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지 않은 사람들 시즌 2 9. '기혼자' 답지 않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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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지 않은 사람들 시즌 2 9. '기혼자' 답지 않은 마음

유의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느티나무가 우거진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마음’을 만났다. 그는 감기에 걸려 목이 잠겼다며 유자차를 주문했다. 마음은 잘 다듬어진 문장과 단호한 말투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자칫 딱딱한 대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인터뷰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마음은 때때로 일상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독특한 어휘를 선택하고, 질문자가 생각지 못한 방향의 대답을 하기도 해서 대화가 계속 재미있고 긴장감이 넘쳤다.

Q. 오늘의 사소한 잘한 일이 있나요?

최근에 생리 기간이었고 날씨도 추워서 침대 밖으로 나오기가 힘들었어요. 근데 오늘은 샤워하고, 머리를 잘 말리고, 분칠도 하고, 정말 날씨에 딱 맞는 따뜻한 옷을 입고, 늦지 않게 잘 나왔어요! 평소에는 열두 시 반에 나가야 하는데 열두 시에 일어나서 급하게 나오기도 하는데 오늘은 안 그랬어요.

Q. 집에 있으면 주로 무엇을 하나요?

주로 가만히 앉아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합니다. SNS를 보거나 영상 매체나 책을 보거나 같이 사는 사람과 대화를 해요. 뭔가를 생산하지 않고 사는 편이에요. 같이 사는 사람이랑은 어떤 대화든 하는데, 어제는 드라마 이야기를 했어요. 자신을 순정파 남자 주인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는 제가 너무 암울한 말을 할 때 응원이 담긴 말을 해줄 때가 있기는 해요.

Q. 왜 암울한 말을 하세요?

인생이 암울해서요. 얼마 전에 강연에서 구조가 개인을 억압하는 세상, 더 철저하게 통제받는 세상이 되었다는 내용을 들었는데 그 말에 공감이 되었어요. 글로벌 시장 경제에서 고용은 불안정하고 늘어난 잉여 시간에 개인은 온라인상에서 서로를 더 촘촘하게 감시하잖아요. ‘나는 발버둥 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주로 제 우울한 기분의 원인이에요.

Q. 주로 어떤 분야의 강연을 듣나요?

제가 모르는 거라면 다 좋아요. 주로 사회 현상에 관한 강연을 좋아하고요. 요즘은 과학 교양 강연도 듣고 싶어요. 페미니즘, 철학, 사회학 강연을 듣는 걸 좋아하는데 사람이 과학도 알아야 살아가지 않겠나 싶어서요.

Q. 긴급하게 기분 좋아지는 방법이 있나요?

역시 술 아닐까요? 술을 맥주 한 캔 정도 먹으면 돼요. 단, 감자튀김도 먹어야 해요. 술을 먹으면 인지능력이 떨어져서 기분이 좋아져요. 밖에 있었다면 집에 가는 방법도 있어요. 집에 가면 기분이 좋아져요. 집에 가서 최대한 내향적인 활동을 하는 거죠. SNS를 보면 안 되고, 코미디 종류를 봐야 해요. 애니메이션 ‘스티븐 유니버스’를 보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져요.

일러스트 이민


Q. 지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나요?

원래 인간보다 동물을 좋아해요. 지금 반려동물 돌보미를 하고 있는데 반려동물이 혼자 오래 있을 때 가서 돌봐주는 일이에요. 만약 반려인이 아침에 여덟 시에 나가서 저녁 여덟 시에 집에 들어오면 강아지들은 너무 오래 혼자 있으니까, 그 중간쯤에 가서 놀아주고 산책도 하고 밥을 챙겨주는 일이에요. 그게 이상적이긴 한데, 실제로는 여행을 갈 때 많이들 불러서 일이 꾸준하지가 않은 단점이 있지요. 꾸준히 오래 일하면 강아지들이랑도 친해지고, 교육할 때 호흡도 잘 맞아서 좋거든요. 이 일은 제가 좋아하지만, 페이나 고용 안정성이 좋지 않아서 직업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게다가 제가 대중교통을 엄청나게 싫어하는데 일에 이동이 많이 포함돼요. 남이 내 몸을 건드리는 게 제일 싫거든요. 특히 요새 지하철을 많이 타는데 사람이 많아서 힘들어요. 버스는 앉아도 한쪽에만 사람이 있는데 지하철은 양쪽에 사람이 앉기도 하고 서 있어도 자꾸 지나가면서 치는 경우가 있어요.

Q. 마음은 어떻게 살고 싶어요?

편안하고 진실하게 살고 싶어요. 옛날 사람 같은 말이지만, 거짓과 가식과 허례허식을 덜어내고 스스로와 사회에 진실하게 살고 싶어요. 굳이 무언가 불필요한 것들을 하는 게, 나쁘게 말해서 허례허식이지만 좋게 말하면 관습적인 거잖아요. 저는 사실 그게 어려워서 그래요. 예를 들면 ‘굳이 옷을 아름답게 입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굳이 교수님께 굽신거릴 필요가 있을까?’ 같은 생각이 들어요. 어릴 때는 장례식에 왜 검은 옷을 입어야 하는지 궁금했어요. 누가 법에 써 놓은 게 아닌데, 다들 아는 법칙들이 저는 이해가 안 돼요. 근데 그걸 전부 다 안 하기에는 사회적 외압이 없지 않잖아요. 다 거부하기보다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서 살고 싶어요. 그러려면 같은 지향점을 가진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싫은 사람들을 안 만나고 좋아하는 사람들만 주변에 두고 살면 좋겠어요. 그리고 절대로 외부 사람들을 안 만날 수 있도록 자급자족을 하고 싶어요! 농사지어서 먹고, 자가발전하고, 자원을 조금씩만 쓰고 사는 게 이상적인데, 그게 될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작은 집을 권하다>를 읽고 그런 삶을 꿈꾸기 시작한 건데, 작은 집에 살면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는 내용의 책이에요. 거기 나온 사례들 중에는 자기 집 안에서 전기나 물도 해결이 되도록 설계한 집도 있더라고요.

Q. 혼자 사는 것과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것 중에서는 뭐가 더 좋아요?

혼자 사는 게 더 좋은 것 같아요. 사람에게는 자기가 온전히 통제하는 공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혼자 있고 싶을 때 방에 들어가면 되지만, 저는 화장실이나 부엌 같은 곳도 누구랑 공유하기가 싫어요. 상당히 많은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들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되어 있으면 화가 나잖아요. 인생 목표는 가까운 곳에 친한 사람들을 두고 혼자 사는 거예요. 내 집은 따로 있고, 친구들이 옆집에 살든 마당을 같이 쓰든 하면 좋겠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목표네요.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결국은 옆집에 살고 마당을 같이 쓰는 사이가 되길 바라지만, 지금은 피차 돈이 별로 없어서 함께 살고 있어요.

Q. 다른 청년 여성들에게 궁금한 점이 있나요?

청년 여성이면 다들 저처럼 삶을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를 것 같은데요. 어떻게 살고 싶은지 궁금해요.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모습이 나랑 얼마나 다를지 혹은 비슷할지 알고 싶어요. 그리고 삶에서 친구나 친밀한 관계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도 궁금해요. 사람들이 너무 외로워하는 것 같은데, 비즈니스 관계 외에 금전적 이득이 얽히지 않은 관계에 별로 시간과 노력을 쏟지 못하잖아요. 제가 시간을 헤프게 쓰는 편일 수도 있지만, 저는 항상 집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뭔가 일이나 공부를 하거나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기보다는 친구를 만나는 게 더 우선이거든요. 항상 그랬었어요. 고등학교 때도 친구가 발표회나 중요한 일이 있다면 만사 제치고 갔고요. 다른 사람들은 우선순위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그게 궁금하더라고요.

Q. 서울에서 청년 여성으로 사는 건 어떤가요?

청년 여성이 살기에는 대도시가 좋은 것 같아요. 요즘 보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도 싱글맘인 동백이가 쓸데없이 시골의 작은 마을로 이사를 가서 주변 시선에 고통을 받아요. 도시에 사는 건 좋은 일인데, 서울은 일단 사람이 너무 많고 여성혐오 문제도 많긴 하죠. 그래도 살 곳을 굳이 고른다면 서울이 그나마 괜찮은 편 아닌가요? 다른 청년 여성들이 많고, 서브컬쳐나 여성단체도 많고 도시에 나갈수록 기업 문화도 그나마 여성 친화적이잖아요. 아닐 수도 있지만요. 사실 저는 너무 도시에서만 살았어요. 어디를 가나 항상 북한산이 보이는 곳에서 지금껏 평생을 보냈고, 딴 데서 어떻게 사는지 잘 몰라서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Q. ‘~답지 않다’고 생각해본 적 있나요?

기혼자답지 않아요. 답지 않다고 생각해본 게 많지만 요새는 이걸 제일 많이 느낍니다. 첫째로는 외양이 그렇게 안 보이는 것 같고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젊어서 그럴까요? 둘째로는 라이프 스타일이 싱글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에요. 기혼자는 보통 집을 같이 했다든지, 결혼식을 했다든지, 대출을 같이 갚고 있다든지, 안정적인 직장이 있다든지, 집에 가서 반드시 배우자와 놀아야 한다든지, 밥을 잘 해 먹어야 한다든지. 그런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관습적인 규칙들이 있잖아요. 뭔가 정갈한 한식을 잘 차려 먹고 집에 김치도 있고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근데 저는 김치도 없고 밥도 잘 안 해 먹어요. 반려자랑 밥도 따로 먹고요. 각자 먹고 싶은 걸 차려서 같이 먹지만 요리를 같이 해 먹지는 않아요. 반찬을 사다가 먹거나 스파게티를 먹거나 아무거나 먹는 편이에요. 저는 비혼주의라서 가족을 할 수는 있지만, 결혼을 하기는 싫었고, 반려인은 결혼의 정의를 넓혀보자는 입장이었어요. 처음에는 싸웠는데, 지금은 제도적으로 결혼은 했지만, 실제로는 파트너인 것으로 둘 다 동의했습니다. 저는 가족의 정의를 넓히는 것도 좋지만 결혼이라는 이름을 갖기는 싫어요. 결혼에 결탁된 위에서 말한 이미지들에 제가 부합하지 않으니까요. 혼인신고도 엄마한테 말도 안 하고 했는데, 좀 나중에 ‘나 혼인 신고했어.’ 하고 말했어요. ‘어머, 그러니?’ 하시더라고요. 그 뒤에 파트너를 엄마에게 소개해줬어요. 엄마는 그래도 제가 한 게 결혼이라고 생각하기는 하더라고요.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A.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었는데, 상당히 좋은 부분이 있었어요. 소수자성이 우리를 설명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는데요. 여성이거나 퀴어라거나 아니면 키가 작은 것일 수도 있고요. 이런 특성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반박해야 하는 건 맞지만, 사람은 그런 소수자성의 모음이 아니잖아요. 페미니즘을 하느라 여성인 나를 사랑하는 걸 잊지 말자고, 자신이라는 구체적인 인간을 사랑하는 일을 놓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집단에 기초한 투쟁의 정치는 통쾌해 보이지만 장애나 성별, 인종, 성적 소수성이 우리를 설명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애를 수용하고, 지인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존중받고, 법의 영역에 침투해 들어가 고유한 권리와 제도를 발명하더라도 여전히 스스로를 혐오스럽고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는 장애가, 혹은 ‘잘못된 삶'이라고 평가된 바로 그 속성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므로 당연한 일이다. 장애를 가진 내가 잘못된 삶이 아니라는 사실, 실격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쓴 우리는 바로 그 장애를 가진 자신을 보듬고 돌보는 일에, 사랑하는 일에 종종 실패한다.’

-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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