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수많은 싸움을 돌아보며

생각하다페미니즘

우리의 수많은 싸움을 돌아보며

유의미

일러스트레이터: 솜솜

안녕? 

우리는 싸우다가 만났지. 

세미나에서 집회에서 혹은 SNS에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기업과 국가와 때로는 가부장제와 이성애주의와 싸웠어. 그리고 우리는 더 잘 싸우기 위해서 또 싸웠지. 우리의 전략은 이래야 한다고, 우선순위는 이런 거라고, 업무 분담은 어때야 한다고 싸웠어. 어제까지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이자 같은 뜻을 가진 동지라고 느꼈다가도, 오늘은 또 태어나서 이토록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외쳤어. 때로는 호모포비아보다 네가 더 미웠어. 그 사람들에겐 애초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잖아. 그런데 너는 나와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함께 성장하고 있었잖아. 우리는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고, 비슷한 걸 옳다고 믿었잖아. 우리는 같은 사안에 화내고 같은 성과에 기뻐했잖아.

나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던 건 아니야. 내 중요한 정체성이 결부된 부분에서 버튼이 눌려서 싸우기 시작했어. 페미니즘이 만들어준 내 신념은 곧 나였어. 신념이 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내 의견에 대한 반박까지도 나에 대한 공격으로 느껴졌어. 반박당하면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처럼 괴로웠어. 처음엔 약간의 방법론의 차이일 뿐이고 우리의 목적지는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싸울수록 그 차이가 강같이 까마득해 보였어. 너와 싸우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며 나는 더 확고해졌거든. 너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내가 싸우는 이유는 신념만은 아니었어. 

너와 싸우기 시작하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나를 지지해주고, 주목받는 것이 기분 좋게 느껴지기도 했거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조금 흥미진진하기도 했나 봐. 우리의 싸움을 지켜보는 관객이 있을 때면 좀 더 멋지고 통쾌하게 이기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 언제부터인지 점점 너를 설득하는 것보다 무시하고 조롱하는 데에 집중하기도 했어. 싸우고 있는 나 자신에 도취해 있었어.

그러다 보니 싸움을 지속할수록 이것에 내 자존심이 걸려버렸어. 너에게 공부 좀 제대로 하고 나서 얘기하라고 무안을 준 다음엔, 나도 같은 말을 들을까 불안해져서 책을 뒤지기도 했어. 그 말의 출처를 물으며 똑바로 참고문헌을 제시하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나도 그 책을 다 이해하지 못했더라고. 너와 싸우기 위해 급하게 몰아쳐서 공부했던 거야. 아무렇게나 떠오른 대로 쓴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반박당할까 몇 번이나 검토한 게시물을 올리기도 했어. 원래 쓰던 말도 아니고, 방금 얕게 배운 용어를 쓰면서까지 내 지적 우월성을 증명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나 자신이 혐오스럽기도 했어. 나를 해방한 페미니즘의 언어를 가지고, 누군가를 상처 입히기 위한 말을 자료까지 찾아가며 공들여 쓰고 있는 거잖아. 조금 더 다양하게 공부하다 보니 너의 주장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어. 나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지만 타당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애써 외면했어. 네 주장을 부정하기 위해 너를 향해 강하게 뱉었던 말들이 있고, 오직 내 입장만이 옳다고 극단적으로 얘기할 때 환호했던 주변 사람들도 떠올랐거든. 그래도 용기를 내어 거기서 멈췄으면 좋았을걸.

너도 아마 비슷했을 거야. 

우리는 점점 더 맹목적으로 싸웠어. 때로는 말리는 사람들을 향해 화를 냈지. 타협할 수 없는 문제를 대충 봉합하는 건 우리가 늘 경계해왔던 태도와 뭐가 다르냐고 말했어. 나는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말썽꾼이 된 기분이었어. 사람들이 계속 내 편을 들어주길 바랐어. 네가 얼마나 나를 괴롭게 했는지, 내가 너와 싸워야만 했던 정당성을 얘기하기 시작했지. 과장한 건 아니었어. 정말 상처 입었으니까. 다만 굳이 그 상처를 들여다보고 파헤쳐 꺼내긴 했어. 안 그러면 다들 내가 쓸데없는 싸움을 했다고 생각할 것 같았거든. 이미 나는 싸움을 일으킨 당사자였고, 잘해야 본전이잖아. 그 본전을 찾으려고 네가 틀렸던 부분을 반복해서 강조했어.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굳이 꺼내서 이야기하기는 했어. 너는 잊고 싶었던 부분일지도 모르지만 나한테는 그게 필요했으니까.

그래, 나는 점점 너의 안위 같은 건 상관이 없어졌던 것 같아. 내가 지키고 싶었던 건 오로지 내 평판이었지. 그런데 너를 욕할수록 그 말들은 나에게 돌아왔어. 나도 다를 게 없었어. 상황에 따라 의견을 바꾼다고 너를 비난했지만, 사실은 나도 그런 사람이었어. 나도 언제 어디서나 내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지는 못했어. 나를 지지해줄 사람들이 있는지 살피고 나서, 지지받을 때나 강하게 주장하곤 했지. 나도 대다수의 사람과 의견이 다를 것 같으면 눈치를 보며 화제를 돌리기도 했어. 나 또한 친구가 조금은 과한 주장을 할 때, 그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거나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친구니까 일단은 두둔하기도 했어. 이렇게 난 여전히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더라고.

나도 신념을 실천으로 잘 연결하지 못해. 아닌 척 외면했지만, 이렇게까지 ‘빻은’ 나 자신에게 실망스러워. 화가 머리끝까지 날 때는 소수자 혐오가 담긴 욕설을 쓰기도 하고, 누군가를 파괴하기 위해 운동하는 건 아닌데도 때로는 당했던 걸 똑같이 돌려주는 방식을 선택해. 답이 아닌 걸 알면서 재미있고 속이 시원하다는 이유로 말이야. 나는 육식을 거부하던 때에도 버거킹 와퍼 세트와 닭갈비가 너무 먹고 싶었고, 페미니즘 세미나를 진행할 때도 예쁜 여자를 예쁘다는 이유로 좋아했어. 우리는 인간이고 결함 없이 올바를 수는 없어. 조금씩 나아지려고 그리고 잘못을 줄여보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게 다일 거야.

그날 거기서 너랑 죽도록 싸운 것에는 내 말이 맞는다는 확신, 내가 이길 거라는 확신, 사람들이 나를 지지해줄 거라는 확신이 다 있었을 거야.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지만, 특별히 꼭 너와 싸워 이겨야 했던 건 내 자존심 때문이었어. 그리고 직감적으로 너와 싸워도 괜찮다고 생각했나 봐. 길에서 시비 거는 할아버지, 꼰대질하는 택시기사에게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거든.

여전히 네 말은 틀렸고 그건 페미니즘이 지향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해. 너의 어떤 말들은 내 정체성에 관한 몰이해고 그게 바로 네 권력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앞으로 우리가 부딪히게 되면, 너의 삶과 운동을 부정하는 말은 쓰지 않으려고 해. 물론 내 말이 옳지만, 내 말만 옳은 건 아니더라. 내가 조금 더 공부한다고 해도 세상 모든 일을 다 알 수는 없고, 네가 했던 경험과 네가 보는 세상에서는 진실이 조금은 다를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일게. 우리가 부딪혔던 이슈에 대해 타협하는 게 아니라, 성급하고 경솔하게 너를 비난했던 걸 사과하는 거야.

지적하고 공격하는 말이 아니라, 보듬고 쓰다듬기 위한 말을 정성껏 써본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어. 때로는 네가 때로는 내가 걸었던 수많은 싸움에 우리의 자존심은 너덜너덜해졌지만, 우리가 조만간 또다시 죽도록 물어뜯고 싸우겠지만, 그래도 계속 연대하지 않을래? 우리는 모두 빻았지만, 그 구조를 너나 내가 만든 건 아니잖아. 적어도 너랑 나는 이 차별적인 구조와 싸우자는 사람이고, 방법은 좀 달라도 거기까지는 우리 합의됐잖아.

우리 앞으로도 많이 싸우겠지만, 

상대의 자아를 박살 내고 탈탈 터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는 말자. 조금 더 작은 싸움을 많이 하면 싸움이 아무 일도 아닌 일상처럼 느껴질 거야. 그러면 남들의 이목을 신경 쓸 일도, 싸움의 정당성을 홍보하려고 더욱 상처 입힐 필요도 없을 거야. 싸움은 좀 더 많아도 좋지만, 각각의 싸움엔 조금 더 연민을 갖고 임하기로 하자.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을 두고 싸우지 않을 수는 없지만, 증오를 담아 벼랑 끝까지 몰고 갈 필요도 없는 거잖아. 사실 우리는 닿을 만큼 가까워서 싸우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지 않을게. 늦었지만 정말 미안해.

언젠가 당신과 싸웠던 페미니스트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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