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영화제와 인연이 깊으신데.

여성영화제는 여성문화예술기획의 사업으로 시작했다가 ‘분사’랄까, 독립을 한 셈이다. 당시 저는 여성문화예술기획의 초대 사무국장이었다. 여성문화예술기획은 여성문화예술인들이 의기투합해서 영화 뿐만 아니라 공연, 음악, 미술, 여성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역량을 보여준 단체였다. 저와 김소영 선생님, 유지나 선생님 등이 함께 <여성의 눈으로 본 세계영화사>라고 하는 강좌를 했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는 여성영화제의 캐치프레이즈가 기원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저는 제1회 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를 맡았고, 그 이후에 부집행위원장, 공동집행위원장을 거쳐 이번에는 조직위원장을 맡게 됐다. 여성문화예술기획 사무국장으로서 여성영화제를 모색하던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함께 하고 있으니, 여성영화제는 저의 삶의 일부이자 거의 삶 자체라고 생각한다(웃음).

여성영화제가 탄생한 배경

90년대라고 하는 국면이 여성영화제가 탄생하는 데 중요했다. 95년 북경세계여성대회에서 성평등에 대한 공식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에 유네스코를 비롯한 국제기구가 양성평등(당시에는 이렇게 말했다)을 여성들만의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전제로 선언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나라에서도 문화적 정책에 관한 정부간 회의 등을 거치면서 ‘성평등 문화정책’이라고 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여성, 페미니즘, 문화를 아울러 다루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80년대까지는 ‘3S 정책’을 대표로 문화를 도구적으로 이용했던 시대다. 90년대에 탄생한 여성영화제는 영화나 문화가 도구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제를 통해 여성운동, 사회운동, 시민운동과 함께 서로 행동하고, 성찰하고, 연대하는 관점에서 시작했다.

여성영화제를 시작하셨던 당시 여성문화예술기획 이혜경 대표는 연극운동을 하셨던 분이지만, 영화가 굉장히 주요한 매체로 등장했고 그것이 여성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유지나 선생님, 김소영 선생님은 70년대 68혁명 이후 전세계적으로 여성운동이 상당한 파워를 행사하던 바로 그 시절에 굉장히 많은 여성 감독들이 그야말로 일상의 삶을 영화로 재현하면서 운동의 역량을 강화했던 역사를 기억하는 분들이었다. 또한 해외에 다양한 영화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영화를 전파하고 소개하는 분들이었다.

저 역시 유지나 선생님, 지금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이신 주진숙 교수, 상명대 서인숙 교수, 중앙대 조혜정 교수, 김경욱 영화평론가와 함께 해외에서 출판된 여성영화 비평, 여성영화의 다양성, 여성영화와 장르에 관련된 글을 번역하고 출판했다. <페미니즘, 영화,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여성사에서 책으로 출판됐었다. 이것들이 자양분이 되어서 여성영화제라는 모습으로 가시화되고, 관객들과 만난 것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영화라는 매체가 그 어느 매체보다 대중적이다. 일상의 삶의 결을 담는, 시대의 공기를 담는 그런 매체이기 때문에 여성영화제가 시의적절했다고 생각한다. 80년대에 나온 영화인 <안개 기둥>이나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는 70년대에 비해 여성들의 대학진학률이 높아져 교육의 기회는 확대됐으나 막상 일자리는 답보상태였다. 지금이야 믿거나 말거나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결혼하거나 임신을 하면 직장을 퇴직해야 했다. 물론 현재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지만, 그 때는 좀 더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공적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던 시절이었다. 또한 요즘은 미투 운동 이후 대한민국의 많은 분들이 성폭력에 대해서 이제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여성들의 현실은 비루하기 짝이 없고 폭력적인 상황에 놓여있었다. 

이 두 영화는 그런 여성들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80년대 중후반이 되면서 비록 남성 감독이 만든 영화이지만 여성들의 현실에 관한 영화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90년대에는 여성들이 주체로 등장해 우리가 여성영화를 만들고, 그것을 모아서 상영하고, 관객들과 만나서 당대의 여성의 현실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의제를 제기하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싸워나가고, 성찰하자는 취지로 여성영화제라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

일반적으로 60년대가 대한민국 영화의 황금기라 불리는데, 당시에는 인터넷으로 티켓팅을 하는 시절이 아니라서 ‘예매율’ 같은 걸 알 수가 없었다. 영화가 대박이 났다, 흥행률이 높다고 하면 기마병이 출몰해서 거리를 정리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관객이 골목을 돌고 돌고 돌아서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97년에 1회 여성영화제 때 동숭아트홀 주변이 그랬다. 정말 많은 관객들이 찾았다. 

바로 옆에 앉은 잘 모르는 관객하고도 같은 영화를 봤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담배를 피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소통하고 자기 고민을 나누고 금방 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해방구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공모의식이 컸다.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고민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내 옆의 관객도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영화를 함께 보는 행위를 통해 깨닫는 놀라운 체험이 일어났다. 동시에 나이, 세대, 지역, 성적 정체성 같은 서로 간의 차이를 확인하고 존중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연대하는 그런 모습이 영화제의 힘이 아니었나 싶다.

가끔 관객들이 영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서 감정이 격해서 본인의 얘기를 폭발적으로 발언할 때도 있었다. 어떤 영화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어렴풋이 기억나기로는 어머니와 딸에 대한 얘기 또는 나이듦과 관련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사실 저희 여성영화제는 여성들끼리의 연대만 보여주진 않는다. 갈등, 마찰음, 화해, 연대, 굉장히 많은 것을 다룬다. 우리 삶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다난하니까. 하지만 그 영화의 전체가 아니라 아주 일부분의 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각자 자신의 마음의 줄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다. 그런 것이 눈물과 울음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의 이야기를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털어놓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이런 관객과의 만남이 저는 여성영화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1회 여성영화제 때 개막작이었던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 같은 경우는 16mm 필름으로 제작된 영화인데, 지금도 필름 보존 상태와 사운드가 굉장히 불완전하다. 당시에도 필름을 복원해서 상영했고, 영화 마지막 부분은 소실된 상태다. 그 때 프로그래머였던 저의 아이디어로 여성영화제를 찾은 여성 관객들에게 영화의 마지막이 어떻게 됐을지를 상상해서 의견을 내 달라는 이벤트를 열었다. 정말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천 명이 영화를 보면 천 가지 버전이 생기고 그만큼 영화가 두꺼워진다고 생각하는데, 말 그대로 관객과 함께 영화를 재구성한 셈이다. 흥미진진했다.

여성영화제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질문인 거 같다(웃음). 일단 재정 마련이 굉장히 어렵다. 여성영화제는 관객을 통한 수입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서울시와 영화진흥위원회를 비롯해 많은 지원과 협찬을 받고 있다. 이런 지원을 받으면 필수적으로 평가를 받는다. 그 평가가 참고가 되어 다음 해 영화제 지원 액수가 결정된다.

2009년도에는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이런 평가를 남겼다. “여성들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총체적인 부족감이 더 많은 관객의 욕구에 부합하지 못하며 남성 관객들로 하여금 극단적 소외감을 부추기는 부분이 있다. 관객층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단계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이런 지적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영화제는 충성도 높은 관객의 지지만큼이나 그것에 대한 우려도 ‘남성’ 평가위원에게 받는 현실이었다. 10년 전 얘기다. 다만 이런 평가를 내렸던 영진위에 지금은 성평등소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분명히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사단법인 여성영화인 모임을 비롯해 여성영화제 역시 이런 변화에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스크린에 걸리는 영화들이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나 여성의 삶을 다룬 영화들보다는 남성중심적인 영화가 지배적이다보니 협찬을 하거나 지원하는 기관에서도 그런 영화가 당연시되고 자연화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싶다. 하지만 세상에는 지배적인 남성의 시선으로 만든 영화만큼이나 여성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여성의 삶을 다루는 영화도 많다.

우리나라는 성과중심주의가 지배적인 나라이고 상업적인 효율을 워낙 중시하는 나라다. 효율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여성영화제는 '별로'일 수도 있다. 마치 1960년대에 집안에 아들과 딸이 있다면 아들을 교육시켜 취업시키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영화제의 가치를 생각할 때는 효율성으로 판단하기보다 다양성, 공공성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영화제는 그런 가치를 더 중점에 둔다. 21세기에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한 사회가 되려면 다양성과 공공성이 정책 입안자, 실무자, 운영자 사이에서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좀 부족하기 때문에 OECD 국가 중 성평등 지수가 최하위권인 것 아닐까?

여성영화제에 ‘너무 여성의 시선만 있어서 부족하다’라고 평가했다니(웃음).

남성 관객들은 항상 얘기를 하더라고요(웃음). 올해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올해는 다르지 않을까 기대한다.

사실 여성의 눈으로 보는 세계에 대해서 본인들도 자각해야 하지 않나. 남성들만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 그런데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더라.

1895년에 영화라는 매체가 시작된 이후에 다수이자 주류는 남성 감독의 영화였던 역사가 존재하는데 그건 하나도 이상할 게 없고, 여성영화제에서 여성감독의 영화가 주류니까 되게 못 견디더라고. 어떤 면에선 흥미롭기도 하다.

어쨌든 여성영화제를 둘러싼 현실에는 그분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분들도 설득해가면서, 협상해가면서 여성영화제의 정체성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그런 경험들이 여성영화제의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앞으로 20년, 여성영화제는 어떻게 변화할까.

여성영화제는 다양한 제도나 현실은 물론 사람들과의 갈등, 협상, 연대, 협력을 통해 계속해서 변신하며 여기까지 왔다. 미래의 여성영화제 역시 그런 변신을 겪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여성영화제의 정체성이 구성될 것이다. 베니스, 칸, 부산 같은 거대한 영화제의 성격을 닮아가려고 하기보다는 우리 여성영화제만의 고유의 속성, 정체성, 역할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다른 영화제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적은 예산으로 영화제를 하다 보니 스태프들이 항상 일시적으로, 열정페이로 영화제를 만들어 온 역사가 있다. 저는 그것이 항상 가슴 아프고 속상하다. 앞으로의 20년 역사 속에서는 관객들 뿐 만 아니라, 영화를 상영하는 제작주체들 뿐 만 아니라, 영화제를 하는 사람들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신나게 여성영화제의 주인이 되었으면 한다. 여성영화제를 만드는 사람들의 활기가 미래의 여성영화제를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