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 9.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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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 9.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되기

명숙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서울에서 무려 20년 간 여성 영화만 줄창 보는 축제가 꾸준히 열렸다. 멋진 일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는 캐치프레이즈로 열린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들을 소개한다. 페미니즘 고전 영화부터 세상을 바꾼 여성들의 이야기, 여성 영화인들의 작품 세계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을 위한 선물 같은 영화들이다.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되기(Becoming Astrid, 2018)>

파닐르 피셔 크리스텐슨

픽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몰라도 웬만한 나이든 사람도 아는 동화가 바로 ‘말괄량이 삐삐’다. 머리를 양갈래로 따고 얼굴에 주근깨 가득한 소녀 말괄량이가 나온 드라마를 본적이 있을 것이다. 영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되기>는 스웨덴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삶을 바탕으로 한 픽션 영화다. 그녀의 삶에 영감을 받았다는 설명에서 짐작되듯, 영화 속 삶은 실제 그녀의 삶을 반영했으되 완전히 일치하진 않는다.

영화의 첫 장면은 노인이 된 동화작가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아이들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이들은 묻는다. 짧은 어린 시절을 살았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아는지. 그녀의 동화적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밝은 아이

아스트리드는 어린 시절부터 말장난과 이야기를 좋아하고, 딱딱한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밝은 사람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가서 들은 성경 속 ‘소돔과 고모라’는 그녀에게 계율의 이야기라기보다 그저 상상력을 넓혀주는 소재일 뿐이다. 그녀는 소다만 먹는 나라와 굿모닝만 하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엄마는 신성모독이라고 그녀를 혼낸다. 

처음으로 간 파티에서 남자파트너를 구하지 못하자 그녀는 혼자 춤을 추기도 하고 여자 친구와 함께 '남녀 커플 댄스'를 추기도 했다.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흥겹다면 괜찮다. 밤 10시에 남동생과 함께 귀가한 그녀를 엄마가 꾸짖자 “왜 남동생은 10시고, 자신은 9시냐고, 왜 다르냐”고 대꾸하는 아스트리드.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그녀가 얼마나 독립적이며 개성이 강한지 보여준다. 그러나 성차별적인 세상에서 독립성과 개성을 잃지 않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1907년생인 그녀가 보낸 시절은 지금보다 심하게 성차별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소개해준 신문사에 입사해 교정업무를 본다. 글 솜씨가 좋아 교정만이 아니라 기사도 쓴다. 그런 그녀를 뿌듯하게 바라보는 편집장 레인홀드 블룸베리. 그녀는 이혼소송 중인 유부남인 편집장에게 끌린다. 대범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며 연애를 한다. 아뿔사, 남자의 소홀한 피임 탓에 임신을 한다. 결혼도 안한 여성이 임신이라니, 기독교집안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그녀는 마을의 시선을 피해 스톡홀름으로 건너가 비서학교에 다닌다. 가끔 밀회를 하지만 배가 불러올수록 불안하기만 한데 오히려 블룸베리는 이혼소송이 미뤄지고 부인이 간통죄로 고소하려는 것 같다고, 감옥에 가게 될 거라며 징징댄다.

용감하고 독립적인 그녀는 블룸베리에게 걱정 말라며 혼자 덴마크로 건너가 아이를 낳는다. 덴마크에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아이를 돌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서다. 귀국 후 아들 라쎄를 빨리 집으로 데려오고 싶지만 남자의 이혼소송은 끝이 안 보인다. 1년이 다 돼서야 남자는 벌금으로 때웠다고 ‘쉽게’ 말한다. 그녀는 실망하고 그의 청혼을 거절하고 헤어진다. 그녀의 고난 때마다 아이들이 보낸 편지가 내레이션으로 깔린다. 동화적 상상력은 그녀의 낙천적 성격에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메시지다.

엄마는 저절로 되지 않아

아스트리드는 혼자 애를 키우겠다고 결심한다. 아들을 데려오지 말라는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라쎄를 데려오려 덴마크로 가지만, 아들에게 있어서 엄마는 현재 아이를 돌보는 마뤼다. 그녀는 현재 라쎄의 엄마는 마뤼라는 사실에 괴로워하면서도 순순히 스웨덴으로 돌아온다. 생물학적 엄마만이 엄마라고 자처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아이에게 밥해주고 놀고 돌봐주는 사람이, 그런 관계를 맺는 사람이 엄마가 아닌가. 자신의 고통보다 아들 라쎄의 행복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을까.

마뤼가 병들자 아들 라쎄를 집으로 데려오지만 일상생활은 쉽지 않다. 자꾸 돌아가고 싶다며 짜증을 내는 아이. 그런 어느 날 아들이 아프다. 하룻밤 기침과 열로 시달린다. 한숨도 못자고 출근해 회사에서 꾸벅꾸벅 존다. 그녀에게 호감을 보였던 사장 린드그렌은 아들을 돌보라며 바로 조퇴시키고 아들의 병 진료를 위해 의사까지 집으로 보낸다. 그녀와의 훗날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이름과 에피소드다.

아무리 어두워도 자신의 빛을 잃지 않는 법

한 차례 아프고 난 후 아들은 아스트리드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이야기를 들려주며 둘은 친해진다. 이야기는 그녀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끈이었듯이 아들과의 관계도 이어준다. 이야기가 그녀에게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소다만 먹는 아이들만이 사는 나라이야기다. 어린 시절 그녀가 만든 이야기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어딘가 동화 ‘말괄량이 삐삐’와 비슷하다. 혼자 빌라에 사는 빨간머리 소녀 삐삐.

아스트리드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이야기를 잃지 않았으며 웃음도 상상력도 잃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세계적인 동화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생긴 대로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타국에 가 아들은 낳고 혼자 아이를 기르는 그녀의 독립심과 용기가 개성을 잃지 않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녀의 작품 ‘사자와 형제의 모험’처럼 절망을 겪고 난 후에도 다시 찾은 희망이 찾아오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힘,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색을 잃지 않기를 바래본다.

끝으로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는 주인공의 연기력이다. 성장에 따른 얼굴의 변화도, 표정 연기도 참 뛰어나다. 그런데도 여배우의 필모그래피가 없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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