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G(2018)>
벳시 웨스트, 줄리 코헨 감독
다큐멘터리
이 영화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거나 고난을 극적으로 이겨낸 영웅 같은 서사가 아니다. 그녀의 고난은 대개의 여성들이 생애 전반에 겪었을 법한 성차별이다. 고난이 영웅서사의 밑밥이라면 모든 여성들은 사실 영웅의 자질을 타고 났다! <원더우먼>이나, 퓨리오사가 나오는 <매드맥스> 같은 것을 상상했다면 기대와 다를 것이다. 그녀는 고리타분하고 딱딱한 남성의 문법이 오롯이 새긴 법을 다루는 직업인, 대법관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고리타분해보이는 여성 대법관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시원한 말.
미국에서 엄청난 팬덤을 형성한 여성인물을 다룬 영화 <RBG(2018)>는 미국의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미연방대법원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 초반에 깔린 경쾌한 음악은 영화에서 만날 주인공의 에너지가 얼마나 시원한지 짐작케 한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랩도 그녀의 싸움을 흥겹게 즐길 수 있게 한다.
늙은 여자는 어디서든 대우를 받지 못하는 법인데
긴즈버그는 미국의 젊은이에서 ‘Notorious RBG’로 통하는 유명인사다. ‘Notorious RBG’는 흑인 래퍼 ‘Notorious B.I.G’에서 따온 것으로 2013년 그녀의 소수의견에 감명한 뉴욕대 학생이 블로그 그녀에 대한 존경과 감사로 ‘Notorious RBG'를 개설하면서다. 그녀를 그린 그림과 패러디한 사진, 컵, 티셔츠만이 아니라 SNL 방송까지, 미국 전역에 퍼진 그녀에 대한 팬심이 얼마나 큰 지 보여준다.
가부장사회에서 여성의 자원이 되는 젊음도 긴즈버그에게는 없다. “늙은 여자는 어디서든 대우를 받지 못하는 법인데” 그것도 재미없고 딱딱한 대법관이 유명스타라니! 그녀는 퓨리오숙처럼 풍자하고 부딪히기보다는 대법관에 어울릴 법하게 조용하고 침착한 인물이다. 취미조차 오페라로 고전적인 그녀가 어떻게 세상을 사로잡았을까. 궁금증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그녀를 지칭하는 수식어인 악명(‘Notorious)은 누구에게 어떤 악명일까. 그래야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열광도 이해할 수 있다. 영화는 유대인 여성인 루스가 악명을 떨치게 된 그녀의 생애를 다뤘다.
그녀의 생이 바로 여성차별의 역사
이 영화의 매력은 한 인물의 역사 속에 미국의 성차별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닐까. 1993년에 60대라는 다소 많은 나이에 여성대법관이 된 긴즈버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여성들이 미국에서 어떻게 권리를 확보했는지 배우게 된다. 그녀는 평범한 성차별의 상황에서 차분히 차별과 맞섰다.
코넬대학 시절 남편 마티와 만나 결혼한 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다. 애를 낳고 결혼을 한 여성이 법학이라니. 그녀는 매번 쉽지 않은 선택을 했다. 그녀가 법을 공부하던 시절, 법대 여학생은 거의 없었다. 1956년 하버드 법대생 약 500명 중 여성은 9명이었다. 학교생활은 시선의 차별을 견디는 시간이기도 했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받고 훑는 것 같은 눈초리를 이겨야 했다. 도서관도 여학생들은 자유롭게 이용하기 어려웠다.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을 구하기 어려웠다. 동창인 남자친구가 로펌에 그녀를 소개했을 때도 여성이기에 거부당했다. 그녀의 여건도 공부나 일하기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를 낳고 양육을 하면서 공부와 일을 해야 했다. 게다가 남편이 암에 걸려 병수발도 해야 했다.
변호사가 된 그녀는 성차별과 관련된 소송을 적극적으로 맡는다. 특히 법제도의 문제로 발생한 사건을 맡으려 했다. 그녀는 말한다. 변론을 쓰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법조문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었다고. 여성으로서의 삶이 법정에서 차별과 맞서 싸우는 힘이 되었다. 남성들로만 구성된 판사들에게 어떻게 여성차별의 현실을 전하고 설득할 것인가. 그녀는 “스스로를 약간 유치원 선생님으로 생각”하며, 성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판사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한다. “여자라고 대우를 바라지 않아요. 그냥 우리 목에서 발이나 좀 떼세요."
그녀는 혼자 싸운 게 아니다. 여성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는 버지니아 군사대학과 벌인 소송 등 많은 사건에서 용기 있는 여성들이 성차별에 맞서 싸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화는 그녀가 1970년대 여권신장운동에 획을 그었던 사건을 사건의 당사자의 인터뷰로 엮는다. 이것이 이 영화의 두 번째 매력이 아닐까? 생생함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녀에 대한 열광은 사실 가부장제 백인 남성 주류에 맞서 용기 있는 여성들에 대한 열광이기도 한 것이다. 함께 변호했던 여성법조인, 글로리아 스타이넘 뿐 아니라 소송을 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했던 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
대법관으로서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3년 여성대법관에 임명되면서 긴즈버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새벽까지 일하는 그녀에게 힘이 되는 건 남편 마티다. “처음으로 제가 뇌가 있다는 걸 신경 쓴 사람”인 남편은 그녀가 대법관이 되도록 애쓴 장본인이기도 하다.
대법관이 돼서도 성차별과 관련한 몇몇 사건에서 그녀는 멋진 판결을 했다. '릴리 레드베터 평등임금법'의 사건이다. 퇴직을 앞두고 남성보다 40%나 적게 받았다는 걸 알게 된 레드베터는 소송을 하지만 너무 늦었다는 이유로 다수 법관들의 반대로 패소한다. 그러나 판결문에 그녀는 법의 한계를 지적하며 입법부의 노력이 필요함을 피력했고, 이후 오바마 정부 시기에 평등 임금법이 제정된다.
부시와 트럼프가 만든 스타
사실 대법관 시절에 긴즈버그의 활동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녀의 악명을 높인 건 부시정부와 트럼프 정부시절 퇴행적 판결들이다. 그녀를 스타로 만든 2013년 6월 25일 미 연방 대법원은 흑인 투표참여를 돕는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의 위헌 소송이다. ‘셸비 카운티 대 홀더(Shelby County vs. Holder)사건’으로 불리는 판결에서 그녀는 소수의견(반대의견)을 낭독해 일약 스타가 됐다. “투표권법이 훌륭하게 작동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폐기했다. 이 정도 비에는 옷이 젖을 것 같지 않다고 우산을 내동댕이치는 격이다.” 그 외에도 종교적 이유로 회사가 사후피임약을 건강보험에서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까지 미국의 헌법을 뒤로 돌리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있었고, 그때마다 평등과 인간존엄을 수호하는 긴즈버그의 반대의견이 빛을 발했다.
시대적 상황이 그녀를 스타로 만든 게 아닐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에서는 그녀의 악명에 대한 기대가 높다. 물론 그녀의 평상시 조심스런 행동과 달리 트럼프가 후보시절에 ‘사기꾼’이라고 비난해 사과까지 해야 했다. 그럼에도 오페라를 좋아하는 그녀는 트럼프에 대한 풍자를 잊지 않고 대사에 넣기까지 했다. 그녀는 여전히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헬스를 꾸준히 하며 체력관리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그녀가 운동할 때 나오는 음악은 가사나 리듬 모두 재밌다. 영화에 빨려들어 갈수 있도록 음악과 자료사진, 관련자 인터뷰가 참 잘 배치된 다큐다.
대법관 중 여성이 몇 명이 되길 바라냐는 질문에 9명 전원이라고 답한 RBG의 미소가 떠오른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으로 사법부 독립성이 이슈인 한국 사회에서 그녀의 촌철살인 같은 날카로움과 대범함을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요청하는 것처럼 들린다. 형식적인 여성할당제로는 남성중심의 판결을 꺾기 어려운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2004년 처음 여성이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에 임명된 이래 여러 여성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이 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미투운동으로 확산되는 한국의 페미니즘 리부트가 사법부도 바꿀 수 있기를 기대하게 만든 영화다. 우선 거리에서 우리부터 악명을 떨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