증가를 뜻할 뿐이었다. 

클레오는 어린 시절 쿠아론을 돌보아주었던 ‘리보 로드리게즈’라는 원주민 여성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이다. 쿠아론은 인터뷰를 통해 이 캐릭터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했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클레오의 일은 집을 쓸고 닦고 빨래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놀아주는 일까지 포함한다. 사실상 한 아이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돌봄노동을 맡아서 묵묵히 수행한다. 쿠아론의 애정은 나를 아끼고 보살펴 준 존재에 대한 감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이 클레오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선택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 아래로 영화 <로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상처에 관하여

쿠아론은 클레오(리보 로드리게즈)가 “상처를 함께 공유했던 캐릭터”라고 설명한다. 영화 속에서 클레오는 같은 믹스텍족 남성 페르민과 사랑에 빠진다. 달콤한 데이트가 시작된 지 석 달 만에 클레오는 임신한다. 클레오가 극장에서 키스를 나누던 중 그 사실을 조심스레 전하자 페르민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줄행랑을 친다. 이는 쿠아론의 상처가 ‘도망간 아버지’로 인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의사인 아버지 안토니오는 캐나다로 출장을 간다는 핑계로 집을 떠나는데, 사실은 바람이 난 것이었다. 그는 그 뒤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페르민과 안토니오는 극 중에서 남성다움을 과시하면서 등장한다. 페르민은 마치 무대에 선 배우처럼 방 가운데 서서 클레오에게 봉술을 선보인다. 옷을 모두 벗은 채 오랜 무술로 단련한 근육질의 몸과 페니스를 당당히 드러낸 채로. 안토니오는 비싸고 거대하고 멋들어진 자동차 ‘포드 갤럭시’와 함께 나타난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이 영화는 그들이 남성성을 과시하는 데 집착하고 있음을 관객이 포착하게 한다. 

그러나 실제 그들의 남성성은 연약하고 여성에게 착취적이라는 사실도 드러낸다. 페르민은 자신의 거처를 수소문해 찾아온 클레오에게 위협적으로 봉을 휘두른다. 강한 적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익혔을 무술을 실제로는 약한 사람을 부당하게 쫓아내는 데 쓰는 것이다. 안토니오는 이혼 후 양육비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 이사조차 가족들을 여행 보낸 뒤 도둑처럼 빈집에 들러 물건만 빼가는 식으로 해결한다. 아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엄마 소피아의 몫으로 던져둔 채로.

쿠아론 감독은 이러한 남성성의 구성을 멕시코의 역사적 맥락과 연결시킨다. 페르민은 차별 받는 원주민 남성으로 희망 없는 빈곤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에게 무술은 멕시코 사회에서 ‘보편’이 되지 못한 자신의 상처받은 남성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페르민에게 외면 당한 클레오가 다시 그를 만나는 건 1971년 6월 성체 축일 대학살(The Corpus Christi Massacre)의 와중이었다.

멕시코는 1929년부터 2000년까지 제도혁명당(Partido Revolucionario Institucional, PRI)이 장기집권하며 사실상 독재상태에 있었다. 영화의 배경이 된 1970년대는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던 시기였다. 멕시코 올림픽이 열리기 한 달 전인 1968년 10월 2일에는 멕시코시티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정부군의 발포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멕시코 정부는 30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주장하나, 시민들은 정부가 3백 명 이상의 죽음을 은폐했다고 말한다. 이 참극의 진실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고 있다.

성체축일 대학살은 틀라텔롤코 광장의 학살에 이은 2차 학살로 멕시코인들에게 기억된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극우 테러단 ‘로스 알코네스’(Los Halcones, 독수리들)이 참정권 보장과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잔혹한 폭력을 행사했고 120명가량을 살해한 사건이다.

아기 침대를 사러 간 곳에서 클레오는 학살의 목격자가 된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테러단이 된 페르민과 마주친다. 살해를 목격한 충격과 그 살해자들 사이에 아기의 아버지가 있다는 충격이 더해져 클레오의 양수가 터진다. 안토니오는 갑작스레 출산하기 위해 병원에 온 클레오를 안쓰러워하며 “분만실까지 가고 싶지만 담당의가 들여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담당의가 “분만실에 들어와도 된다”고 말하자 예약 환자를 핑계로 내뺀다. 그는 페르민처럼 봉을 휘둘러 귀찮은 상대를 내쫓지 않고 중산층 백인 남성의 우아함을 지키려 하지만 결코 어떤 책임도 함께 부담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런 안토니오의 모습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바라본다.

고요하고 강인한 클레오,
허약한 남성들

클레오와 쿠아론 감독의 내밀한 상처는 시대와 구조 속에서 연결된다. 가장 사적이라 여겨지는 사랑조차도 역사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이 영화가 매혹적인 것은 그 연결의 입체성을 세밀하고 풍성하게 재현하는 힘에 있다. 이 영화는 클레오가 서 있는 공간의 밀도를 높여 현실감을 부여한다. 한 화면 안에 전경과 중경과 후경이 있고, 그 공간 안에 있을 법한 소리 역시 다양하게 채운다. 공간(미장센)과 시간(스토리)과 소리 모두 클레오를 사회 속의 존재로 재현한다. 믹스텍족의 문화, 언어, 멕시코 사회에서 처한 현실, 그녀의 노동으로 백인 중산층 가족이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그려내면서 구조의 자장 안에서 사람 간의 관계가 지닌 복잡한 역학이 무심한 듯 묵직하게 존재를 드러낸다.

과거를 말한다는 것은 해석의 경합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미래를 어떻게 구성하고자 하는가를 다투는 것이기도 하다. 쿠아론 감독은 남성들의 ‘허약함’과 대비해 클레오의 강함을 영화 전면에 드러내고자 한다. 페르민을 찾아간 클레오는 그가 수련생들과 무술 수련을 하는 장면을 지켜본다. 무술 사범이 쉽게 하기 어려운 기술이라며 눈을 가린 채 두 손을 머리 위로 모아 올리고 외다리로 서는 자세를 선보인다. 수련생들이 그 쉬워 보이는 자세를 우습게 보다가 직접 따라 해 보는데 아무도 성공하는 이가 없다. 수련을 구경하던 마을 주민들도 뒤뚱대기는 마찬가지다. 그들 사이 오로지 클레오만이 고요하게 그 자세를 해낸다. 이 장면은 클레오가 가진 힘의 빛깔이 어떠한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클레오는 아이를 사산한다. 실의에 빠진 채 클레오는 여전히 고용인의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출산을 겪은 지 얼마 안 된 몸으로 클레오는 바다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러 차가운 물 속에 몸을 던진다. 옳은 일을 해야 할 때, 누군가를 구해야 할 때, 그녀는 도망치지 않고 있어야 할 자리에 나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구원자’가 아니다. 잔뜩 주눅 든 채 임신했다고, 날 해고할 거냐고 묻는 클레오에게 소피아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며 클레오를 따뜻하게 품는다. 소피아는 클레오가 병원 진찰부터 받을 수 있게 한다. 과시적인 위로의 언사가 아니라 상대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주는 것은 상대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때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고용인으로서 베푼 배려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공감대를 형성한 소피아가 보인 연대의 몸짓이다.

소피아의 아이들 역시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봐 준 클레오를 사랑하고 존중한다. 클레오가 몸을 던져 자신들을 구해낸 바닷가에서 소피아와 아이들은 클레오를 자신들의 가족으로 끌어안는다. 그 환대 안에서 클레오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깊은 상처를 토해낸다. 그렇게 서로의 손을 잡아 이룬 공동의 세계는 허위와 허세의 갑옷을 입고 결정적인 순간에 내빼버리는 남자들의 세계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그 세계의 바스라짐을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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