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영화제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 궁금하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신촌 아트레온에서 열렸을 때인 거 같은데. 상영관 밖에 테라스 같은 공간이 있었다. 거기서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모여서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너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다.

왜냐면 여성주의자로 지내는 일상들이 굉장히 고립되어 있다거나 힘겹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꽤 있잖아요. 그런데 여성영화제에서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관 앞에서 내가 친구들과 막 얘기를 하고 있는데, 얘기를 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서 주변을 돌아봤더니 5월의 꽃과 연초록색 푸르름이 아름답게 있고, 바람은 시원하게 불고, 그런 공간에 여자들이 떼로 모여서 밝은 표정으로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격렬하게 토론도 하고, 차를 마시고, 서로에게 집중해서 몰두하고 있고. 갑자기 비현실적이면서 ‘너무 좋다’라고 느끼던 5월의 어느 날이 생각난다. 어떤 영화를 보고 너무 좋다고 생각한 적도 많은데, 지금 질문을 받았을 때 희한하게 그 장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여성영화제의 가장 큰 매력이 뭘까?

여성영화제가 시작한 게 21년 전이다. 1997년만 해도 극 영화나 한국 영화에서 여자들의 캐릭터랄까, 재현되는 방식이 너무 뻔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스크린 안에 다양한 캐릭터가 존재하는 걸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되게 기뻤던 거 같다. 성적으로 소비되거나, 어떤 사회적 역할 안에서 왔다 갔다 하지 않고 무심하게, 우리 같은 사람들. “아 그래 저렇지, 우린 주로 뚱하게 있어.”

영화의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여자라는 이유로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하거나, 섹스 어필하거나, 착해 보이는, 즉 남자들의 시선으로만 보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 친구 같거나 나의 정리되지 않은 태도 같은 것들이 보여지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너무너무 다양한 여자들의 모습.

물론 여성영화제에는 다양한 영화들이 있다. 진실을 드러내고, 알려지지 않은, 우리가 공유해야 하는 사안들을 알리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영화도 있다. 그런 영화도 재미있고 유의미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미묘한 표정, 어떤 태도, 그냥 시크하게 가만히 있는 캐릭터, 이런 식의 여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처음에는 관객으로 참여했지만 지금은 감독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오랜 시간 그냥 관객으로 영화를 열심히 보러 다니다가, 감독으로 참여할 때는 더욱 더 “여성영화제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과연 감독으로서 내가 이렇게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었을까? 기본적으로 저 같은 경우에는 영화를 제작하는 환경도 외로웠고, 그런 상황에서 여성영화제가 있다는 것이 굉장히 큰 비빌 언덕이면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됐다. 거기에 더해 영화 안에 담긴 정서나 이야기가 아주 소수만이 갖고 있는 개념인 시절에 그것을 여성영화제에서 같이 소통할 수 있었던 경험이 있다.

제가 만든 첫번째 영화는 <어떤 개인 날(2009)>이라는 영화다. 시나리오 안에서 주인공의 나이가 40대 초반이었다. 삶에 있어서 이혼이라는 어떤 충격을 받은 여자가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와서 멍 때리는 표정으로 좌충우돌한다. 그런 주인공의 대략 일주일 정도의 시간에 관한 영화다. 내 눈엔 예쁘지만 소위 말하는 대중에게 예쁨 받는 얼굴의 여배우는 아니고, 말투가 예쁜 것도 아니고, 그런 여자가 한 시간 내내 원톱으로 90분 가까이 종횡무진한다. 일단 남자들이 그 영화를 너무 싫어했다(웃음). 몹시 불편해했고, 정말 힘들어했다. 이 영화가 왜 성립할 수 있는지 이해를 못했다.

왜냐면 이혼을 했는데 영화 속에 이혼 사유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일부러 영화 속에 넣지 않았다. 그걸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유가 있었겠지. 삶에서 갑작스럽게 충격을 받을 때가 있잖아요.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삶에서 혼돈의 시간을 살아내느냐, 이런 것과 관련된 테마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남편한테 죽도록 맞은 것도 아닌데 왜 이혼했지? 이해가 안 되는 거야. 이기적이고 못된 여자 같은데. 똑똑하고 자기 말 하고 눈 똑바로 뜨면 싫어하잖아(웃음).

그런데 개봉 당시에는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도 불편해 했다. 여자들은 무조건 정서적으로 타인을 배려하거나 수용해야 한다고 훈련이 많이 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영화 속의 그 여자는 끊임없이 자기가 누군지 찾아 다니고, 애매한 자기 상황에 대해서 질문하고 돌아다니는 여자다. 그런 걸로는 영화를 만들 거리도 안 된다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거다.

그런 시절에 여성영화제에서는 그 영화를 상영해 줬고, 그 영화에 관해서 김영옥 선생님이 여성영화제 브로슈어에 써 준 소개글이 있다. 그걸 볼 때마다 이 당시에 이런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었으니까 내가 살 수 있었구나, 이런 생각을 한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이혼이라는 자체에 대해서도 터부시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혼에 관련된 일상을 표현할 언어 자체가 없다.” 내 영화가 그런 것에 대한 영화였다. 가정폭력으로 이혼, 이렇게 명백한 게 아니라, 어찌어찌해서 이혼을 한 여자가 일상을 살면서 느끼는 알 수 없는 안개 같은 무거움에 대한 얘기. 자기 자신조차도 누군지 모르겠고, 주변의 작지만 가시 같은 것들에 끊임없이 찔리면서 하루하루 나아가는 그런 얘기.

내가 만든 영화에 대해 정확한 개념과 예민한 언어로 잘 정리해 준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런 언어로 내 영화를 읽어준 단 한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큰 위로가 됐다. 지금은 이혼하는 사람도 많을 뿐 만 아니라, 이혼이 아니라도 누구한테 설명할 수 없는 고립감을 느끼면서 사는 세상이잖아요. 그런 개별성, 이해 받지 못하는 존재들의 외로움에 관한 영화거든요.

요새 그 영화를 틀면 30대, 40대 여성들이 그 영화를 너무 잘 이해한다. 답답해 하지 않고 공감을 하더라고. 옛날에는 “뭐지?” “저 정도면 그냥 살지, 왜 저거 갖고 이혼해?” 이런 얘기를 했는데.

여성영화제가 우리 사회에서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너무 많은데. 여성주의가 사실은 어떤 하나의 색깔이 아니잖아요. 예를 들면 여성주의에 입문한 사람, 입문한지 한 5년 된 사람, 여성주의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도 무심한 건 아니니까. 뭔가 걸리적거려서 자꾸 신경 쓰는 사람 등등. 여러 결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거 자체가 제일 큰 의미인 거 같다.

하나의 시공간에 모여서 같은 영화를 본다는 것.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고,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건 말건 간에, 그 경험 자체에 어떤 아우라가 있거든요. 락 페스티발 같은 거 가보면 느껴지는 그런 거 있잖아요. 여성영화제 갔다 오면 영적 샤워를 하는 거 같은 느낌. 1년 동안 살 에너지를 충전하는 거 같은 느낌. 그게 제일 큰 거 같다.

여성영화제가 앞으로도 계속 열려야만 하는 이유를 꼽는다면?

여자들이 만든 여자들의 이야기 중에 어떤 영화들은 상영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영화제 때문에 영화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 영화를 할 수 있었다고 얘기하는 여성 감독들이 꽤 많다. 저도 그런 편이다. 저 말고도 많다.

또 다른 이유는 인생이 바뀌기 때문이다. 영화 한 편이나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꾸기도 하잖아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친구 따라 갔다가 영화 한 편을 보고 갑자기 자기 삶에 잠재되어 있던 부분이 건드려져서 뭔가 시작하게 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위로 받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고.

여자들한테는 지금으로서는 이런 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매일매일이 전쟁이고 매일매일이 두려움과 불안의 연속이고, 바깥 세상과도 싸워야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자기 자신하고 싸우는 것도 만만치 않거든요. 내면에 길들여지는 것이 훨씬 골 때리는 게 많은 거 같다. 그것이 고단한 일이기도 하잖아요. 여성영화제에 와서는 나만 그런 게 아니야, 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도 있고.

이렇게 오픈 된, 여성주의로 하나가 되고,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으면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장이 있나요? 여성학회에 가서 사람들이 그러진 않을 거 아니에요(웃음). 물론 페미니즘 관련해서 요새는 북토크도 있고, 작게 크게 그런 지형이 많아지긴 했다. 그런 장소도 참 중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1년에 한 번 이렇게 이슈와 영화와 토론과 모든 것이 촥 펼쳐지는 장은 없는 것 같다.

나에게 여성영화제란?

나에게 여성영화제란 뭘까. 내가 나이테를 새기기 시작한 곳? 여성영화제가 20년이 됐잖아요. 처음 여성영화제를 드나들 때 제가 30대였다는 거다. 그런데 지금 50대 중반이 넘어갔다. 30대의 여자가 세상과 인간관계를 보는 것과 40대와 50대가 참 다르다. 사진 찍을 때 같은 대문 앞에서 계속 찍는 느낌이다. 동일한 형식과 내용의 축제가 계속 벌어지고, 나는 그곳을 계속 드나들며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는데, 관계 맺는 방식도 달라지고, 그 공간과 거기를 보는 내 시선도 달라지는 거다.

처음에는 그저 관객으로 와서 차린 밥상을 즐기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영화를 만들어서 제공하는사람이 됐고, 지금은 영화도 만들고 영화제도 조금이지만 같이 만들어 나가는 일원이 됐다. 점점 안으로 들어오며 역할이 달라졌다. 지금 50대 중반에 와서는 2~30대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한다. 내가 처음 여성영화제를 드나들던 그 나이 대 사람들의 막연함이랄까,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게 여기에 나이를 새기는 거 같은 느낌(웃음).

여성영화제가 계속 그 자리에 있으니까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저를 돌아볼 수 있는 느낌이다. 키 재기 판 같은 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여성영화제에 깊게 개입하고 있는데, 만족하시는지?

좀 더 잘 하면 좋겠지만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긴 한데요(웃음).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하고 있다. 아주 작은 부분이다. 전 아주 조금 해요. 그렇게 힘을 보태야 유지가 되는 거니까.

내가 관객이었을 때 나 같은 역할을 누가 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누군가가 이런 걸 해서 영화제가 운영이 되었고 나는 영화를 볼 수 있었겠구나. 이제야 달의 뒷면을 보면서 일을 하는 거다(웃음). 진짜 감사하다는 마음이 든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 그런 거겠죠?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시고 할 때 누군가 페달을 밟고 있었겠지, 이런 생각을 조금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